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해미읍성 ( )

건축
유적
문화재
조선 전기, 충청남도 서산군 해미면에 있는 돌로 쌓은 읍성.
유적
건립 시기
15세기
관련 국가
조선 전기
높이
약 5m
둘레
약 1.8km 정도
면적
196,381㎡
소재지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63년 1월 21일 지정)
소재지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시도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서산해미읍성회화나무(瑞山海美邑城회화나무)
지정기관
충청남도
종목
충청남도 시도기념물(2008년 04월 10일 지정)
소재지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서산 해미읍성은 충청남도 서산군 해미면에 있는 조선 전기의 돌로 쌓은 읍성이다. 세종 때 병영으로 축성된 성으로, 임진왜란 이후 효종 때 현치를 이곳으로 옮기며 일반적인 읍성이 된 특이한 성이다. 그렇지만 병영을 옮김과 동시에 호서좌영을 이곳에 설치함으로써 군사적으로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지속하였다. 성 외곽으로는 해자를 설치하고 성 내부는 ‘T’자형 도로를 중심으로 배산(背山) 형식의 구릉 아래 동헌과 객사를 배치하고 나머지 공간에 민가를 배치하여 전형적인 읍성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키워드
정의
조선 전기, 충청남도 서산군 해미면에 있는 돌로 쌓은 읍성.
건립 경위 및 변천

현재 해미읍성 성벽의 둘레는 약 1.8km 정도이고, 높이는 일정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5~6m 정도로, 성 안에는 객사관아를 비롯한 건물이 있으나, 대부분 1963년 사적 지정 이후 복원한 것으로 원래 있던 시설물은 청일전쟁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파괴되고 훼손되었다.

조선 태종 16년(1416)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도 병마절도사 병영(兵營)을 이곳으로 옮기는 논의가 시작된 이후 세종 3년(1421) 이전이 완료되었고 그 기간에 성이 완성되었다. 이와 같이 이곳 해미성은 다른 일반적인 읍성과 달리 처음에는 고을의 치소(治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병영성으로 조성된 것이었다.

문종 원년(1451) 충청 전라 경상도 체찰사(體察使)였던 정분(鄭苯)이 하삼도의 읍성을 조사하여 올린 보고에 의하면 해미의 병영성은 충청도의 홍주, 비인, 남포, 보령, 당진, 면천 읍성과 더불어 그대로 사용하도록 한 읍성의 하나였다. 당시 기록에 둘레 3,352척, 높이 12척, 여장(女墻) 높이 3척(688개소), 적대(敵臺) 18곳 중 16개소는 아직 쌓지 않았고, 성문 4곳에 옹성(甕城)을 두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외에 성 안에 우물 3곳이 있고, 성 밖의 해자(海子) 둘레는 3,626척이라 하였는데, 이러한 기록은 현재 읍성의 규모와 형식이 충청 병영성으로 조성될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 준다.

