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103위 성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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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103인 시성식(1984년)
천주교 103인 시성식(19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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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의 103명 성인을 총칭하는 천주교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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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한국천주교회의 103명 성인을 총칭하는 천주교용어.
내용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 기념으로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 5월 6일 여의도광장에서 한국순교복자 103위 시성식(諡聖式)을 거행함으로써 복자(福者)에서 성인(聖人)의 품위에 오른 인물들이다.

이 103위는 한국인 93명(신부 1명, 평신도 92명)과 함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10명(주교 3명, 신부 7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주교회에서 성인 반열에 오르려면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되는데, 우선 복자가 된 다음 난치병 치유와 같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두 번 이상 행해야 하고 그런 일을 교황청에 보고하여 심사를 받은 뒤 시성식을 한다.

그러나 한국의 순교복자들 경우에는 기적을 증빙할 만한 자료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한국주교단은 전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1983년 3월 ‘기적심사관면청원서’를 교황청에 제출하였고 교황청은 한국교회의 역사성을 감안하여 순교복자들의 시성을 승인하였다.

이와 같은 교황청의 배려는 ‘신앙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평신도 중심의 자생적 교회를 탄생시켰으며, 현재에도 경이적인 교세를 확장하고 있는 한국천주교회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나온 것이다.

103위 성인이 복자 반열에 오를 때에는 파리외방전교회의 도움으로 이루어졌으나, 시성추진은 한국천주교 주교단 및 2백주년기념사업위원회가 독자적으로 1980년부터 교황청에 청원하여 이루어졌다. 그것도 ‘기적심사관면’을 통과하고 전례 없이 로마 이외의 지역에서 시성식을 갖게 된 것이다.

한국교회는 2백 년의 짧은 역사 가운데에서도 천주교 성인의 10% 정도를 차지하게 되는 성인교회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시성된 성인은 교회의 성인명부에 이름이 기록되고 그 축일(祝日)이 제정되며 그를 기념하는 성무일도(聖務日禱: 성직자 기도서)와 미사경문이 작성된다.

또한 그의 이름이 세례명으로 사용되며, 그 생애나 업적에 관한 성화(聖畫)가 게시되는 등 가톨릭교회의 신자들에게 공식적으로 공경을 받게 된다.

초기 한국천주교회사는 바로 순교의 역사라고 할 만큼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그 중에서도 시성이 된 순교자들은 1839년(기해년)에서 1846년(병오년) 사이의 순교자 79위와 1866년(병인년) 대원군에 의한 박해 때 순교한 24위로서, 각각 1925년 7월 5일과 1968년 10월 6일에 로마 베드로성당에서 시복되었다.

그들의 순교시기였던 조선 후기는 봉건체제가 무너져 가는 과정 속에서도 지배적 이데올로기였던 유교이념이 강하게 유지되어 있었던 때였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신앙은 기존의 사회규범과 충돌을 피할 수 없었고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사교로 낙인찍히게 되어 당시 신앙을 지키려던 사람들은 죽음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

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자발적인 교리연구를 거쳐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영세입교하면서 형성된 신자공동체는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처음부터 박해를 받아 가문에서 쫓겨나고 신분과 재산을 잃는 고초를 겪었으며, 1836년 모방(Maubant,P.) 신부 입국으로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활동이 시작될 때까지 오랫동안 성직자 없는 평신도들만의 공동체로서 지탱하여 왔다.

정하상(丁夏祥)·유진길(劉進吉)·조신철(趙信喆) 등은 신유박해 이후 선교사 영입의 길을 찾으려고 여러 차례 북경을 내왕하여 마침내는 성직자를 영입하였다. 그리고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金大建) 신부는 사제 서품 1년 1개월 만에 한강변 새남터에서 2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또한 김효주(金孝珠)·김효임(金孝任) 자매를 비롯한 15위 동정녀들 중 몇 사람은 이미 공동생활을 하면서 병자와 가난한 이웃을 돌보았고, 이광렬(李光烈)은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독신으로 지내다가 순교하였다.

남명혁(南明赫)과 이연희(李連喜) 부부를 위시하여 모범적인 신앙가정을 이루었던 여러 부부 순교자들, 높은 사회적 지위를 지녔으면서도 정결과 가난의 모범을 보였던 남종삼(南鍾三), 박해로 부친과 재산을 잃어버리고 짚신과 미투리를 만들며 생계를 유지하면서 살았던 박후재(朴厚載), 교리를 몰라도 천주와 성모를 사랑하며 자신을 봉헌한 박아지(朴阿只), 13세의 어린 나이에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죽은 유대철(劉大喆) 등이 103위 순교성인에 포함되어 있다.

