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계술(季述), 호는 소소옹(笑笑翁). 선조의 제13자 영성군(寧城君) 이계(李㻑)의 5세손이며, 아버지는 성주목사 이명걸(李命杰)이다.
1785년(정조 9) 무과에 급제해 오위도총부도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선전관 등 여러 군직(軍職)을 거치면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순조 등극 후 좌승지·우승지를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황해도병마절도사·경기도수군절도사·영변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내직으로 우포도대장·금군별장·훈국중군(訓局中軍)·총융사·한성좌우윤·어영대장·병조참판·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1811년 평안병사가 되었을 때, 형이 황주목사로 부임하자 불편함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이 해 겨울에 홍경래(洪景來)가 청북(淸北)에서 난을 일으키자 양서순무사(兩西巡撫使)에 임명되었다. 명을 받은 뒤에 곧바로 군영을 열고 묘당(廟堂: 의정부의 다른 이름)의 의론을 써서 부수(副帥) 박기풍(朴基豊)·유후원(柳厚源)을 선봉으로 삼았다.
서울에 머무르면서 적을 토벌하는 일을 총괄했는데, 그 때 적이 정주성에 머무르면서 성을 굳게 지켜 쉽게 함락되지 않으므로 이것을 근심해 여러 번 단기(單騎)로 적에 가기를 청하였다.
군영에서 5개월을 보내면서 잠시도 군복을 벗지 않았고 여러 차례 글을 지어 서민(西民)에게 충역화복(忠逆禍福)을 깨우치고, 가산군수 정시(鄭蓍)의 관(棺)이 도성문을 지날 때는 손수 제문을 지었다 한다. 정주성 함락의 공으로 논공할 때 원훈(元勳: 공훈이 으뜸됨)으로 봉해졌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1812년 병조판서를 거쳐 한성판윤·금위대장을 역임하였다. 1813년 지중추부사로 지의금부사·지훈련원사를 겸했고, 1814년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가 이듬해 죽었다. 독서와 시를 즐겼고, 글씨를 잘 썼으며, 활을 잘 쏘았다 한다. 시호는 숙렬(肅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