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주리의 난은 557년(양원왕 13)에 고구려의 귀족 간주리가 환도성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이 반란은 평양 정권에 대해 국내성 세력이 반발하여 일어났다. 이 시기는 광개토대왕 이래의 안정된 정치체제가 무너지고 귀족세력 간의 정쟁이 격화된 시기였다. 427년(장수왕 15) 평양 천도와 양원왕의 즉위 과정도 왕실과 귀족 세력이 충돌한 결과였다. 간주리의 난은 환도성을 기반으로 557년 10월 일어났으나 간주리가 죽고 평정되었다. 간주리는 양원왕 즉위를 반대한 세력이거나, 그에 동조하는 세력으로 보기도 한다.
간주리는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으며, 평양천도 이후에도 고구려 3경(三京)의 하나로 정치 · 군사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환도성을 기반으로 557년 10월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이 반란은 평양정권에 대한 국내성 토착세력들의 반발에 의해 일어났다. 즉 양원왕대는 광개토대왕 이래 전제적 왕권을 중심으로 한 안정된 정치체제가 무너지고, 귀족세력 간의 정쟁이 가장 격화된 불안정한 시대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기(欽明紀) 6 · 7년조의 기록에 의하면 안원왕(安原王) 말년에 추군(麤群)과 세군(細群)으로 나타나는 외척 귀족세력 간의 왕위계승 분쟁 과정에서 2천여 인의 세군측 세력이 죽었으며, 그 결과 추군 세력이 승리하여 양원왕(陽原王)이 즉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왕 자신의 즉위도 외척세력의 무력적 후원에 의해 다른 왕자의 외척세력들을 억압함으로써 가능했다. 이 같은 귀족세력 간의 충돌의 여진이 왕이 재위하고 있을 때에도 지방 세력에까지 연결되어 지속되었으며, 상당히 심각한 정치적 갈등을 내포하고 있었다.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한 시기는 427년(장수왕 15)인데, 천도의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왕실이 국내성을 중심으로 성장한 전통적 귀족세력의 영향력을 배제키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평양천도를 전후해 왕의 전제권에 장애가 되었던 귀족들이 상당수 제거되었다.
그 뒤에도 국내성 일대를 기반으로 한 귀족세력에 대한 억압과 견제는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같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국내성이 갖는 정치 · 군사 · 경제 등 제 분야에서의 비중은 여전히 컸고, 이곳의 토착 귀족세력들의 잠재적 역량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양원왕 12년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동북 지역에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한 뒤 군주(軍主)를 파견하는 등 국내 지역의 배후 기지인 동옥저(東沃沮) 지역에 신라의 군사 행동이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이를 묵인하거나 혹은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중앙 정권에 대해 국내성 지역의 귀족세력들은 불만을 품었을 것으로 보인다.
간주리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중앙 귀족세력의 어느 일파와 연결되어 반란을 일으켰거나, 아니면 평양의 왕권에 대한 불만으로 국내성 일대의 세력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고 간주리가 죽임을 당함으로써 평정되었다.
간주리로 대표되는 국내성의 귀족세력은 적어도 당시 양원왕을 즉위 시킨 추군세력은 아니었을 것이며, 양원왕 즉위에 반대 입장이었던 세군세력이거나 혹은 세군세력을 지지하고 그들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한 세력으로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