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해록 ()

고전산문
작품
조선 순조 때 정약전(丁若銓)이 대필(代筆)한 어상(魚商) 문순득(文淳得)의 표해기행록(漂海紀行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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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순조 때 정약전(丁若銓)이 대필(代筆)한 어상(魚商) 문순득(文淳得)의 표해기행록(漂海紀行錄).
구성 및 형식

우이도(牛耳島 : 지금의 소흑산도)에 유배되어 머물던 정약전(丁若銓)이 1805년(순조 5)에서 1816년 사이에 대필(代筆)한 것이다.

이본으로 1818년에 그 섬으로 유배된 유암(柳菴)이 문순득의 글을 참조하여 쓴 「표해시말(漂海始末)」이 『유암총서(柳菴叢書)』에 전한다. 이 「표해시말」은 정약전이 지은 「표해록」에 누락된 내용을 보완하고 있다.

내용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01년 12월 우이도에서 문순득과 그의 작은아버지 문호겸(文好謙)과 마을사람인 이백근(李白根)·박무청(朴無碃)·이중원(李中原), 나무꾼 아이 김옥문(金玉紋) 등 6명이 흑산도 남쪽 수백리에 있는 태사도(太砂島)로 홍어를 사러 갔다.

이듬해 1월 18일 돌아오는 길에, 우이도 서남 수백리에서 표풍(飄風)을 만나 표류하다가 2월 2일에야 유구국(琉球國) 큰 섬의 양관촌(羊寬村)에 닿았다. 10월 7일 3척의 배로 중국을 향하여 출발하였으나 10월 7일 또다시 서풍을 만나 표류하였다.

11월 1일 여송(呂宋 : 지금의 필리핀)에 닿아 머무르다가 1803년 3월 16일 다른 사람들은 먼저 출발하고, 문순득과 김옥문은 남은 복건인(福建人) 25명과 같이 광둥(廣東)·아오먼[澳門]·북경(北京)·의주(義州)를 거쳐 서울에 도착하였고, 1805년 1월 8일 귀가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 작품에는 중국·안남·유구·여송 등의 언어·풍속 등을 많이 소개하고 있다. 이 작품은 해양문학 자료로서 가치가 있으며, 한 사람의 경험을 듣고 자기의 체험처럼 사실화(寫實化)한 실기(實記)라는 점에서 기록문학적(記錄文學的) 가치가 있다. 부록으로 있는 112개의 유구어와 여송어는 귀중한 언어학 연구자료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유구·여송표류기」(최덕원, 『월간조선』, 198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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