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2월 하와이에 간 이승만은 하와이 감리교단의 와드맨(John W. Wadman) 주1의 요청으로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한인기숙학교(‘ 한인중앙학원’으로 개칭)의 교장직을 수행하며 한인감리교회의 일에 관여하였다. 이승만은 한인 학생들을 위해 한국어와 한국사 교육을 실시하고 여학생 수용을 위한 여학생 기숙사를 마련하는 등 학교 운영에 변화를 주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1914년 초 와드맨의 후임으로 온 프라이(William H. Fry) 감리사가 제동을 걸고 이승만에게 교육에만 전념해 줄 것을 요청하자, 이에 반발한 이승만은 한인중앙학원 원장직을 사임하였다. 이승만은 하와이 한인들에게 독립된 한인학교와 한인교회의 설립을 강력히 주장하고, 이를 위한 재정 지원을 호소하였다. 그 결과, 한인들의 성금과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재정 지원에 힘입어 1916년 여학생 중심의 한인여학원이 설립되었다. 1918년 9월, 그는 한인여학원을 한인기독학원으로 개명하고 남녀 공학의 민족교육기관으로 전환하였다.
독자적인 학교 설립 이후 1917년 초부터 이승만의 견해를 지지하는 감리교 교인 30여 명이 릴리하가(Liliha St)에 위치한 여학생 기숙사에 모여 별도의 예배를 갖기 시작하였다. 이들 교인들은 한인여학원처럼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자적인 교회 설립을 추진할 것을 결의하고, 1918년 7월 29일 호놀룰루에 신립교회(新立敎會)를 설립하였다. 이후 1918년 12월 23일 교회 평신도회에서 교회 명칭을 한인기독교회(The Korean Christian Church)로 바꾸기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하와이 한인사회에 이승만이 이끄는 새로운 민족교회가 정식으로 탄생하였다.
하와이한인기독교회는 미국의 어느 교단, 교파에도 속하지 않은 무교파의 자치 교회로 미국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의 모범을 따랐으므로 ‘자유 교회’ 또는 ‘독립 교회’로 불렸다. 교회는 평신도 위주의 민주주의적 원칙에 입각하여 운영되었고, 장로와 집사가 없이 창립자이자 선교 부장을 자처한 이승만의 지도하에 이사원에서 모든 치리를 담당하였다. 하와이한인기독교회는 호놀룰루의 교회 외에 오하우섬 와히아, 하와이섬 힐로, 마우이섬 파이아 등 3곳에 더 설립되었고, 1936년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도 설립되었다. 1938년 당시 5개의 한인기독교회에 적을 둔 세례 교인 수는 1,263명에 달했다.
하와이한인기독교회는 1921년 스쿨가(School St)에 첫 교회당을 마련하였다가 1928년 예배당 확장을 목적으로 매각한 후 약 10년 간 신흥국어학교 교실에서 예배를 가졌다. 이후 1938년 4월 24일 릴리하 스트리트에 서울 경복궁의 광화문을 본 딴 예배당을 갖추었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창립된 교회여서 그를 추종하는 교인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3·1운동 이후에는 이승만의 정치 활동을 후원하였다. 교회 지도자들로 활동한 인물들은 민찬호, 이종관, 박동완, 강태희, 이명우, 이용직, 김형식, 김창순, 유경상, 김태묵, 김치현 등이다.
하와이한인기독교회는 1980년 미국 연합그리스도의 교회(United Church of Christ, UCC)에 가입하였다가 1999년 탈퇴하여 현재까지 독립된 교단으로 남아 있다. 2023년 현재 다민족, 다세대, 다문화를 표방하며 교인 구성은 이민자 1세대를 비롯하여 2세대와 3세대의 미국 시민, 최근 이민 온 한국인 가족, 국제결혼 가족, 하와이계와 미국계 가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2023년, 하와이한인기독교회는 미국, 중국, 북한, 러시아, 인도, 네팔, 캄보디아 등지의 선교사 사역을 협력하고 있으며, 노숙자 사역과 한인 양로원 운영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하와이한인기독교회는 이승만의 영향을 받아 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교회이다. 어느 교단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치 교회로서 자주적이고 독립적으로 운영되었고 이승만의 외교 활동을 도우며 한국독립운동에 기여한 교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