1383년(우왕 9) 2월 왕이 남쪽으로 행차할 때에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로서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값진 음식을 극진히 바치고 권문귀족들에게 뇌물을 주어 신임을 얻었으므로 왕으로부터 내구마(內廐馬) 한 필을 받았다.
1385년 1월 환관 김실(金實)이 다시 장가를 들려다가 왕의 미움을 사 순군옥(巡軍獄)에 갇혔는데, 김실이 도망하자 마침 유극서가 당직이었으므로 그 책임으로 하옥되었다.
1387년 5월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로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임수(任壽), 전공판서 김승귀(金承貴)와 함께 요동에 가서 운마(運馬) 3,000필을 호송하여 바치고 돌아왔다.
이듬해 3월 연안부사(延安府使)로서 반란을 꾀하다 처형당한 임견미(林堅味)의 문객인 데다가, 또 이존성(李存性)의 말을 듣고 환관 김실을 감옥에서 도망가게 하였다는 죄로 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