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사변은 1921년 러시아 자유시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이다. 흑하사변이라고도 한다. 소련은 차르 정권이 몰락한 혼란을 틈타 시베리아 연해주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을 협상을 통해 철수시키려 했다. 그러자 일제는 소련 영내에 집결해 있던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강력히 요구했다.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던 소련은 대한독립군을 볼셰비키로 흡수하여 일본과의 마찰을 피하고자 무장해제 명령을 내렸다. 상해 고려공산당의 입장을 따르던 독립군이 이에 불응하자 공격을 감행하여 사망자 272명 등 600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었다.
1921년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으로 흑하(黑河)사변이라고도 한다. 자유시는 러시아 제야 강(Zeya river)변에 위치한 ‘알렉세예브스크(Alekseyevsk)’ 마을이며, 현재는 ‘스바보드니(Svobodny)’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러시아어로 ‘스바보다(Svoboda)’가 ‘자유’를 뜻하기 때문에 ‘자유시’라고 불렸다. 그리고 제야 강이 흘러 흑룡강(黑龍江)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중국의 국경도시 헤이허[黑河]의 지명을 따서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한다.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을 감행한 일본군을 피해 만주 일대 독립군 부대는 항일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조직을 대한독립군단으로 규합하고 연해주로 이동하기로 결정한다. 1921년 3월 부대별 이동을 시작해 국경을 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부대가 만주에 남고 일부가 연해주까지 이동했다.
러시아로 이주한 독립군은 소련 적군(공산군) 소속 한인 부대장을 통해 군사훈련에 도움을 받는가 하면, 소련 정부와 군사협정을 맺고 무기를 공급받는다. 이에 일제는 강력한 외교공세를 벌여 소련 정부에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한다.
혁명 후 내란 발생이 불안했던 소련은 1921년 6월 22일 자유시에 주둔한 한국 독립군에게 무장해제의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사살하고 포로로 잡은 사건이다. 이 사건은 직접적으로는 사할린의용군이 소련 적군의 포위와 공격에 의한 참변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한국독립군의 해체를 요구하던 일본군과 볼셰비키 공산당의 협상이 있었다.
시베리아 연해주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을 협상으로 철수시켜야 했던 볼셰비키 공산당은 일본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고 대한독립군을 볼셰비키로 흡수하여 일본과 마찰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독립군 내부적으로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 상하이 고려공산당 간의 정치적 대립투쟁까지 겹쳐진 결과로 일어난 복합적인 배경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에서의 대패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를 침략하였는데, 이 보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적단을 매수하여 훈춘사건을 조작하고, 간도에 군대를 투입했지만, 청산리전투에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독립군에 대패하고 만다. 이후 일본군은 양민학살의 형태로 보복작전을 벌이면서, 간도의 동포들뿐만 아니라, 노령 연해주에 살고 있던 동포들도 많은 피해를 당했다.
당시 소련은 혁명이후 내전 중으로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한 적군과 반혁명파의 백군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일본군은 백군 지원 명분으로 시베리아로 출병했고, 1920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등 한인 거주지역을 습격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독립군은 적군에 가담한 후 적군이 후퇴함에 따라 연해주로 이동했고, 연해주 한인무장세력은 볼셰비키 세력의 강화에 따라 일본의 추격을 피해 자유시로 집결했다.
1920년 봉오동전투 · 청산리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본은 5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한국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상황이 위태롭게 돌아가자 서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이청천의 대한독립단,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여러 조직으로 분산되어 있던 독립군은 일단 중국 독립군의 근거지였던 헤이룽장성 밀산(密山)에 집결했다.
이들은 독립군 10개 부대를 통합 · 재편성하여 1920년 12월 병력 3천5백 명의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했는데, 3개 대대로 편성되어 사실상의 북간도 독립군 통일군단이 되었지만, 무장이 빈약했기 때문에 제3국으로부터의 군사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은 약소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대한독립군단 지도자들은 이에 고무되어 1921년 정월 소만 국경선을 넘어 시베리아 땅을 밟았다.
