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교 ()

근대사
인물
개항기 때, 내무부참의, 대사간, 이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치억(稚億)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51년(철종 2)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연안(延安)
정의
개항기 때, 내무부참의, 대사간, 이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치억(稚億). 아버지는 현령 이원흥(李源興)이며, 어머니는 안익중(安翊重)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72년(고종 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록(官錄)·도당록(都堂錄)에 오르고, 1879년에 사은 겸 동지정사(謝恩兼冬至正使)인 윤자승(尹滋承)의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1885년에 전라좌도암행어사가 되었지만, 능주목사(綾州牧使) 김익성(金益成)의 국상이 실제와 많이 틀린다고 하여 중추(重推)를 당하였다. 그러나 2년 뒤에 다시 전라좌도암행어사로 나가 흥양(興陽)의 진결(陳結) 폐단을 바로잡기도 하였다.

그 뒤 내무부참의·대사간·이조참의를 순탄하게 천임하였지만, 신식제도에 어둡거나 불필요하다고 판단된 관리들이 대량 퇴직당한 갑오경장 이후에는 한동안 등용되지 못하였다.

수구파가 득세하였던 1898년 중추원의관이 된 뒤 서리대신사무·비서승 겸 장례를 역임하였고, 또 함경도관찰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1899년 정종대왕을 추상존호(追上尊號)할 때 채제공(蔡濟恭)과 이이장(李彝章)을 종묘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99년 비서원 승,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집필자
장영민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