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 3·1운동 ( )

근대사
사건
1919년 3월 25일부터 4월 13일까지 전라북도 진안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
정의
1919년 3월 25일부터 4월 13일까지 전라북도 진안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
역사적 배경

진안군 마령면 출신의 오기열(吳基烈)·전영상(全永祥)이 1919년 3월 6일 이성녀(李姓女)의 집에서 3·1운동 관련 문서 3매를 작성하여 진안면·마령면 평지리 등에 부착하는 등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경과

진안의 3·1운동은 3월 25일 진안읍 장날에 시작되었다. 수백 명이 참가한 만세 시위는 왜경과 헌병대의 출동으로 해산되었다. 4월 3일 주천면(朱川面) 주양리(朱陽里)에서 김주한(金周漢) 등이 사립화동(華東)학교의 학생 양해관(梁海寬) 등을 권유하여 화동학교 교정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그 날 밤에는 주민·학생 약 60명이 동리 앞 논에서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불렀다. 4월 6일에는 마령면(馬靈面) 평지리 뒷산에서 김구영(金龜泳)·오기열(吳基烈)·전영상(全永祥)·황해수(黃海水) 등의 주동으로 인근 주민 수백 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4월 12일에는 성수면(聖壽面) 도통리(道通里)에서 전경원의 주동으로 수십 명이 만세 시위를 하였다. 4월 13일 마령 장날에는, 오기열·전보익(全補益) 등의 주도로 마령 시장(마령면 평지리)[현 마령면 평지리 1264 일대]에서 만세를 불렀다.

결과

주천면 주양리 만세 운동을 주도한 김주한은 징역 1년, 마령면 평지리의 만세 운동을 주도한 오기열과 전영상은 각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아 수형 생활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진안의 3·1운동은 3월 25일부터 4월 13일까지 근 20일에 걸쳐 일어났으며, 학생과 시민이 주도한 운동이었다. 특히 마령면의 시위는 진안군 최대의 3·1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참고문헌

「오기열 등 2인 판결문」(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1919년 4월 21일)
「김주한 판결문」(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1919년 4월 23일)
『전라북도 독립운동사적지』(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0)
『국내 3·1운동 II-남부』(김진호·박이준·박철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전북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전주역사박물관·진안문화원, 전주역사박물관, 2003)
『전북지역독립운동사』(전북지역독립운동추모탑건립추진위원회, 신아출판사, 1994)
『독립운동사』3-삼일운동사(하)(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3·1운동 비사』(이병헌, 시사시보사출판국, 1959)
집필자
윤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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