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렬(韓相烈)은 1876년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났으며, 이명은 상열(相說)이고 자는 문극(文極)이다. 한동수(韓東洙)의 아들이다.
1907년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를 당하고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를 일으켰으며, 해산 군인이 합류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이 전개되었다, 한상렬도 1907년 8월 횡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전군대장(前軍大將) 이창호(李昌五), 중군대장(中軍大將) 김화춘(金和春), 후군대장(後軍大將) 한상오(韓相五) 등의 의병 200여 명을 이끌고 홍천 · 횡성 · 원주 · 지평 · 평창 · 영월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민긍호(閔肯鎬)와 함께 충주성을 공격하는 등 많은 전투에서 무기와 탄약을 노획하는 전공을 세웠다.
1908년 3월 19일 홍천군 서석면 청양리에서 일본군과 첫 교전 이래 3월 22일, 24일, 25일에 연이어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민긍호의 사후에 강원도 일대의 의병전이 위축되어 갔지만, 한창호의 의병 부대는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었고, 일본군은 그러한 그의 부대를 주목하였다. 일본군은 심리전을 동원하여 1908년 4월 초 홍천군 월운리 서북후동에 있는 그의 집을 급습하고 처자를 납치하여 귀순을 중용하였다. 하지만 그는 의병장 김현국(金顯國) · 금기철(琴基哲)과 4월 20일에는 횡성 수비대를 기습 공격하였다.
일제의 탄압이 계속되면서 한상렬의 부대는 20명 정도의 규모까지 축소되었다. 국내에서 의병 항쟁이 어려워지자 의병 부대를 해산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로 건너가 이범윤 · 유인석 등이 조직한 성명회에서 활동하였고, 1915년에는 주1를 조직하고 중대장이 되었다. 1920년 대한의용부의 참모로 활동하였고, 1926년에는 홍범도(洪範圖)가 조직한 대한독립단에서 보급품을 확보하고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군정부에서는 방화대(放火隊) 제2부장을 역임하면서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김좌진(金佐鎭)이 설립한 성동무관학교 내의 조직인 동우회에서 선전계, 군자금모금계장으로 있었고, 중동선(中東線) 대표로 북만주 의용군에 참여하였다. 1926년 9월 19일 민족 진영의 분열을 주2하던 주중청년총연맹(駐中靑年總聯盟)에 의하여 피살당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