김좌진은 이 때 소련으로 가는 것을 반대했다. 반대 이유는 공산주의자를 믿을 수 없다는 것으로, 어렵더라도 우리 동포가 많이 사는 간도 땅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독립군단은 다시 동쪽 이동하여 우수리강을 건넜고, 안전지대인 연해주의 이만(Iman, 달네레첸스크)에 집결했다.
시베리아에 들어선 독립군단은 부대를 나누어 1여단을 이만에 두고, 2여단을 영안에 주둔시켰다. 이 때 소련 전역에서는 왕당파라 할 백군과 공산당을 지지하는 적군간의 전투가 계속되었고, 적군은 우리 독립군을 흡수하여 백군과의 전투에 투입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독립군 역시 그러한 의도를 알고 있었지만, 당시 워낙 추위와 굶주림, 빈약한 무장과 보급으로 인해 공산당의 군사지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독립군은 적군으로부터 대포 15문, 기관총 500정, 소총 3,000정 등의 장비를 지원받게 되었다.
19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에 걸쳐 시베리아와 간도로부터 한인무력이 자유시로 집결해, 간도지역의 한인무력으로 최진동 · 허욱 등의 총군부군대, 안무 · 정일무 등의 국민회군, 홍범도 · 이청천 등의 독립군과 김좌진 · 서일 등의 군정서군대가 있었으며, 노령지역의 의병대로는 이만군대 · 다반군대 · 이항군대 · 자유대대 · 독립단군대 등이 있었다.
총병력수는 1,900여 명이었다. 그런데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무장부대 중 자유대대와 이항군 사이에 한인무력군통수권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났다. 이때 자유대대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고, 이항군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상해임시정부를 지지했으므로 결국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간의 정면대결이 발생한 것이다. 즉 이항군을 이끌었던 박 일리아는 군통수권장악을 위해 극동공화국 원동부(遠東部) 내의 한인부를 찾아가 이항군대는 자유대대 편입 거부를 통고했다.
이때 극동공화국 한인부에는 상해파의 이동휘계 인물인 박애 · 장도정 등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대한국민의회 및 자유대대측과의 협의도 없이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박창은(朴昌殷)을 총사령관, 그레고리예프를 참모부장으로 지정하여 자유시로 보내는 동시에 이항군대를 사할린 의용대로 개칭하고 그 관할하에 자유시에 집결한 모든 한인무력을 두도록 했다.
1921년 2월 중순 자유시에 도착한 박창은 일행은 총사령관으로서의 지휘권을 행사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총사령관직을 사임했다. 이를 접수한 한인부는 다시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그레고리예프를 연대장, 박 일리아를 군정위원장으로 지정했다. 두 사람은 즉시 군대관리에 착수하고 자유대대에 편입되었던 종래의 이항군대 · 다반군대를 마사노프로 이주시키고 간도군대에 대해서도 강제 이주시켰다.
그러나 자유대대는 끝까지 불응하다가 장교들이 체포당하고 기관포와 대대문서를 압수당하는 등의 횡포에 못이겨 크라스노야르스크로 이주했고, 이주 즉시 이항군대와 다반군대에 의해 무장해제당하고 지방수비대로 강제 인도되었다.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무력에 대한 군권이 일단 상해파를 지지하는 이항군대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자유대대의 오하묵 · 최고려 등은 이르쿠츠크에 있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가서 한인무력군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했다. 이를 받아들인 동양비서부는 임시고려군정회의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갈란다라시윌린, 부사령관은 오하묵, 군정위원은 김하석 · 채성룡으로 임명했다.
이무렵 이용 · 박 일리아 등은 사할린 의용대가 주둔하는 마사노프에 와서 전한군사위원회(全韓軍事委員會, 이칭: 한인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위원회의 합법성을 주장하면서 한인무력군 통수권을 위해 극동공화국정부와 교섭했으나 실패하게 되면서 실력으로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극동공화국 군무총장에게 체포되어 이르쿠츠크로 압송당했다.
