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율군 ()

대동여지도 중 황해도 은율, 안악 부분
대동여지도 중 황해도 은율, 안악 부분
인문지리
지명
황해도 서북부에 위치한 군.
정의
황해도 서북부에 위치한 군.
개설

동쪽은 안악군, 서쪽은 송화군, 남동쪽은 신천군, 북쪽은 황해와 대동강 하구에 면해 있다. 동경 125°02′∼125°37′, 북위 38°24′∼38°40′에 위치하며, 면적 467.4㎢, 인구 5만 8,140명(1944년 현재)이다. 7개 면 80개 이로 구성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은율면 홍문리이다.

자연환경

지형은 구월산산맥·은율평야·장련평야로 구분된다. 구월산산맥은 구월산(九月山, 954m)을 주봉으로 산의 최고봉인 사황봉·오봉(五峰, 859m)·묵산(墨山, 658m)·구왕산(求王山, 458m)으로 이어지며, 산 모양이 소리개 같다는 무연산이 있다. 이 산은 노년기의 잔구로서 예로부터 단군이 도읍한 아사달이라 하여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던 곳이다.

은율평야는 묵산에서 흐르는 은율천과 구월산에서 발원한 한천(漢川) 연안에 전개되며, 곳곳에 20∼50m의 잔구가 남아 있다. 장련평야는 장련천(長連川) 연안에 전개되는 평야이며, 깊숙이 만입한 장련만은 간척이 잘 되어 있다.

해안선은 이도반도(二道半島)와 말전곶(末箭串) 및 그 사이에 작은 만이 만입해 심한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며, 앞 바다에는 석도(席島)·청양도(靑洋島)·웅도(熊島)·능금도(陵金島) 등이 있다.

연평균기온 11.7℃, 1월평균기온 -2.2℃, 8월 평균기온 25.6℃이며, 연강수량은 532.9㎜로 우리 나라 과우 지역의 하나인 대동강 하구 지역에 속해 있어 강우량이 적은 편이다. 첫서리는 9월 15일경, 마지막 서리는 20일경에 내린다.

역사

[고대]

구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발견된 바 없다. 남부면 장암리 군량골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이 발굴되어 이 때부터 사람들이 살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도포리와 서부면 운성리, 북부면 운산리, 남부면 구월산 지역 등지에서 고인돌이 발견되었고 토광묘 고분에서 다수의 청동기 유물과 한대(漢代) 화폐인 오수전(五銖錢)이 출토되었다. 또한 운성리의 여러 곳에서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유적이 다수 발굴되었다.

이 곳은 황해도 서북방의 해안에 접해 있어 일찍부터 앞선 선사 문화가 수용 발전되었다. 특히 건지산에 있는 길이 9m가 넘는 거대한 고인돌은 전형적인 탁상식 고인돌로 유명하다. 서부면 곡리에서는 일제시대에 낙랑과 관계되는 유적이 발굴되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로서 율구(栗口) 또는 율천(栗川)이라 불렀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인 757년(경덕왕 16)에는 양악군(楊岳郡)의 영현에 속하였다. 781년(선덕왕 2) 이후로는 패강진(浿江鎭)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지금의 은율군은 고려 건국 직후 은율현으로 편성되어 1018년(현종 9) 풍주(豐州)의 속현이 된 지역과 황주 소속의 장명진(長命鎭) 지역, 왕실 소속의 연풍장(連豐莊)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1269년(원종 10)에 모두 원나라에 몰수되어 동녕부(東寧府)에 편입되었다가, 1278년(충렬왕 4)고려에 환속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처음으로 장명과 연풍을 겸해 관할하는 감무가 부임했으나 곧 폐지되었다.

현존하는 구월산성은 본래 1012년(현종 3)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축조된 궁올산성(弓兀山城)으로 사면이 모두 험준한 절벽이고, 동서로 잔도(棧道 : 절벽 사이에 걸쳐놓은 다리의 길)를 통해 오갈 수 있을 뿐인 천험의 요새지이다.

[조선]

1396년(태조 5) 은율현에 처음으로 감무가 부임했고, 1414년(태종 14)풍천군에 합속되었다가 이듬 해 다시 분리되어 현감이 부임하였다.

