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조약은 1882년(고종 19) 조선과 미국 간에 체결된 통상협정조약이다. 제너럴셔먼호사건 이후 미국은 조선 개항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다. 1871년에 포함외교로 개항을 강제로 추진하려고 조선원정을 단행했으나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정책에 부딪혀 좌절하였다. 조선은 『조선책략』을 바탕으로 개항정책을 수립하기도 했으나 척사파의 반대가 완강했다. 이 상황에서 청의 이홍장이 중재자로 나서 제물포 화도진에서 양국 대표 사이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됐다. 다른 조약에 비해 불평등이 배제되어 주권 독립국가간의 쌍무적 협약으로는 최초의 것이었다.
미국은 1844년 미청망하조약(美淸望廈條約)으로 청나라의 문호를 개방하고, 1854년 페리(Perry, M.C.) 제독의 일본원정 결과 체결된 미일조약으로 일본의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러나 청일 양국 사이에 있는 조선의 문호는 굳게 잠겨 있었다.
1866년 8월에 일어난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사건 이후 미국은 조선을 개항하는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다. 이에 1867년 슈펠트(Shufeldt, R.W., 薛斐爾)는 탐문항행을 단행, 거문도(巨文島)의 해군기지건설과 조선개항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1871년 5월 포함외교(砲艦外交)로써 조선의 개항을 강제로 성취하려고 조선원정을 단행하였으나,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정책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자, 1878년 상원의원 사전트(Sargent, A.A.)가 조선개항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즉, 조선을 개항하면 경제적으로는 대(對)아시아 무역팽창정책을 구현할 수 있고, 정치적으로는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저지할 수 있으며, 문화적으로는 조선의 개화운동을 도와줄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로써 미국 정부는 대한포함외교정책을 지양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교섭을 벌이되, 일본의 중재로써 조선개항을 성취하려고 하였다.
1880년 5월 슈펠트는 일본 외상 이노우에(井上馨)의 소개장을 가지고 부산을 방문, 교섭하였다. 그러나 동래부사 심동신(沈東臣)은 조선은 미국과 마음과 뜻이 통하지 않으므로 통교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일본의 중재에 의한 교섭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며 교섭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이 슈펠트를 톈진(天津)으로 초청하였다. 슈펠트는 한중 간의 전통적인 조공 관계로 보아 청나라의 거중조정(居中調停, good offices)만 있으면 조선개항은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초청을 수락하고 그 해 8월 톈진을 방문, 이홍장과 조선개항 문제를 협상하게 되었다.
대한정책의 최고 책임자였던 이홍장은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직후부터 조선개항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을 조약 체제(treaty system)에 편입시켜 북으로는 러시아의 남침을, 남으로는 일본의 대한침략을 저지해 보려고 이른바 연미론(聯美論)을 제창하였다.
연미론의 기본노선은 조선에 미국 세력만을 끌어들여 러시아와 일본 세력을 견제, 대한종주권(對韓宗主權)을 계속 유지하려는 속셈이었다. 주일청국공사 허루장(何如璋)은 〈삼책(三策)〉 · 〈주지조선외교의(主持朝鮮外交議)〉 등을 이홍장에게 보내면서, 조약문에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임을 명문화할 것을 촉구하였다.
한편, 조선은 『조선책략(朝鮮策略)』에 의해 개항정책을 수립하였으나 척사파(斥邪派)의 반대가 완강해 대청교섭을 비밀외교로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영선사(領選使) 김윤식(金允植)은 이홍장을 만나 조미수호통상조약 교섭의 전권을 이홍장에게 위임하는 동시에 조약문에 속국조항 삽입을 인정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교섭 전권을 위임받은 이홍장은, “조선은 본래부터 청나라의 속국이다.”는 속국조항을 명문화할 것을 고집하였다. 그러나 슈펠트는 조선은 비록 청나라의 조공국이기는 하나 정교금령(政敎禁令)은 자주자행(自主自行)하고 있는 엄연한 자주독립국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속국조항 명문화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결국 별도조회문(別途照會文)에서 속국론을 밝히기로 하고 조약은 타결되었다. 이리하여 1882년 5월 22일 제물포 화도진(花島鎭)에서 조선 전권대신 신헌(申櫶), 부대신 김홍집(金弘集)과 미국 전권공사 슈펠트 사이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전문 14조로 된 조약의 주요 내용을 보면, “조선이 제3국으로부터 부당한 침략을 받을 경우 조약국인 미국은 즉각 이에 개입, 거중조정을 행사함으로써 조선의 안보를 보장한다. 미국은 조선을 독립국의 한 개체로 인정하고 공사급 외교관을 상호 교환한다. 치외법권은 잠정적이다. 관세자주권을 존중한다. 조미 양국 국민은 상대국에서의 상업활동 및 토지의 구입, 임차(賃借)의 자유를 보장할 뿐만 아니라 영토권을 인정한다. 조미 양국간에 문화학술의 교류를 최대한 보장한다.” 등이다.
이 조약은 다른 조약에 비해 무엇보다 불평등이 배제된 주권 독립국가간의 최초의 쌍무적 협약이었다. 조선은 이 조약 체결로 수백 년간 유지해 왔던 조중 간의 종속 관계를 청산, 자주독립국가의 일원으로 국제사회에서 주권국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구미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 조약은 무엇보다, 장차 다른 구미 열강과의 입약(立約)의 본보기가 되어 국제외교의 다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