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황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사간, 사복시정, 진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양천(陽川)
주요 관직
사간(司諫)|사복시정(司僕寺正)|진주목사(晉州牧使)
정의
조선 전기에, 사간, 사복시정, 진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양천(陽川). 호는 자실(子實). 허금(許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허기(許愭)이고, 아버지는 허추(許樞)이며, 어머니는 최선(崔宣)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68년(세조 14) 진사로서 춘장문과(春場文科) 갑과에 급제하고, 1470년(성종 1) 감찰(監察)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의망(擬望: 후보자로 추천됨.)되었다. 이 때 감찰로서 교동현감(喬桐縣監) 탁신지(卓愼志)가 탐학한 것을 국문하였다.

1473년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었고, 이듬해 3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교외에서 습진(習陣)할 때 병조정랑으로 술을 가지고 가서 위로했으며, 병조정랑으로 윤대하였다. 1482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고, 이어 경연에 나아가 마친 뒤 장령으로서 한치례(韓致禮)와 이효백(李孝伯)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또 장령으로 절에 다니는 유생에게 과거 응시를 정지하게 한 왕의 명령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사헌부장령으로 홍백연(洪伯涓)과 안중좌(安仲佐)의 벼슬을 빼앗기를 청했으며, 진휼사의 폐해에 대해 아뢰었다.

이듬해 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 봉렬대부(奉列大夫)를 거쳐 사간(司諫)이 되었고, 사간으로 송영(宋瑛)을 탄핵하고 파직을 청하였다.

1484년 사간으로 중을 사역시켜 도첩을 주는 것이 부당함을 아뢰었으며, 이듬해 사간으로 회령부사(會寧府使) 이공(李拱)을 치죄하기를 청하고, 사간으로 이심원(李深源)의 파직을 청하였다. 또 경연 후 심정원(沈貞源)이 영해부사(寧海府使)에 마땅하지 않다고 건의했고, 뇌물을 받은 관리 자손의 허통이 법에 어긋남을 상소하였다.

또 전석동(全石童)·이성손(李成孫)이 수령에 적합하지 않다고 차자(箚子: 왕에게 간단한 서식을 갖추어 올리는 글)를 올리고 형조참의에 임명된 민영견(閔永肩)을 탄핵하였다. 1486년에는 사간으로 임사홍(任士洪) 등에게 직첩을 주지 말도록 청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사간으로 이숙(李潚)의 죄를 청했고, 사간으로 신장(訊杖)을 받게 되었으나 곧 직첩을 되돌려 받았다. 1489년 강원도 평강에 파견되어 수외의 군기(軍器)를 적발했으며, 이듬해 중직대부(中直大夫) 사간이 되고, 곧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추천되었으나 상피법(相避法)에 적용되어 임명되지 못하였다.

1491년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승진되고, 양전종사관(量田從事官)으로서 충주목사(忠州牧使)를 거쳐 1493년 진주목사(晉州牧使)가 되었다.

참고문헌

『성종실록(成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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