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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석주(羅錫疇)

근대사인물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 투탄의거와 관련된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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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 투탄의거와 관련된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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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본관은 나주(羅州). 일명 마중달(馬仲達). 황해도 재령 출신. 아버지는 나병헌(羅秉憲)이며,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16세에 재령군 북율면 진초리의 보명학교(普明學校)에 입학하여 2년간 수학하고, 그 뒤 농사를 지었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의 주권을 강탈하자 이에 비분강개하여 주권 회복에 신명을 바칠 것을 맹세하였다. 그리하여 23세에 만주로 건너가 북간도 나자구(羅子溝)의 독립군 양성학교인 무관학교(武官學校)에 입학하여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19년 국내에 들어와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그 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사리원으로 옮겨 표면적으로는 정미업을 경영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1920년 김덕영(金德永)·최호준(崔皓俊) 등 50명의 동지들과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무기를 구입한 뒤 군자금 모금 활동, 친일파 숙청 등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사리원 최병항(崔秉恒)과 안악 원형로(元炯潞) 등의 부호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건네 받아 중국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하였다. 그리고 대한독립단의 단원들과 합세하여 악질 친일파인 은율 군수를 처단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들의 활동이 봉산·사리원·황주·재령·안악 등 황해도 일원에 확대되자, 일본 경찰은 감시를 강화하였다. 이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김구(金九)가 지휘하는 경무국 경호원으로 임명되어 임시정부와 정부 요인의 경호를 담당하였다.
1923년 정식 군사 교육을 받기 위해 중국 허난성(河南省) 한단(邯鄲)의 중국 육군군관단강습소(陸軍軍官團講習所)에 입교하여 사관 훈련을 수료하였다. 이듬해 중국군 장교로 임관되어 중국군으로 복무하다가 1925년 상해로 돌아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1926년 톈진[天津]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던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였다. 그런데 그 해 6월 톈진에 체류하고 있던 민족 지도자 김창숙(金昌淑)으로부터 경제 침탈의 총본산인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조선은행·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을 폭파, 파괴하여 일제의 경제침탈을 응징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김창숙·유우근(柳佑瑾)·한봉근(韓鳳根)·이승춘(李承春) 등과 협의, 구체적인 거사계획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1926년 12월 중국인 노동자 마중덕(馬中德)으로 변장한 뒤 인천으로 잠입하였다.
조선식산은행을 폭파하기 위해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로 실패하였다. 곧이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공격하였다. 그곳에서 권총을 사용하여 여러 명의 일본인을 사살하였으나 역시 투척한 폭탄이 불발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자 소지하였던 권총으로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일경이 즉시 병원으로 긴급 이송하여 이름을 묻자, 자기의 성명과 의열단원임을 밝히고 순국하였다. 후에 장남 나응섭(羅應燮)이 백운학(白雲鶴)으로 개명하여 중국으로 탈출, 임시정부에 보고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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