이후 성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현(縣)의 동쪽으로 돌로 쌓은 병마절도사의 병영(兵營)이 있는데, 성의 둘레는 3,172척에 높이 15척이라 하고 내부에 세 개의 우물과 군창(軍倉)이 있다는 기록과 진남문(鎭南門) 아래 인방석에 쓰인 ‘황명홍치사년신해조(皇明弘治四年辛亥造)’라는 글을 통하여 성의 일부를 고치고 성벽을 높이는 등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후 효종 3년(1652) 충청병영을 해미에서 청주로 옮기고, 비로소 해미읍성 안에 해미현 치소와 호서좌영(湖西左營)이 들어서게 됨으로써 해미는 병영성에서 읍성으로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영조 때의 기록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성의 둘레와 높이가 각각 6,630척, 13척이고, 북문은 없고 남문은 홍예문으로 3칸 규모의 2층 누각 형식이고, 동문과 서문도 각각 3칸이라 하였다. 그 외 초루(譙樓)와 포루(炮樓)는 없으나 옹성이 2곳에 있다 하였는데, 현재 옹성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의 옹성은 현재 남아 있는 치(雉)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조선 후기 헌종 15년(1849)년 건립된 「좌영루첩중수비문(左營樓堞重修碑文)」에 의하면 당시 성첩이 붕괴되고 문루가 다 허물어졌기에 밀양 박민환(朴民煥)이 현감으로 부임하여 자금을 끌어모아 대대적인 수리를 시작하여 1848년 동문, 서문, 남문을 차례로 준공하였다고 하였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1916년 소실되었던 서문〔정분문(靜氛門)〕과 1926년 붕괴되었던 동문[규양문(葵陽門)], 그리고 현재의 남문[진남문(鎭南門)]은 이때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해미읍성이 그 기능과 모습을 잃게 되는 것은 갑오개혁 이후다. 지방 행정 체제가 23부제로 변경되면서 읍성의 기능이 폐지되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읍성 내부에 있던 공해 시설이 훼철되고 멸실되었다. 다만, 이때에도 다른 지역 읍성의 경우 성벽을 허물고 도로를 내거나 건물을 짓는 등 그 원형이 훼손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에 비하여 본 읍성의 성벽은 훼철되지 않고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였다.

형태와 특징

해미읍성은 전체적으로 남북 방향이 조금 긴 타원형으로, 북쪽으로는 구릉이 위치하고 동문과 서문을 연결하는 도로와 이와 직각을 이루며 교차하는 남문으로의 도로가 ‘T’자를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읍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진남문으로부터 북쪽의 구릉으로 이어지는 중심축 종점에 동헌 영역이 위치하며, 객사와 기타 공해 시설은 동헌의 앞쪽으로 각각 동서로 나뉘어 분포하고 있다. 이에 따라 동서가로는 일직선이 아닌 남쪽으로 굽은 형태가 되었다. 그렇지만 병영성에서 읍성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치며 비교적 늦은 시기인 영조 30년(1754) 무렵에 객사가 건축되어 객사의 축이 동헌과 일치하지 않는다.

발굴 조사 결과 기록에서와 같이 읍성 외곽으로 해자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축성 과정에 충청도 각 지역의 도민들이 동원되어 구간별로 책임을 지고 공사하였음을 성돌에 새겨진 각자석(刻字石)을 통해 알 수 있다.

의의 및 평가

해미읍성은 세종 초에 고을의 치소가 아닌 병영성으로 축성되었고, 임진왜란 이후 효종 때 병영을 청주로 옮기고 현치를 이곳에 둠으로써 일반적인 읍성이 된 특이한 내력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호서좌영이 설치됨으로써 여전히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유지하였다. 성 외곽으로는 해자를 설치하고 성 내부는 ‘T’자형 도로를 중심으로 배산(背山) 형식의 구릉 아래 동헌과 객사를 배치하고 나머지 공간에 민가를 배치하였다.

조선 초기 축성 연대가 정확하고, 비록 성내 시설 대부분 멸실되거나 훼철되었으나, 기록으로 전하는 당시 축성 규모와 형식이 일제강점기와 근대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크게 훼손되거나 훼철되지 않고 유지됨으로써 지방 읍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참고문헌

원전

『세종실록지리지』
『문종실록』
『여지도서』

단행본

『서산군지』(서산군지편찬위원회, 1975)
『문화재대관』(문화재관리국, 1976)

논문

김진우, 「문헌을 통한 해미읍성 고찰」(『아시아문화연구』 24,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2011)
김회정‧이정수, 「해미읍성 객사의 위치 및 건축구성 연구」(『건축역사연구』 21, 한국건축역사학회, 2012)
임선빈, 「조선시대 해미읍성의 축성과 기능변천」(『역사와 담론』 58, 湖西史學會, 2011)

기타 자료

「해미읍성 정비계획」(서산시,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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