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의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 · 풍강(楓江) · 소치(嘯癡) · 벽산(碧山) · 겸재(謙齋)이다. 아버지는 절도사를 지낸 임진(林晉)이다.
임제는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자유분방하여 스승이 없었다. 1570년(선조 3) 22세 되던 겨울날 충청도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에 쓴 시가 성운(成運, 1497~1579)에게 전해진 일이 계기가 되어 성운을 스승으로 모셨다고 한다.
1571년(선조 4) 23세에 어머니를 여읜 후, 글공부에 뜻을 두고 과거에 몇 번 응시했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이후에도 계속 학업에 정진하여 『중용』을 800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1576년(선조 9) 28세에 생원, 진사에 합격했다. 이듬해에 알성시(謁聖試)에 급제한 뒤, 흥양현감(興陽縣監) · 서북도병마평사(西北道兵馬評事) · 관서도사(關西都事) · 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쳐 홍문관지제교(弘文館知製敎)를 지냈다.
그러나 호방하고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 탓에 벼슬길에 대한 마음이 차차 없어졌고, 관리들이 서로를 비방 질시하며 편을 가르는 현실에 깊은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벼슬에 환멸을 느껴 유람을 시작했으며 가는 곳마다 많은 일화를 남겼다. 서북도병마평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시조 한 수를 짓고 제사 지냈던 일과 기생 한우(寒雨)와 시조를 주고받은 일, 평양 기생과 평양감사에 얽힌 일화도 유명하다. 이러한 일화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평가하길 기이한 인물이라고 했으며 또 한편에서는 법도에 어긋난 사람이라 했다. 그러나 당시의 상반된 평가와는 상관없이 그의 글은 높이 평가됐다.
이달(李達), 백광훈(白光勳), 허균(許筠), 성혼(成渾), 이이(李珥), 정철(鄭澈). 신흠(申欽) 등과 교류하였다. 1578년 3월에 서울로 상경하던 도중 남원의 광한루에서 백광훈, 이달, 양대박(梁大樸) 등과 시회를 가졌고, 그곳에서 수창한 시를 모아 『용성수창집(龍城唱酬集)』을 엮었다.
그는 고향인 회진리에서 1587년(선조 20)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여러 아들에게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다. 이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라고 말한 뒤에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임제는 심성을 갈고 닦는 데 관심이 깊었다. 그의 작품 가운데 「기신군정(奇辛君亭)」은 심성을 갈고닦는 것을 중요한 문제로 다룬 시이며, 심성을 의인화한 「수성지(愁城誌)」는 그의 심성론이 설파된 작품이다. 특히 「수성지」는 근심 걱정을 시와 술로 달래면서 살아간 스스로에 대한 자전적 작품이라 평가 받는다.
임제는 평소 시조를 많이 창작했다고 하나 현전하는 시조는 3편이 전부이다. 한편, 한시는 문집에 수록되어 많은 작품이 전하고 있는데 염정시(艶情詩)가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한문소설로는 「수성지」 이외에도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남명소승(南冥小乘)」이 있다. 「화사(花史)」의 경우, 임제가 지은 한문소설로 알려져 왔으나 현재는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의 둘째 아들 남성중(南聖重)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문집으로는 초기 시문집인 『겸재유고(謙齋遺藁)』와 『임백호집(林白湖集)』 4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