103위 성인 중 93인의 한국인 성인을 살펴보면 성직자는 유일하게 김대건 신부 한 명뿐이고 나머지 92명은 평신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는 한국교회의 평신도적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평신도 사목활동을 주관한 회장들과 외국인 사제의 활동을 보조한 복사(服事)들의 활동이 매우 현저하였다.

성인들 중 회장 출신은 이광헌(李光獻)·최경환(崔京煥) 등 21명에 이르고 있으며, 조화서·남경문(南景文) 등은 복사로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회장들은 선교사를 대신하거나 선교사와 같이 공소(公所)를 운영하고 교우 및 외교인(外敎人)을 가르치는 본연의 임무외에도 이 시기에 행하였던 특수한 임무, 즉 성직자를 영입하고 성직자의 신변을 보호하는 한편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정하상과 현석문(玄錫文)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한 당시 한국사회는 혈연공동체였기 때문에 한 가족에서 여러 명의 순교자를 내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3명 이상의 순교성인을 배출한 가족과 부자·부부·부녀·형제·모녀간의 순교자들이 상당히 있다.

이광헌은 아내·딸·동생과 함께, 그리고 최창흡(崔昌洽)은 아내·딸·사위와 함께 순교하였고, 허계임(許季任)은 두명의 딸, 시누이·외손녀 등과 함께 순교하였다.

한국 성인들의 신분과 직업은 아주 다양해서 양반·중인·상민 등이 골고루 섞여 있으며, 승지(承旨), 선공감(繕工監)·광흥창(廣興倉)의 관리, 군인·궁녀 등이 있는가 하면 상업·농업·약국·인쇄업, 심지어는 짚신을 삼고 길쌈과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한 사람들도 있다.

집안 형편은 거의가 가난하고 궁핍한 편이나 최경환·김효주·유진길·김제준(金濟俊)·정화경·김성우(金星禹)·임치백(林致百) 등과 같이 부유한 집안 출신도 있었다. 신앙 경력에서 볼 때 부모가 모두 신자였던 이들이 34명이고, 그 중 순교자 자녀만도 김대건 신부와 그의 부친 김제준, 당고모 김 데레사를 비롯하여 16명이나 된다.

순교지별로는 서소문 밖 네거리가 44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에 새남터 11명, 당고개 9명, 전주의 숲정이 7명, 충청도의 갈매못 5명, 그 밖에 평양·대구·공주가 각각 1명씩이고 나머지는 서울의 감옥에서 옥사하거나 효수되었다.

남녀별로는 남자 46명, 여자 47명이며 연령별로는 40대가 30명으로 제일 많고 50대 23명, 30대 20명, 20대 19명, 10대 4명, 60대 4명, 70대 3명이다. 출신지역별로는 서울 27명, 경기 21명, 충청도 15명이며 나머지 중에서 20여 명은 출신지가 미상인데, 대부분 지방에서 서울로 전입해 온 사람들로 추정되고 있다.

1984년 7월 2일에 한국천주교 주교단은 103위성인 탄생과 함께 주교회의 전례위원회의 공문을 통하여 한국성인의 공경에 대한 지침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9월 6일로 되어 있던 한국순교복자 대축일을 없애고 9월 20일을 한국성인 대축일로 기념하며, 9월의 복자성월(福者聖月)은 순교자성월로서 지낸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성인 대축일에는 전국 각 교구에서 현양행사를 마련하고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며, 순교성인들의 고귀한 뜻을 계승하려는 여러 가지 기념행사를 행하고 있다.

로마 교황청에서도 1984년 10월 14일에 바티칸 성 베드로광장에서 103위시성 로마경축대회를 개최하였고, 1985년 3월 12일에 교황은 한국순교성인축일을 세계공용 로마축일표에 수록하고 기념하도록 선포하였으며 또한 미사경본과 성무일도에도 수록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현재 한국천주교회가 세계적으로 많은 성인들을 배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인 공경의 분위기가 충분히 조성되고 있지 못하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한다. 그 원인은 성인들의 생애가 교회차원에서 철저히 재조명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103위성인』 Ⅰ∼Ⅲ(김옥희, 『한국가톨릭문고』 8∼10, 계성출판사, 1986)
『한국순교자 103위위인전시리즈』 Ⅰ∼Ⅵ(아드리앙 로네, 안응렬 편역, 가톨릭출판사, 1983)
『어두움을 헤친 사람들』(이병영, 성바오로출판사,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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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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