1396년 장명진과 연풍장을 합쳐 장련현을 편성했고, 1414년부터 감무가 부임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15세기 중엽 두 현의 호구는 722호 2,017명에 불과하였다.

은율현은 노비가 주인을 살해한 범죄가 발생하는 등의 이유로 1663년(현종 4)장련현에 합속되었다가 1670년 복구되었고, 1688년(숙종 14)문화현에 합속되었다가 1690년 복구되는 곡절을 겪었다. 병자호란을 치른 뒤 구월산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1685년부터는 은율현감이 그 수성영장(守城營將)을 겸하게 되었다.

오리포·금산포·부성포 등은 평안도·경기도와는 물론이고, 조정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교역도 활발했던 곳이다. 1759년(영조 35)의 호구는 6,453호 2만 8,458명으로 높은 인구 증가 추세를 보였다.

[근대]

1895년해주부 은율군·장련군으로 개편되었고, 1896년황해도 은율군·장련군이 되었으며, 1909년장련군이 은율군에 합속되어 현재에 이른다.

한편 은율이 송화 쪽과 연결되어 생활권을 이루어온 데 비해 장련은 안악의 서부 지역과 연결되어 생활권이 형성되어 있었던 까닭에 평안남도 용강, 진남포와의 교류가 많아 은율보다 신문화의 유입과 외지로의 진출이 훨씬 활발하였다.

1919년 3월 12일 장련면에서부터 만세 시위가 일어나 약 3,000명의 군중이 시가를 행진하였다. 은율면에서도 3월 26일 1차로 만세 시위가 일어났으며, 군내의 시위는 4월 초순까지 지속되었다.

독립운동가로는 3·1운동 때 학생 대표로서 서울 시내의 시위를 지휘한 김원벽(金元璧)과 신흥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1919년 2월 동료들과 함께 평안북도 벽동군 헌병분견대·경찰주재소 등을 습격하고 7월에 평안남도 경찰부에 폭탄을 던지는 등의 활약을 한 박태열(朴泰烈)이 있다. 또한 아들의 독립운동에 평생 동안 뒷바라지한 김구(金九)의 어머니 곽낙원(郭樂園)도 이 곳 출신이다.

1935년 당시 7개 면으로 편성되어 있었고, 인구는 1942년에 총 1만 126가구 5만 6168명으로 황해도에서는 신계군을 제외하고는 인구 수가 가장 적었다.

유물ㆍ유적

구월산의 최고봉인 사황봉(思皇峰)에는 단군천왕당(檀君天王堂)이 있었다고 하여 조선 태종 때까지 천제(天祭)를 지내왔다. 사황토월(思皇吐月)은 은율팔경의 제7경이다. 은율의 진산 봉수봉 북쪽 기슭인 북부면 운산리에는 3,000∼1만년 전의 분묘로 공인된 고인돌이 8·15광복 때까지 남아 있었다.

이 고인돌은 규모가 큰 것으로 각국의 역사 문헌에 소개되었다. 3개의 고인돌 위에 길이 28척이 넘는 탱석(撑石)을 올려 놓았다. 은율면·남부면 일대에는 고인돌군이 있어 아득한 옛날부터 인류 생활이 발전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이 곳은 옛날 국방의 요충지로서 구월산에는 1012년에 쌓은 산성의 유지가 남아 있는데 거란·홍건적·왜구 등이 황해를 침입하는 일이 잦아 이에 대비해 축성한 것이다. 서부면 앞 바다에 있는 곰섬[熊島]에는 수군만호영의 진과 요망병(瞭望兵) 파견 초소가 있었다.

곰섬 옆에 있는 청양도에는 관영어살이 설치되어 하루 두 번 썰물 때면 큰 고기들이 수없이 살에 걸렸다. 관청에서 관리했기 때문에 ‘관살’이라고도 한다.

1018년 고을이 풍주(豐州: 지금의 송화군 풍천)에 합병되면서 폐쇄되었던 향교는 1396년 은율현이 복구된 뒤 교서감(校書監)의 교감(校勘)으로 있던 정여(鄭餘)가 감무로 취임해 향교를 세우고 학도들을 가르쳤다.

