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묘역에 서면 바로 아래에 한강이 흐르고 멀리 남산과 북악을 넘어 북한산이 바라보이는 공작포란형의 명당자리이다.
이 묘는 동작릉(銅雀陵)이라고도 불렸으며, 배치와 규모를 통해 조선 왕실 후궁의 묘제도를 알 수 있다. 후궁 원묘에 보기 드문 신도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비신은 화강암이며, 신도비의 총 높이는 312cm, 비신의 높이는 204cm, 폭은 63.5cm, 받침돌의 높이는 38cm, 지붕돌의 높이는 70cm로 당시 몇 안 되는 정사각형 기둥모양을 하고 있다.
방형대석은 지반석과 좌대석이 한 돌로 되어 있어 장중하다. 옥개형 지붕돌은 유난히 크며, 꼭대기의 연단을 좌측으로 돌아가면서 새긴 약 18∼19cm크기의 전액(篆額)은 동평균오위도총부도총관 이항(李抗)이 ‘창빈안씨신도비명(昌嬪安氏神道碑銘)’이라 썼다. 비문은 예조판서 신정(申晸)이 짓고, 행 판돈녕부사 이정영(李正英)이 썼다.
건립 연대는 비문 끝의 ‘숭정기원후오십육년(崇禎紀元後五十六年)’ 기록으로 1683년(숙종9)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묘소는 사망한 이듬해인 1550년 3월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마련되었으나 이듬 해 지금 위치로 이장되었다. 국립묘지 산중턱에 자리한 이 묘소는 곡장이 둘려진 봉분 앞에 묘갈 · 혼유석 · 석등이 각기 1기씩 있으며, 문석인 1쌍이 서 있다.
창빈의 직계 후손으로 선조 이후 360여 년 동안 조선의 역대 임금이 계승되었다. 창빈 안씨의 본관은 안산이며, 1507년(연산군 5) 증(贈) 우의정 안탄대(安坦大)의 딸로 시흥에서 태어나 9살에 궁녀로 들어갔다. 생김새가 단정하고 행동이 정숙해 중종의 모후인 정현대비의 후의로 중종의 총애를 입게 되어 숙용(淑容)까지 이르렀다.
중종과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중종이 세상을 떠난 뒤 옛 법대로 중이 되어 인수궁(仁壽宮)에 물러나 있고자 했으나, 문정왕후의 특명으로 궁중에 머물다가 1549년(명종 4)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창빈의 둘째 아들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河城君)이 선조 임금이 되자 1577년(선조 10) 창빈으로 추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