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시일(開市日)은 매 4일과 9일이다. 조선시대에는 평양 · 대구의 시장과 함께 조선 3대 시장으로 불릴 만큼 상세(商勢)가 큰 장이었다. 강경은 금강하류에 발달한 하항도시(河港都市)로서 내륙교통이 불편하였던 때에는 물자가 유통되는 요충이었다.
가까이는 상류의 공주 · 부여 · 연기 · 청양 지방과, 멀리는 청주 · 전주 지방까지 포함하는 넓은 배후지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토지가 비옥한 평야의 중심지였으므로 편리한 수운(水運)에 힘입어 큰 교역의 장소로 발달할 수 있었다.
옛날에는 강경포(江景浦)라 불려 크고 작은 어선과 상선의 내왕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읍내 옥녀봉(玉女峰)에는 용영대(龍影臺)라는 유적이 남아 있는데, 이곳을 드나들던 배의 안전운항과 상업의 융성을 기원하였던 곳이라고 전한다. 강경에서는 17세기 초엽부터 취락이 형성되었고 그 지리적 입지가 유리하여 급속히 발달하였다.
18세기에 들어서는 이미 완전한 시가가 형성되고 시장이 열려 충청남도와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의 물자들이 집산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강경은 조선 말기까지 금강연안 일대의 문호였고 원산 · 마산과 함께 대표적인 어물(魚物)의 집산지였다. 고군산 어장을 비롯한 서해어장의 수산물이 이곳에 모였고 중국산 소금을 수입하여 조기 등 어류를 염장, 가공하는 중심지로 매우 번창하였다.
군산항 개항 초기인 1890년대에는 강경과 군산의 지리적 관계가 마치 서울과 인천, 평양과 남포의 그것에 비길 만큼 흡사하게 밀접하였다. 군산항 수입화물의 80%가 강경시장을 통하여 판매 · 출하되었으며 당시의 상권은 청주 · 공주 · 전주까지를 포함하는 충청도와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및 경기도 남부에 이르도록 광대하였다.
그러나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청주와 공주지방이 강경상권에서 벗어났고, 내륙교통이 발달하면서 금강수운이 쇠퇴, 군산 국제항이 기능을 상실하게 되자 상권은 더욱 줄어들었다.
1912년 군산선이 개통되면서 어류집산지로서의 기능도 잃었으며, 이어 1914년 호남선이 개통되자 강경시장의 상권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군청이 논산으로 옮겨간데다 연무대에 훈련소가 설립되고, 특히 대전과 이리의 상권이 날로 커지면서 강경시장은 옛 세력을 거의 잃고 말았다.
보통시장이라 불린 5일장은 북옥동 · 홍교동의 상시장(上市場)과 중앙동의 하시장(下市場)을 합친 것을 일컫는다. 수산물이 대종을 이룬 어채시장(魚菜市場)이 매일 열려 대성황을 이룬 데 비해 우시장(牛市場)이 제대로 서지 못한 것은 강경의 위치적 특성에 바탕을 둔 시장의 기능을 단적으로 설명한다.
1923년의 매상액을 보면 보통시장 57만 원, 어채시장 48만 원으로 그때까지만 해도 하운(河運)에 의한 수산물 집하장으로서의 기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도 재래시장의 기능과 면모를 잘 유지해온 것으로 유명하였던 강경시장은 6·25전쟁 때 거의 완전히 파괴된 데다 광복 후 근대적 유통기구가 확장되어 나감에 따라 이제는 상권이 극히 제한된 지방 소시장(小市場)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도 간간이 눈에 띄는 일본식 창고건물을 제외하면 시장의 상가건물도 콘크리트 슬라브로 바뀌어 옛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황산초등학교 사거리를 중심으로 열리는 강경장의 상인과 이용 고객 대부분은 강경과 그 인근 면에 국한되어 있으며, 거래상품은 의복을 비롯한 공산품과 돗자리 · 화초 · 채소 · 가축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