이 건물은 본래 읍의 동쪽 1㎞ 지점에 있었는데, 1514년(중종 9) 현감 정희수(鄭希修)가 읍의 북쪽 2㎞ 지점으로 옮겨 수리를 거듭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은율에서 가장 유서 깊은 건물이다. 근년에는 일부 건물을 모성학원(慕聖學院)과 은율중학교에서 사용하였다.

옛날 장련 읍치(邑治)였던 장련면 동부리·서부리에는 관아·향교·각서정(却暑亭) 등 공공 건물이 많이 있었으나 모두 없어지고 남산 언덕 위에 봉양서원(鳳陽書院)이 남아 있다. 숙종 때 유현(儒賢)인 박세채(朴世采)를 봉사하고 있는 곳으로 이 군에 단 하나 남은 유서 깊은 서원이다.

일도면 우산리에 원정사가 있고, 은율면에서 8㎞ 지점 구월산 서쪽 기슭에 있는 고찰 정곡사(停轂寺)의 대웅전은 조선 초기의 건물로 규모가 웅장하다.

‘정곡’이라는 이름은 고려 말 공민왕 때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모시고 왔던 태사(太史) 주보(周黼)가 수레를 멈추었던 데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군에는 그의 후손인 주씨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주촌’이라는 마을도 있다.

이 밖에 구월산에 용연폭포(龍淵瀑布), 남부면에 구왕굴로 유명한 구왕산이 있다. 무연낙조(舞鳶落照)로 은율팔경의 5경으로 꼽힌 무연산이 은율면을 감싸고 있다.

교육ㆍ문화

교육기관의 효시는 고려시대부터 있어 온 향교로서 1018년에 문을 닫았다가 1396년에 다시 문을 열고 감무(監務) 정여(鄭餘)가 학도들에게 강학하였다. 또 은율면에 은율향교와 장련면에 장련향교가 있었으나 이후 없어졌다.

조선시대의 서원으로는 봉암서원(鳳巖書院)과 봉양서원(鳳陽書院)이 있었다. 봉암서원은 1613년(광해군 5)에 창건해 주희(朱熹)·김굉필(金宏弼)·이이(李珥)를 봉안하고 선비들의 강학장이 되었으며, 봉양서원은 1695년에 개창해 박세채를 봉안하였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01년 은율면교회에서 광선학교(光宣學校)를 세운 것이 최초이며, 그 뒤 장련에 김구가 광진학교(光進學校)를 세우자 각 지방의 예배당에서 부설 사립학교를 세우고 개화 교육의 선구 역할을 하였다.

교회 부설 사립학교에는 광선·육영(育英)·신명(新明)·양명(陽明)·숭실(崇實)·신창(信昌)·진선(進善) 등 17개 학교가 있었으며, 사회 계통 학교로 흥도서사(興道書社)·은명학원(殷明學院) 등 15개가 있었다.

공립 학교에는 은율공립소학교·장연공립소학교·일도(一道)공립보통학교·금산포(金山浦)사립보통학교 및 감정(甘井)·은남(殷南)·서천(西川) 공립보통학교가 있었다.

중등 학교로 은율농업학교가 있으며, 군내에서 초등 교육을 마친 진학 희망자들은 대부분 서울이나 일본 혹은 미국 등지로 유학하였다. 종교 분포는 1935년 현재 천주 교회와 공소 6개소, 개신교 교회 31개소, 불교 사찰 10개소 등이 있다.

민속가면극으로 〈은율탈춤〉이 있는데, 이것은 단오날 은율의 오리숲과 구월산 기슭에서 출발해 길놀이를 한 다음 읍내 장터에서 연회를 여는 것이다. 이 밖에 은율의 백악단과 장련의 구월단이라는 체육 단체가 있어 체육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은율면 서쪽에 있는 무연산(舞鳶山)은 산을 바라보면 산 모양이 소리개가 두 날개를 펴고 날아드는 것 같아 무연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 산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은율군 해변으로 막강한 적군이 침공해 우리 군사가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전세가 불리해지고 군수 물자까지 부족한 우리 군사의 약점을 눈치챈 적군은 일대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우리 군사는 무연산 서쪽의 둥근 바위에다 거적을 덮어 군량으로 위장한 후 앞내로는 쌀 씻은 물인 양 석회를 풀어 흘려 보냈다. 그러자 적진에서는 우리 군세가 엄청난 것으로 착각하고 스스로 퇴각했다고 한다.

