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화(崔昌華)는 1930년,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출생하였다. 선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평안 중학교 재학 중에 북한 공산당의 종교 억압에 반대하는 기독교청년 집회에 참여하였다. 1946년 11월 3일에는 일요일선거 반대운동으로 선천 경찰서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신의주 교도소 특별 감방에 복역하다가 1947년 5월 8일에 석방되었다. 이후 월남하여 신흥대학교(信興大學校) 전문부에 입학하여 정치 경제를 전공하다가 1950년 8월, 제주도로 이주하여 경찰, 교원으로 활동하였다.
1954년 6월,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 고베 신학교에 입학하여 1958년 졸업 후, 한국 초등학교 교사와 교회 목회활동을 병행하였다. 하치만 대학교와 후쿠오카 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 재일 한인 인권(人權)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968년 2월, 김희로 사건의 당사자인 김희로를 설득하는 역할을 맡아 교류하였다. 1973년 10월에는 재일 주1 주2를 위한 봉안당인 영생원을 건립하였으며 구치소, 교도소의 한인들을 위한 상담 활동과 재일 교포 인권 실태를 조사하고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일본과 미국에서 전개하였다. 1991년, 일본 대한기독교 총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95년 2월 8일, 폐암으로 사망하였다.
재일 대한기독교 오쿠라 교회의 목사로서 70만여 명에 이르는 재일 교포들의 인권 개선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인권 운동은 네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참정권(參政權) 획득 운동이다. 종래 재일 교포들은 주3 외국인으로서 주4을 가지고 일본인과 같은 세금을 내면서도 거주권 · 선거권(選擧權) · 아동수당 · 공영주택 입거권 · 주택금융공사의 주5 · 국민연금(國民年金) · 취직 등에 있어 철저하게 거부당하거나 제한을 받아 왔다. 최창화는 이 같은 차별에 맞서 법적 투쟁에 나섰다. 그 결과 1995년, 일본 최고 주11는 정주 외국인에 대한 지방 참정권 부여가 헌법상 금지된 것이 아니라고 주6 아직 전면적인 참정권 허용까지 이르지는 못한 실정이다.
둘째, 민족 언어 찾기 운동이다. 1975년, 일본방송협회(NHK) 방송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하여 일본인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이름 재판’을 통해, 그는 재일 교포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표기하고 민족 고유음으로 발음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1984년, 일본 주7은 일본방송협회로 하여금 이름과 지명의 민족어 발음 사용 개정을 지시하였다. 1988년에는 일본 최고 주8이 이름 부르기에 대한 주9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셋째, 지문날인 거부운동이다. 1955년에 시작된 외국인 등록법에 의해 14세 이상의 재일 교포들은 외국인 등록 증명 시에 지문날인을 하도록 법적인 강요를 받아 왔다. 최창화는 1984년에 지문 찍기 거부 소송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현재는 이전보다 많은 부분이 더 합리적으로 개선되었으며, 1992년에는 외국인 등록법의 개정으로 영주자의 지문 날인 제도가 폐지되었다.
넷째, 국제 기구를 통한 인권 활동이다. 그는 1979년, 재일 교포 인권 획득 투쟁 전국 연합회 대표의 자격으로 유엔인권위원회에 ‘재일 교포에 대한 인권 침해 상황’을 제출하는 등 국제 주12에 재일 교포들이 받는 차별 현실을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1990년에도 유엔 주13의 요청으로 재일 한인 인권 상황을 제출하였다.
이상과 같은 인권 운동을 통해 재일 교포를 국제법상의 주10으로 규정하면서, 소수민족의 생존권이 보장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또한 1970년 8월부터 재일 조선인 무연고 유골 수집과 봉납당 건설 운동을 시작하여 1973년 10월, 봉납당 영생원을 건립하였다. 1974년 9월 1일부터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는 ‘9.1’ 집회를 시작하였다. 이 집회는 현재까지 일본 각지에서 전개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김희로(金嬉老) 사건과 소수민족』 · 『국적과 인권』 · 『이름과 인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