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연대가 자세하지 않다. 그가 남긴 시제 등을 참고하면, 1140년대에 태어나 1190년대까지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는 무신집권기의 전반기인 명종 초에 과거에 급제하고 명종 말까지 생존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임유정은 대대로 과거급제를 했던 집안의 3형제 가운데에 둘째로 태어났다. 비상한 기억력과 시재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급제하고 늦게서 벼슬길에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미관말직을 전전했다.
양계(兩界: 고려·조선 시대에 군사적으로 중시되던 동계(東界)와 서계(西界)를 아울러 이르던 말)에서 녹사(錄事: 고려 시대에, 각급 관아에 속하여 기록에 관련된 일을 맡아보던 하급 실무직 벼슬)로서 있다. 최전방의 외교와 민정에 참여했던 것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금성(지금의 나주)에서 외직을 거쳤던 것도 확인된다.
후대에 임유정을 ‘임좨주(林祭酒)’라 칭하고, 그가 지은 책의 이름에도 이러한 말이 있는 것으로 보면 최종적으로 국자감의 좨주(祭酒: 국자감의 종삼품 벼슬)라는 벼슬을 지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증직(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일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임유정의 작품은 창조성이나 경학과는 거리가 먼 응구첩대(應口捷對: 물음에 거침없이 대답함.)의 시작으로 시대성을 반영하였다. 그래서 시문에 경학정신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 조선의 평론가로부터 외면당하였다고 평가된다.
임유정은 백가의(百家衣)체의 시를 잘 지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그의 문집이나 『동문선』에도 집구시(集句詩)만이 뽑혀 있고 순수하게 자신이 지은 시는 한편도 없다. 『동인시화』에서도 이 점에 대해 유방선(柳芳善)의 말을 빌어 임유정과 최집균(崔執鈞)이 집구(옛사람들이 지은 글귀를 모아서 새 시를 만듦. 또는 그 시)에 능하였는데, 어찌 스스로 지은 시가 한편도 세상에 전하여 인구에 회자되는 것이 없느냐고 반문한 뒤에 이것이 매우 이상하다고 하였다. 저작으로 『임좨주백가의시집(林祭酒百家衣詩集)』5권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