옛날 무연산 부근은 군사 요충지로서 군사적 성격을 띤 동리 이름이 남아 있다. 우영(右營)골·죄장(左將)골·말죽거리·난이월·묘래산(猫來山)·장대(將臺) 등이 그렇다. 구왕굴에 얽힌 설화는 다음과 같다.

옛날 어느 큰 전란 때 임금이 피난을 와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때 아랫마을에 사는 나무꾼이 굴 앞에 와서 보고, 점잖은 사람이 고생하고 있는 것을 민망히 여겨 집에서 삶은 도토리를 권했다 한다.

왕은 일찍이 궁궐에서도 먹어보지 못한 것으로 그 맛이 천하일품이었다. 이에 ‘도토리’ 혹은 ‘토리’라는 이름이 가당치 않다며 ‘상수라’로 고치게 하였다. 상수라는 수라 중의 으뜸이란 뜻이다.

얼마 뒤 난리가 평정되고 왕은 궁궐로 돌아와 구왕굴에서 먹은 상수라 맛을 잊지 못해 신하에게 구해 오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피난 때의 그 맛은 느낄 수 없고 오히려 그 맛이 쌉쌀하고 개운하지 않아 다시 그 이름을 도토리로 격하시켰다고 한다.

지금 중부 지방 이북에서는 ‘도로토리’에 가까운 ‘도토리’로 부르지만 남부 지방에서는 ‘상수라’에 가까운 ‘상수리’로 부른다.

산업ㆍ교통

도내 군 가운데 면적이 가장 작고 강수량이 적어 벼농사가 부진했으나, 관개 시설을 정비해 근년에 와서 쌀 생산량이 많아졌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밀·수수·옥수수·콩·녹두·감자 등이며, 특산물로 면화·잎담배 등이 생산된다.

또한 사과·복숭아·배·포도 등의 과수 재배가 활발하며, 남쪽 군계의 산지에서는 잣·밤·송이버섯·도라지 등이 산출된다.

수산물로는 조기·새우·조개류·낙지·홍어·민어 등의 어획이 많으며, 특히 간조 때에는 갯벌이 넓어 조개류의 채취가 많다.

광산물은 북부면 금산포와 이도면 서해리의 은율철광에서 적철·갈철·방해석·중정석 등이 채굴되며, 일도면 우산리의 구중광산(九重鑛山)에서 중석광이 채굴된다.

시장은 5일장으로 은율·장련(長連)·금산(金山)·관산·운성장이 있었으나, 관산장과 운성장은 폐장되고, 은율장은 5·10일, 장련장은 1·6일, 금산장은 4·9일에 열렸으며, 상업 거래량의 절반 이상을 은율장이 점유한다.

교통은 장련에서 은율을 거쳐 대동강을 건너 진남포에 이르는 2등도로가 교통의 간선을 이루며, 장련면 금복리로 연결되는 도로와 은율에서 금산포·신천·풍천에 이르는 국도가 있다. 금복리와 금산포·오리포·부성포 등은 포구로서 연안 항로의 기항지이며, 인접한 평안도와 경기도 등지를 오가는 해운이 있다.

한편 구월산 서쪽 기슭에 있는 용연폭포와 구왕산에 있는 구왕굴도 유명하다. 또한 여덟 군데의 아름다운 경치를 가리킨 은율팔경이 있다.

구왕굴은 산봉우리의 서남쪽에 있는데, 깎아 세운 듯한 암벽 한가운데에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만한 좁은 길로 30m쯤 들어가면 길이 끝나고 8∼9명쯤 앉을 만한 공간이 있다. 굴 입구는 아래위가 절벽이고 북쪽도 바위로 막혀 있어 통로는 남쪽으로 트인 좁은 길뿐이다. 옛날 전란 중에 왕이 이 곳으로 피난해 구왕굴·구왕산이라고 하였다 한다.

또한 구왕굴이 있는 절벽을 ‘궁와낭’이라고 하는데, 그 아래에는 절벽을 향해 경사지게 뚫린 암굴이 있고, 그 암굴을 따라 들어가면 맑고 시원한 샘물이 가득 차 있다. 이 굴의 반대 방향인 구왕산 동북쪽에는 ‘느리골냉정’이 있어서 여름철 목욕과 피서지로 유명하다.

