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성산산성 ( )

함안 성산산성
함안 성산산성
건축
유적
문화재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과 함안면 일대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테뫼식 성곽. 산성. 사적.
이칭
이칭
조남산성, 造南山城, 함안산성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경남 함안군 가야읍 광정리 569번지
정의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과 함안면 일대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테뫼식 성곽. 산성. 사적.
개설

해발 139.4m의 조남산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 산성이다. 북쪽에는 평야가 위치하며 멀리 낙동강이 바라다 보인다. 서북쪽에는 아라가야 산성인 봉산산성(蓬山山城)과 함께 아라가야 고분인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이 내려다 보인다. 동북쪽으로는 문암산성(門巖山城)과 동지산성(冬只山城), 동남쪽으로는 성참산성(城站山城) 등이 둘러싸고 있다.

1998~2008년에 여러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결과, 성벽 및 성벽 단면, 문터, 건물터, 배수로 등의 모습과 구조가 확인되었다. 특히 저수시설 등에 대한 발굴조사에서는 많은 신라 목간들이 출토되어, 축조 시기와 역역 동원체제 등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역사적 변천

성산산성은 함안산성이라고도 불린다.『함주지(咸州誌)』고적조(古蹟條)에는 “가야국의 구허(舊墟)로 군의 북쪽 5리 성산 위에 있다. 주위는 4,383척이며, 지금도 성의 기초가 완연하다”라고 하여, 이곳을 아라가야의 옛터로 기록하였다.『일본서기(日本書紀)』권19 흠명천황(欽明天皇) 22년조에는 “…고신라가 아라 파사산에 축성하여 일본에 대비하였다”라고 하여, 561년에 신라가 축성하였다고 적었다.

발굴조사 결과 동문터와 남문터를 포함하여 안쪽과 바깥쪽 벽을 모두 돌로 쌓은 너비 8∼9m, 잔존 높이 2∼5m의 협축식(夾築式) 성벽이 확인되었다. 또한 신라 산성의 특징을 보이는 삼각형의 성벽 보축 방법, 연꽃무늬 막새 등의 기와류, 6세기 중반으로 편년되는 명문 목간, 동문터 부근의 저습지 안에서 출토된 나무로 만든 제품 등도 확인되었다. 이로써 보아 이 산성은 아라가야가 멸망한 직후인 6세기 중엽 경에 신라에 의해서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산성의 내부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낮아지다가 다시 조금 높아지는 지형이고, 서쪽에서 동쪽으로는 자연적인 경사가 이루어져 동쪽 내부에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곧 동쪽이 열려 있는 상태로 나머지 방면에 정상부 주변의 능선을 따라 돌로 성벽을 쌓은 모습이어서, 보은 삼년산성(三年山城), 문경 고모산성(姑母山城) 등 신라 산성과 유사하다. 능선의 굴곡 변화가 심하여 성벽도 굴곡이 심한 편이다.

동·서·남·북쪽 성벽은 협축식으로 쌓았는데, 맨 아래 받침 부분의 너비는 지형에 따라 0.74∼0.92m로 차이가 있으며,바깥벽 받침 부분의 단면은 삼각형이어서 보강하여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구간별로 축조 기법상의 차이가 부분적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성벽을 쌓을 때 여러 지역의 인력을 동원하였음을 뜻한다.

성벽에는 문터로 추정되는 것이 동·남·서쪽 3곳에서 확인되지만 뚜렷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남문터에서는 남북 4m, 동서 5.3m, 높이 1.1∼2.2m의 현문식(懸門式) 문터가 확인되었다. 안쪽과 바깥쪽 면에 2개의 석렬(石列)이 있고, 석렬 중간 지점에는 편평한 주춧돌이 놓인 구조이다. 바깥벽으로는 삼년산성의 북문터에서 확인된 것처럼, 길고 네모난 석축 구조물이 붙어 있다. 동문터는 여러 차례 보수되거나 고쳐 쌓았는데, 계곡을 막아 쌓은 성벽에 설치하였으므로, 정문일 가능성이 높다. 배수로는 동쪽벽과 서쪽벽에서 확인되었는데, ‘Y’자형과 일직선형 도수로와 길고 네모난 입수구와 출수구가 성벽을 관통하여 연결된 구조이다.

저수시설은 동문터 주변에 있는데, 2차례에 걸쳐 축조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1차 저수지는 돌을 평면 다각형으로 쌓았는데 2차 저수지보다 크다. 2차 저수지는 평면 타원형으로 쌓아 만든 것으로, 길이 44.3m, 너비 20.6m, 높이 2.5m 크기이다. 2차 저수지 안에는 급경사 부분에 말목을 박고 판재를 덧댄 2중의 나무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다. 안에 들어찬 뻘층에서는 나무로 만든 여러 농공구류와 용기류, 그리고 많은 목간이 출토되었다.

특징

저수지 안의 뻘층은 3m 이상의 두께로 퇴적되었다. 지금의 지표에서 바닥까지는 약 5.5m 깊이로, 동서 지름 약 90m에 달하는 범위에 형성되어 있다. 특히 2차 저수지의 동쪽벽과 1차 저수지의 석축 사이의 사방 10m 범위에는 목간 등 나무 제품들이 많은 유기물질과 함께 인위적으로 폐기되어 있다. 이것은 성벽 축조에 동원된 역부의 생활 도구들을 성을 모두 쌓고 난 뒤 함께 버린 것으로 보인다.

저수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나무방망이, 빗 등 나무로 만든 작은 제품과 함께 제첨축(題籤軸)을 포함한 묵서 목간이 230여점 등이다. 목간은 주로 하찰목간(荷札木簡)으로, ‘어떤 지역의 사람이 얼마의 곡물을 가져왔다’는 식의 내용이 주로 기재되어 있다. 목간에서 확인되는 지명은 주로 경상북도 지역으로, 감문성(김천), 급벌성(순흥), 본파(성산), 구벌성(의성), 구리벌 등이다. ‘노인(奴人)’이 많이 확인되었는데,이것은 울진 봉평비에서 확인되는 집단노인촌과는 다른 사노(私奴)로 추정된다. 그 외에 신라의 관등명인 ‘일벌(一伐)’, ‘일척(一尺)’ 등 외위(外位)도 기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성산산성은 성벽의 축성 방법이나 성돌의 가공 기술 등이 전형적인 신라 석축산성의 특징을 보일 뿐만 아니라, 저수지에서 출토된 많은 목간에 기록된 관등명이나 내용, 표기 방법 등으로 보아, 신라가 588년을 전후한 시기에 쌓은 것으로 밝혀졌다. 곧 신라가 함안의 아라가야를 정복한 뒤, 562년 대가야를 공격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축성하였던 것으로, 이 산성은 신라의 가야지역 진출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한편 저수지 출토 묵서 목간은 현재까지 하나의 유적에서 출토된 가장 많은 양으로, 여러 지역에서 역역이 동원된 사실이 적힌 신라의 지방행정체제를 알려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일본서기(日本書紀)』
『함안읍지(咸安邑誌)』
『문화유적분포지도-함안군-』(창원대학교박물관, 2006)
『함안 성산산성 출토목간』(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07)
『한국의 고대목간(개정판)』(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2006)
『함안 성산산성Ⅱ·Ⅲ』(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2004∼2006)
『함안 성산산성』(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1998)
집필자
김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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