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집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사헌부지평, 사간원헌납, 승문원교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대성(大成)
송은(松隱)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양천(陽川)
주요 관직
사헌부지평|사간원헌납|승문원교감(承文院校監)
정의
조선 전기에, 사헌부지평, 사간원헌납, 승문원교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백화(伯和). 허기(許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허추(許樞)이고, 아버지는 허황(許葟)이다. 어머니는 곽분(郭汾)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참봉(參奉)으로 1483년(성종 14) 춘장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87년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가 되어 그의 아버지가 사간으로 재직할 때, 신장(訊杖: 장으로 신문을 받음.)을 받게된 것을 가지고 글을 올려 용서를 구하였다. 이듬해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으로 안산에 파견되어 수령칠사(守令七事)의 상황을 지적하였다.

1491년에는 ‘허혼(許混)이 속임수를 행해 나라를 속이고 흔단을 열어 구적(寇賊)을 불러오게 했으니 목을 베지 않는다면 후일의 사람을 징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홍문관부교리로서 아버지 황을 보석시켜 줄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1492년 시독관(侍讀官)으로 도첩(度牒: 승려로서의 신분증)이 없는 중들이 사찰에 숨어 있는 자가 많은데 만약 관차(官差)를 절에 올라갈 수 없게 한다면 그들을 잡을 수 없다하며 법을 고칠 것을 주장하였다.

또, 문형(文衡)을 담당하는 대제학에 적합한 인물을 의논할 때, 이자건(李自健)·이달선(李達善) 등과 의논하여 신종호(申從濩)를 추천했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이어 봉훈랑 수사헌부지평(守司憲府持平)을 거쳐 지평으로 경연에 나아가 “여러 왕자와 옹주의 집이 너무 높고 큰 것에 힘쓰며 그전 옛집의 재목과 기와는 모두 버리고 쓰지 않으며 아름다운 재목을 탐내니 나무를 운반하는 데 백성들이 피곤해지는 폐단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또 사헌부지평으로 등문고(登聞鼓)가 설치되어 있으나 종친의 아내가 길가에서 억울함을 호소한 것은 풍속과 교화에 해가 되니 바로잡는 것이 좋을 것이라 건의하였다.

또, 모든 읍의 수령들이 중국사신을 접대한다는 핑계로 백성들을 매우 괴롭히고 있으니 조관(朝官)을 보내어 불법 행위를 규명할 것, 또 북정(北征)할 때에 원수가 절도를 제대로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을 논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건의하였다.

사헌부지평으로 중국사신의 접대에 소홀했던 성균관당상과 벽제의 차사원(差使員)을 국문하도록 하였다. 사간원헌납이 되어서는 문자(文字)사이에 언어의 적중함을 잃었다는 것으로 만약 죄를 다스리면 언로에 해가 될 것이라 건의하였다.

1493년 봉훈랑(奉訓郞) 사간원헌납이 되고, 그 뒤 예조정랑으로 한 자급 올려 받았으나 곧 자급은 환수되고 말 한 필이 하사되었다.

이듬해 통선랑(通善郞) 수사헌부장령(守司憲府掌令)을 거쳐 이조정랑에 천거되었다. 1499년(연산군 5) 조산대부 승문원교감(承文院校監)으로 『성종실록』을 편찬하였다.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참고문헌

『성종실록(成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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