은율면에서 8㎞ 떨어진 구월산 서쪽 기슭에 있는 용연폭포는 고찰 정곡사에서 2㎞ 지점에 있다. ‘용연’이라는 이름은 폭포수가 떨어지는 지점의 침식된 바위가 둥글게 패어 물이 고여 있는데, 그 깊이를 알 수 없고 여기에 용이 산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이 용은 영검하다 하여 예로부터 가뭄이 들면 관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동국여지승람》 은율현 산천조에 “은율현 동쪽 10리 지점에 구월산이 있다. 산허리에 못이 있는데, 고요연(高腰淵)이라고 한다. 못의 형태가 가마솥 같고 그 깊이는 알 수 없다. 전해져 오기를 여기에 용이 살아 가뭄 때면 기우제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용연폭포는 수원이 길기 때문에 가뭄에도 잘 마르지 않으며, 네다섯 길 이상 되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뇌성 같아 산을 울릴 뿐 아니라 이 곳에 생기는 물안개가 햇빛을 받아 무지개가 서린다. 이에 정곡사에 가는 사람이면 대개 용연폭포를 구경한다.

은율팔경은 은율군내의 수려한 여덟 군데의 경승지이다. 즉 한천가의 숲속에 춘색이 깃든 아름다운 모습(長林春色), 남산에 올라서 본 황해 웅도에 돌아오는 그림 같은 돛단배(熊島歸帆), 심산유곡 자연의 소리와 석양이 깃든 산속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정곡사 종소리의 정취(停轂晩鐘), 용연폭포의 아름다움(龍淵飛瀑), 무연산에 석양이 깃든 아름다운 모습(舞鳶落照), 조산평야에 벼가 누렇게 익어 도향(稻香)을 풍기며 물결치는 모습(造山黃稻), 사황봉의 봉우리에 걸쳐 있는 가을달의 아름다운 정취(思皇吐月), 구월산의 가을단풍(九月丹楓) 등 여덟 군데의 경치를 말한다.

읍ㆍ면

[남부면 南部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인구 6,469명(1936년 현재). 면 소재지는 청석리이다. 동북단에 구월산, 서부에 구왕산, 남부에 묵산·차일봉(遮日峰, 453m)이 솟아 대체로 산지가 많다. 중앙에 은율천과 그 지류가 북쪽으로 흐르며, 유역에 소규모의 경지가 발달하였다.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조·콩 등이다. 동남쪽의 산지에서는 잣·송이버섯 등이 산출된다.

은율∼장련간의 2등도로가 남북으로 통하고, 신천으로 3등도로가 나 있으며, 주요 마을에 등외도로가 개설되어 교통은 편리하다. 유적으로는 구월산성·망해암·구왕굴, 정곡리에 용연폭포와 정곡사, 산동리에 고인돌 등이 있다.

청석(淸石)·장암(長巖)·산동(山東)·정곡(停轂)·개원(開元)·석천(石泉)·봉암(鳳巖)·계림(桂林)·청계(淸溪)·남창(南昌)·갈산(葛山)·만화(萬和)·구왕(求王) 등 13개 이가 있다.

[북부면 北部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인구 7,374명(1936년 현재). 면 소재지는 서곡리이다. 면의 동부에 봉수봉(烽燧峰, 328m)이 솟아 그 여맥이 남북으로 뻗고, 서쪽으로는 금덕산의 구릉을 이룬다.

대체로 평야지대이며, 특히 서남단을 북류하는 한천과 그 지류 유역은 비교적 넓은 평야가 전개되어 주요 생산지대가 된다. 해안선이 길지는 않지만 갯벌이 넓게 발달되었다.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콩·조·보리·면화 등이다. 금산포에서 이도면의 서해리에 걸쳐 은율광산이 있는데, 이것은 역사가 긴 광산으로 한때는 연간 7만 톤의 철광석을 채굴해 송림(松林)의 제련소로 보냈다.

