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약우 ()

문간공유고
문간공유고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호조참의, 형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경용(景容)
호거(壺居)
시호
문간(文簡)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82년(정조 6)
사망 연도
1860년(철종 11)
본관
연안(延安, 지금의 황해도 연백)
주요 관직
병조참의|형조참의|공조참의|호조참의
정의
조선 후기에, 호조참의, 형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경용(景容), 호는 호거(壺居). 이길보(李吉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성원(李性源)이다.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이낙수(李洛秀)이며, 어머니는 서유후(徐有後)의 딸이다. 규장각대교 이곤수(李崑秀)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10년(순조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1813년 강릉참봉에 제수되었다가 세자익위사부수(世子翊衛司副率)를 지냈다. 이 해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에 보직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이듬해 대사성을 거쳐 1826년 병조참의, 1835년(헌종 1) 대사헌이 되고, 그 뒤 이조·병조·형조·공조·호조의 참의를 두루 역임하였다.

1841년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848년 형조판서에 이어 좌참찬으로 『삼조보감(三朝寶鑑)』의 찬집당상(纂輯堂上)을 겸하고, 이어 예조판서에 올랐다. 그 뒤 청녕군(淸寧君)에 봉해지고 공조·이조의 판서, 판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헌종이 죽자 왕의 시장제술관(諡狀製述官)이 되고, 1852년(철종 3) 이후 예조·공조·형조의 판서가 되었다.

이 후 지중추부사 겸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약우는 위로 삼조(三朝: 순조·헌종·철종)의 권우(眷遇)를 입었고, 아래로 사류(士類)의 추앙을 받아 청요직을 두루 편력하였다. 문장에 뛰어나 이약우의 상소문은 명문으로 유명하였으며, 문사(文詞)는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고, 역학·산수에도 정통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시문집으로 『문강공유고(文簡公遺槁)』가 있다.

참고문헌

『순조실록(純祖實錄)』
『헌종실록(憲宗實錄)』
『철종실록(哲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경산집(經山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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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도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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