한편 1921년 5월 23일 고려군정회의의 갈란다라시윌린 일행이 치타를 출발하여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해보니 옛 이항군대 · 총군부군대 · 독립단군대 · 다반군대 · 국민군대 · 이만군대 등 1,400여 명이 사할린 의용대라는 이름으로 1개 연대를 편성하고 있었지만, 고려군정의회의 통제권 바깥에 있었다.
같은 해 6월 7일 갈란다라시윌린은 자유시의 전 부대를 소집하여 자기가 고려군정의회의 총사령관임을 선포하고 고려군정의회의 사명을 역설하며, 6월 8일 박 일리아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박일리아는 이를 거부했지만, 홍범도 · 안무의 군대는 자유시로 돌아갔고, 이후 사할린 의용대는 점점 고립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일리아는 고려군정의회에 대한 반항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1921년 6월 27일 오후 11시 사할린 의용대의 연대장 그레고리예프도 갈란다라시윌린에 투항하자, 갈란다라시윌린은 사할린 의용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6월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할린 의용대에 접근했고, 이후 제29연대 대장은 사할린 의용대 본부에 들어가 복종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사할린 의용대가 불응하자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자유시사변은 사할린 의용군이 러시아 적군의 포위와 집중총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 상해파 고려공산당 간의 대립투쟁이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전투 끝에 무장해제를 당한 사할린 의용대는 전사자 · 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교전 당시의 병력은 1,000여 명가량이었다.
1921년 6월 2일 소련적군은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는데, 이는 우리 독립군이 소련 공산당을 위하여 싸워달라는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소련 공산당을 위해 싸우라는 요구에 독립군은 항의하였으나 그들은 이미 독립군을 2증 3증으로 포위하여 무조건 수락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 때 소련군 배후에서 고려공산당(이르크츠크파)이 일을 꾸미고 있었으며, 김좌진은 이 때 이미 소련공산당의 이상한 눈치를 간파하고 극비리에 부하를 거느리고 흑룡강을 건너 중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한편 독립군과 소련정부(당시 치타정부)간의 협상은 결렬되면서 소련군의 공격이 6월 28일에 시작되었고, 이때 독립군은 사망자 2백72명, 강을 건너 중국 땅으로 탈출하다 물에 빠져 죽은 익사자 31명. 행방불명 2백 5명, 포로 97명 도합 6백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고 나머지 인원이 가까스로 소련을 탈출하였다.
자유시사변 뒤 1921년 7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고려혁명군을 이르쿠츠크로 이동시키고 8월말 1개 여단으로 재편하여 러시아 적군 제5군에 예속시켰다. 고려혁명군은 이르추크에서 사관을 양성할 사관학교(교장 지청천)를 개교하고 군사 훈련에 매진하였다.
자유시사변은 사할린의용군이 러시아 적군의 포위와 집중공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한국독립군의 해체를 요구하는 일본군과 러시아 볼셰비키 공산당 간의 협상의 결과가 있다. 차르 정권이 몰락한 혼란을 틈타 시베리아 연해주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을 협상으로 철수시킬 필요가 있었던 볼셰비키 공산당은 일본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고 대한독립군을 볼셰비키로 흡수하여 일본과 마찰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독립군 내부적으로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 상하이 고려공산당 간의 정치적 대립투쟁까지 겹쳐진 결과로 일어난 복합적인 배경으로 발생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운동노선을 둘러싼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대립에서 야기된 이 사건이후 두 공산주의 조직의 분열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악화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청산리대첩 이후 고난의 행군으로 새로운 독립운동 근거지를 찾아 연해주로 들어갔던 만주지역 독립군단은 독립운동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만 하였다.
그러나 만주지역 독립군단들은 경신참변과 자유시사변 등 두 차례에 걸친 참담한 수난에도 불구하고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항일무장투쟁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독립군단들은 남북만주를 연결하는 통신연락의 재개와 독립군단들의 전열정비 등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이는 1920년대 중반 이후 만주지역에서 새로운 독립운동이 전개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