은율∼금산포간 3등도로가 서부를 남북으로 종단하고 버스가 운행되며, 그 밖에 각 주요 마을에 이르는 등외도로가 개설되어 교통은 대체로 편리하다. 운산리에 국내에서 가장 큰 북방식 고인돌이 있다.

서곡(西谷)·가락(家樂)·양정(陽旌)·성산(星山)·신흥(新興)·동곡(東谷)·와룡(臥龍)·금산(金山)·은이(恩伊)·운산(雲山)·간담(艮潭)·해정(海井) 등 12개 이가 있다.

[서부면西部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인구 7,362명(1936년 현재). 면 소재지는 대조리이다. 남부면의 구왕산 줄기가 면의 서부를 남북으로 뻗어내려 그 말단이 서해안에 이르고 있을 뿐 대체로 100m 이하의 구릉이 산재하고 있는 평지이다.

동남단을 은율천이 흐르고, 그 지류가 동부를 흘러 이들 유역에 평야가 전개되었다. 해안은 갯벌이 넓어 큰배가 닿을 수 없으나, 웅도와 청양도를 잇는 부근의 바다는 수심이 깊어 대형 선박의 항해가 용이하다.

주민들은 대체로 반농반어의 생활을 하고, 주요 농산물은 쌀·조·콩·보리 등이며, 이 밖에 수박이 많이 생산된다. 주요 수산물은 민어·죽합(竹蛤 : 긴 맛)·낙지·갈치 등이며, 특히 죽합과 수박은 특산물로 유명하다. 죽합은 이 지방의 독특한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진상품이었다 한다.

교통은 각 주요 마을을 연결하는 등외도로가 나 있고, 버스가 운행되어 불편하지 않다. 청양도에는 북부면 금산포에서 채굴된 철광석의 저장소가 있고, 섬 주위에는 관영어살이 있었다.

명승지로서 웅도는 경치가 좋아 은율팔경의 하나로 꼽히며, 황해에 들어오는 외국 선박을 감시하는 요지이기도 하다. 광암포(廣巖浦)에는 조선시대의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이 있었다.

대조(大棗)·고암(古巖)·석교(石橋)·양정(陽井)·강운(姜雲)·내(內)·장암(場巖)·이문(里門)·가천(佳泉)·신기(新基)·곡(曲)·송림(松林)·용암(龍巖)·운성(雲城)·청양도(靑洋島)·웅도(熊島) 등 16개 이가 있다.

[은율면殷栗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인구 6,296명(1936년 현재). 면 소재지는 홍문리이다. 면의 동남부는 구월산의 지맥이 뻗어내려 대체로 구릉성 지대를 이루며, 서부는 은율천과 그 지류가 흘러 그 유역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형성되었다.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조 등이다. 이 밖에 수박·사과·배 등의 과수도 재배되고 있다.

장련∼송화간의 2등도로와 신천∼이도간의 3등도로가 은율면내에서 교차되고, 각 주요 마을을 연결하는 등외도로가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남천리에 있는 은율향교는 도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의 하나이며, 면내를 중심으로 민속가면극인 〈은율탈춤〉이 전래한다.

홍문(紅門)·남천(南川)·풍산(楓山)·난문(蘭門)·냉천(冷泉)·조산(造山)·선암(仙巖)·무산(舞山) 등 8개 이가 있다.

[이도면二道面]

군의 북단에 위치한 면. 인구 8,675명(1936년 현재). 면 소재지는 감정리이다. 동남단에 주지산(周知山, 391m)이 솟았고, 그 주맥이 북서쪽으로 뻗어 내려 동북부는 대체로 산지를 이룬다.

서북단에는 설관산(說關山, 199m)이 솟아 반도부에 작은 구릉이 발달되어 있고, 이 밖의 지역은 대체로 평야 지대이다. 특히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며 황해로 유입되는 한천 연안의 평야는 토지가 기름지고 수리 시설이 잘 되어 면의 주요 생산 지대를 이룬다.

해안은 암벽 또는 사빈으로 이루어졌으며, 갯벌도 발달되었다. 동쪽에 말전반도(末箭半島), 서쪽에 서해반도(西海半島)가 돌출해 있고, 연안에 오리포(梧里浦)·서호(西湖) 등의 좋은 항구가 있다. 서해반도 말단에는 속도인 찬도(纂島)·해도(蟹島)가 있다.

