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는 독특한 무사도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화랑들의 전기를 보면, 당시에 화랑뿐 아니라 낭도나 일반 병졸에 이르기까지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무엇보다도 전사를 명예로 여기는 무사도의 정신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다만, 전쟁터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화랑집단의 성원들은 목숨을 가볍게 여겨 『삼국사기』의 저자로 하여금 이를 개탄하게 할 정도였다.
이러한 무사도는 특히 화랑출신의 장군들이 모범을 보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 백제를 치기 위한 원정군의 주요한 장수는 김유신을 비롯해 그의 아우인 흠순(欽純, 또는 欽春)과 품일(品日) 등이었다.
황산(黃山)벌판의 싸움에서 품일과 김흠순은 신라군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해 각기 아들인 화랑 관창(官昌)과 반굴(盤屈)을 전사하게 하였다.
한편, 김유신은 672년(문무왕 12)에 그의 아들 원술(元述)이
석문전투(石門戰鬪)주 01)에서 당나라군과 싸워 패하고 돌아오자, 왕명을 욕되게 하고 가훈(家訓)을 저버렸다는 이유로 그를 죽일 것을 왕에게 탄원한 적도 있다.
비록 원술은 왕의 비호로 목숨을 구했으나 감히 아버지를 볼 수 없었으며, 아버지가 죽은 뒤에 어머니를 만나려 했으나 끝내 어머니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이러한 무사도는 화랑도의 집단수련을 통해 배양된 것이었다. 신라의 무사도에 대해서는 일본의 무사도를 자랑해 마지않는 일본의 역사가들조차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 초기의 이름난 무장이었던 구마가이(熊谷直實)가 전쟁터에서 끊임없이 자기 아들을 비호한 것과 정반대되는 일이라고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화랑도의 수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노래와 춤이었다. 본래 노래가 정신교육에, 특히 청소년의 의기를 북돋우는 데 이바지하는 것은 매우 큰데, 「도령가 徒領歌」나 「사내기물악 思內奇物樂」은 바로 화랑도의 노래로 알려져 있다.
이 점에서 화랑도는 다른 민족의 청소년집단이나 전사조직과 마찬가지로 가무조합(tanzengesellschaft, dancing society)으로서의 일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화랑도의 노래와 춤은 그들의 명승지순례와 더불어 놀이(play, spicl, jeu)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물론, 화랑도의 국토순례라든지 노래와 춤이 어떤 실제적인 목적에서 떠나 다만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진 것은 아니었으나, 역시 놀이의 성격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인간을 놀이하는 존재, 이른바 호모 루덴스(Homo Ludens)로 보는 후이징하(Huizinga, J.)나 그 비판적 계승자라고 할 수 있는 카이요와(Caillois, R.)에 의하면 놀이는 인간의 본질이며 동시에 문화의 근원이라는 것인데, 제식(祭式)·주술(呪術)·전례(典禮)·비적(祕蹟)·밀의(密儀) 등이 이 놀이의 적용 영역에 잘 들어맞는다고 한다.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문화가 놀이의 성격을 잃게 되면 그 근원으로부터 떨어져나가는 결과를 초래해 마침내 붕괴의 길을 걷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놀이는 진지함이나 혹은 실제적 이익과 양립하는 것으로서 이 두 가지는 허구와 현실 사이에서 영원히 대립과 화해의 과정을 되풀이하며, 양자가 일정한 거리를 둔 긴장관계에서만 참된 문화가 유지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정한 거리가 없어질 때 문화는 생명을 잃게 되고, 열광(fanaticism)이라고 하는 일종의 극한적인 정신상태를 초래하게 된다고 한다. 나아가 이 극한상황에서는 놀이의 법칙이 무시되며, 다만 적과 동지, 흑(黑)과 백(白) 이외의 판단은 불가능해진다고 한다.
이러한 놀이의 사상은 직(直)과 예(禮)의 균형 조화를 강조한 유교의 예악사상(禮樂思想)과도 서로 통하는 바가 있는데, 화랑도의 인격형성이나 나아가서는 그 세계관 형성에 이 놀이의 성격이 내포되어 있는 점은 흥미있는 사실이다.
화랑도는 불교의 미륵신앙(彌勒信仰)과 결부되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화랑은 도솔천(兜率天)에서 하생(下生)한 미륵으로 여겨졌으며, 집단 자체가 미륵을 좇는 무리로 일컬어졌다.
화랑 김유신의 무리는 당시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렸으며, 화랑 죽지랑(竹旨郎)의 탄생설화에 미륵이 등장하고, 또한 진지왕 때에 승려 진자(眞慈)가 항상 당주(堂主)인 미륵상 앞에 나아가 대성(大聖)이 화랑으로 화신해 이 세상에 나타나기를 빌었다는 미륵선화(彌勒仙花)의 이야기 등은 모두 화랑도와 미륵신앙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실례들이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화랑도 자체를 미륵신앙에 의해 결합된 동신자(同信者) 집단으로 보기까지 한다. 나아가 화랑도가 가장 활기를 띤 600년을 전후해 특히 많이 만들어진 미륵반가사유상이야말로 바로 화랑집단이 찾고 있던 미륵의 모습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미륵 화랑도가 미륵신앙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화랑도의 운동 자체를 미륵신앙과 흔히 결부되어 있는 메시아주의 운동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중국이나 우리 나라의 불교적 메시아주의 운동은 대개 미륵신앙에 집약되어 종교적인 성격을 띤 반란이나 정권장악을 위한 한 방편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화랑과 결부되어 나타난 6∼7세기경의 미륵신앙은 하루라도 빨리 이상국가를 건설해보고 싶다는 왕실 및 귀족계급의 열망에서 나온 것일 뿐, 화랑도조직 자체는 어디까지나 현실의 왕권과 권력기구를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