주민들의 주산업은 농업이며,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많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조·보리 등이며, 주요 수산물은 갈치·민어·낙지·죽합·도미 등이다.

북부면에서 서해리에 이어지는 은율철광산이 있으며, 서해리에 광산사무소가 있다. 넓은 간선도로는 없고, 주요 마을에 이르는 등외도로가 개설되었으나 대체로 교통은 불편하다.

감정(甘井)·서해(西海)·운전(雲田)·고현(古縣)·문성(文城)·승학(乘鶴)·가당(柯堂)·생팔(生八)·고정(高井)·지내(池內)·어양(漁陽)·오리포(梧里浦) 등 12개 이가 있다.

[일도면 一道面]

군의 동남부에 위치한 면. 인구 4,031명(1936년 현재). 면 소재지는 누리이다. 남동부에 오봉이 있고, 서부에는 구월산의 지맥이 남북으로 뻗어 있다. 이들 산지 사이를 한천이 북류해 대동강에 유입된다. 한천 유역에는 좁고 긴 평지가 발달되어 있어 면의 주요 생산 지대가 된다.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콩·보리·조·면화 등이다. 이 밖에 축우와 양돈이 성하며, 산지에서는 송이버섯과 잣이 생산된다.

우산리의 구중광산에서는 중석이 생산된다. 은율∼장련간의 2등도로가 북부를 서남으로 통과하고, 이 도로에서 주요마을을 연결하는 등외도로가 나 있으나 교통은 불편하다.

우산리에 고려 충숙왕 때 창건한 원정사(圓井寺)가 있다. 사적비에 의하면 원나라의 순제(順帝)가 태자 시절 대청도에 한때 귀양왔다가 돌아가 이름난 목수와 좋은 재목을 보내어 지었다고 한다.

누(樓)·농림(農林)·장통(長通)·신암(薪菴)·우산(牛山)·보림(寶林)·구양(九陽) 등 7개 이가 있다.

[장련면 長連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인구 9,622명(1936년 현재). 면 소재지는 동부리이다. 본래 1414년 장명(長明)·연풍(連豐)의 2개 현을 합쳐 장련현이 되었는데, 1895년 해주부 장련군이 되고 1910년 은율군에 편입되어 장련면이 되었다.

면의 남쪽에 구월산맥에 속하는 높이 647m의 높은 산이 솟아 있고, 그 여맥이 동북으로 뻗어 봉산(峰山, 364m)을 이루었으며, 서북쪽으로는 주지산을 일으키고 그 말단은 대동강 하구에 이른다.

이들 산지의 여맥이 면내로 뻗어 작은 구릉이 각처에 발달되었으며, 산지 사이를 여우내와 그 지류가 흘러 유역에 비교적 넓은 평지가 형성되었다. 북쪽 해안에 입봉갑(笠峰岬)이 돌출되어 있고, 안악군 대항면 사이에 깊은 만을 이루고 있다.

주민들은 대부분 반농반어의 생활을 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조·과실 등이다. 주요 수산물은 새우·민어·조개류 등이다.

장련을 중심으로 2등도로가 서남쪽으로 은율 방면에, 북쪽으로 강안의 금복리에 이르며, 3등도로가 동남쪽의 안악 방면으로 통한다. 금복리와 진남포 사이에는 정기 연락선이 왕복한다. 유적으로는 봉양서원과 붕암리에 칠괴정(七槐亭)을 비롯하여 구곡의 명승지가 있다.

동부(東部)·서부(西部)·직전(稷田)·금복(今卜)·화천(花川)·율(栗)·학(鶴)·붕암(朋巖)·용포(龍浦)·관해(觀海)·감적(甘積)·사(寺) 등 12개 이가 있다.

광복 후 변천

1952년 행정구역 개편시 군의 남서쪽 남부면의 일부가 송화군에 이관되고, 옛 은율군의 은율면·일도면·남부면·서부면·북부면·이도면·장련면 등으로 이루어졌다.

1954년 황해도를 황해남·북도로 나눌 때 황해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황해남도의 서부 끝에 위치하며, 동쪽은 안악군·은천군, 서쪽은 과일군, 남쪽은 송화군·삼천군에 접해 있고, 북쪽은 황해에 면해 있다.

동경 125°04′∼125°22′, 북위 38°24′∼38°40′ 사이에 있으며, 면적 413㎢, 인구 6만 7,200여 명(1993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은 은율읍과 금산포노동자구, 연암(鳶岩)·산승(山承)·낙천(樂泉)·구월(九月)·원평(元坪)·은혜(恩惠)·산동(山東)·삼(三)·운성(雲城)·가천(佳泉)·대조(大棗)·관산(冠山)·서곡(西谷)·서해(西海)·금천(金川)·송관(松串)·철산(鐵山)·이도포(二道浦)·장련(長連)·관해(觀海)·금복(今卜)·율(栗) 등 22개 이로 되어 있다. 군 소재지는 은율읍이다.

군의 서쪽은 구월산맥(九月山脈)의 남쪽 끝에 솟은 묵산(墨山, 656m)에서 뻗어 내린 구왕산(救王山, 458m)과 더 뻗어 내린 진풍반도(眞風半島)를 이룬다. 남쪽은 구월산맥이 뻗어 내려 아사산(阿斯山, 687m)·차유령(車踰嶺) 등을 일으키고 있다.

군의 동쪽은 구월산맥의 주봉인 구월산(954m)을 정점으로 해서 오봉산(五峰山, 859m)으로 이어지며, 더 뻗어 내려 대동강 하구의 대동호에 이른다. 북쪽은 황해와 대동강에 면해 있으며, 황해를 향해 두 개의 반도가 소뿔 모양으로 돌출해 있다.

이 중 피도(避島) 끝과 남포직할시와의 사이에 서해갑문(西海閘門)이 축조되었고, 이 둑으로 거대한 대동호가 조성되었다. 군의 중앙에는 준평원으로 개석된 평지가 전개되고, 이도저수지(二道貯水池)가 있다.

주요 기반암은 화강편마암·석회암·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연평균기온은 10.2℃, 1월평균기온은 -5.1℃, 8월 평균기온은 24.1℃이며, 연평균강수량은 700∼800㎜이다.

토양은 대부분 산림갈색토이며, 이 밖에 충적토 등이 있다. 나무는 소나무가 많고, 참나무·가래나무 등도 있다. 구월산 일대는 자연보호구로 지정되어 있다.

평야지대는 한천(漢川)과 이도저수지 등에 의한 관개 시설의 완비로 벼농사를 비롯해 밀·보리·옥수수·수수·조·콩·팥 등의 농산물이 많이 재배된다. 은율 담배와 은율 수박은 특산물로 알려져 있다. 황해에서는 꼴뚜기·주꾸미·갈치·조기·새우 등이 잡히고, 갯벌에서는 조개·굴·게 등의 양식이 성하고 어획량이 많다.

금산포·서해리 등에는 철광산이 있는데, 여기서 채굴한 철을 송림(松林)으로 수송하기 위해 은파(銀波)와 서해리 사이에 은율선이 부설되어 있다. 한편 교통은 은율을 중심으로 하여 삼천·은천·서해리·과일·송화 등을 연결하는 도로가 통해 있다. 서해갑문을 통해 남포직할시와 연락되고, 서해리는 포구로 선박 출입항이 있다.

구월산에는 동물 보호 구역이 지정되어 있고, 구월산 산성이 있다. 또한 구왕산 근처에는 종유동인 구왕굴이 있으며, 관산리에는 고인돌이 있다.

이 군은 향교가 유일한 교육 시설로 600년 가량의 전통을 지키며, 현재는 봉양서원, 장련(長連)의 향교와 함께 재건되어 보존되고 있다. 구월산의 서쪽 산록에는 정곡사(停穀寺)가 있고, 그 부근에 원정사(圓井寺)가 있다. 금산포는 민요 〈백도라지〉가 시작된 곳이며, 은율탈놀이는 변질된 형태로 보급되고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동지지(大東地志)』
『여지도서(輿地圖書)』
『은율군지』(은율군지편찬위원회, 1975)
『황해도지』(황해도지편찬위원회, 1981)
『한국고고학지도』(한국고고학회, 1984)
『북한문화재 실태와 현황』(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5)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집필자
이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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