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로 서울특별시 구로역에서 인천광역시 인천역 간의 총 연장 27.0㎞의 복복선철도이다. 경인공업지대를 관통하면서 화물과 여객을 수송하고 있으며 수도권 운송 체계의 중요한 축에 해당한다.
1896년(고종 33) 미국인 모스(Morse, J. R.)에게 그 부설권이 특허되어 이듬해 3월 22일 기공되었고,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인천 간 최초의 영업을 개시한 이후 1900년 7월 8일 경인철도합자회사(京仁鐵道合資會社)가 완공시켜 개통되었다. 처음에는 회사이름을 따서 ‘경인철도’라고 불리다가 일본으로의 국유화가 진행된 1906년 이후부터 ‘경인선’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경인선의 개통은 근대적 교통 기관의 도입과 함께 구미 열강과 일본의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침투하게 되는 구체적 발판이 마련되었다는 역사적 흔적을 남기는 일이 되었다.
이 철도의 부설권이 미국 상인 모스에게 특허된 것은 경인선을 부설할 때 일본의 철도체계인 협궤식(狹軌式)을 채택하지 않고 영국이나 미국의 표준형을 택한 것과 함께 주미대리공사(駐美代理公使) 이하영(李夏榮) 등을 통한 미국의 영향이 일본의 주장을 압도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을미사변과 아관파천(俄館播遷) 등으로 일본의 우리나라에 대한 영향력이 실추된 역사적 사실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였다.
철도 부설 공사는 결국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갔는데, 그 이유는 모스가 본국으로부터의 자금 조달에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간파한 경인철도인수조합은 조선 정부를 무시한 채 불법적으로 모스와 경인철도양도계약(京仁鐵道讓渡契約)을 체결하고 1898년 12월 17일 모스에게 사정 가격 170만 2천원(엔)을 지불함으로써 경인철도의 부설권은 일본에 넘어가고 말았다.
모스로부터 일체의 권한을 인수한 일본은 1899년 4월 23일 두 번째 기공식을 인천에서 가졌다. 공사는 급속히 진행되어 그 해 전반부에 이미 인천∼한강 간의 토목공사가 끝났고, 6월 10일부터 궤도를 부설하기 시작하여 19일 철도 건설 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그 해 9월 18일 마침내 노량진~인천 간 약 33.8㎞ 구간에서 임시 영업을 개시함으로써 우리나라 철도의 효시가 되었다.
이어 한강 북안에서 경성역(이후 1905년 서대문역으로 명칭 변경)까지 약 3㎞의 공사는 1900년 5월 26일에 착수되어 7월 5일 한강철교의 준공과 함께 완성되었고, 7월 8일 경성역∼인천역 간의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이리하여 1900년 11월 12일 경성역 인근에서 경인선 전 구간의 개통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가설된 한강철교는 경인선 부설 공사 중 최대 난공사였는데, 홍수와 혹한으로 몇 차례 공사를 중단해 가면서 연 270일에 걸쳐 완공하였다. 한강철교는 그 상부가 미국제 약 70m짜리 단선 플레이트형 교항(橋桁) 10개로 이루어졌으며, 너비 약 5.1m, 높이 약 11.3m, 길이 약 628.8m이었다.
그리고 하부는 2개의 교대(橋臺)와 9개의 교각(橋脚)으로 되어 있는데, 교대는 화강암, 교각의 수면 부분은 화강암, 기타 부분은 벽돌로 쌓았다. 이 한강철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교이며 당시로서는 가장 긴 다리이기도 하였다.
경인선의 선로는 전 구간을 통하여 대체로 지세가 평탄한 곳이기 때문에 터널이 하나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경인선을 처음으로 주행한 기관차는 미국 브룩스사(Brucks社)에서 만든 모가형[Mogul型] 탱크기관차였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선로 개량 공사가 행하여졌으며, 그 결과 경인선 선로 연장은 구선로(舊線路)에 비하여 1.6㎞가 짧아졌다.
이때 용지 · 토공 · 교량 · 구교(溝橋) 등 복선화 준비가 동시에 행하여졌으나, 복선화 공사는 다른 군용 철도의 건설에 밀려 뒤로 미루어졌다. 그리하여 경인선의 복선화는 1960년대에 이루어졌다.
1965년 1월 12일 동인천∼주안 간이, 같은 해 9월 18일 주안∼영등포 간이 복선 개통되었으며, 영등포∼용산 간 및 용산∼서울 간의 복선 공사는 1969년 6월과 9월에 각각 완성되었다. 1974년 8월 15일 수도권 전철화 계획으로 구로∼인천 간 27.0㎞가 서울∼수원 간 41.5㎞, 용산∼성북 간 18.2㎞와 함께 전철화되었다.
1960년대 이후 급속히 진전된 공업화와 도시화에 따라 수도권의 기능지역이 평면적으로 확대되어 가면서부터 경인선은 서울∼인천을 잇는 경기도 서부 지역의 발전축으로서 구실을 하게 되었다. 이어 소사읍이 부천시로 승격되었고, 구로공업단지가 성장하여, 서울시로 편입되었으며, 인천은 광역시로 발돋움하는 등, 이 지역의 성장은 실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경인선은 기존의 복선만으로 많은 교통량을 모두 처리할 수 없게 되자, 선로용량을 확대시켜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1990년에 복복선화 사업이 착수되었다. 구로 · 부평 구간은 1999년 1월에, 부평 · 주안 구간은 2002년 3월에, 주안 · 동인천 구간은 2005년 12월에 각각 복복선으로 개통되었다. 복복선 개통으로 가운데 내선에는 급행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철도시설공단의 계획에는 경인 급행선의 수인선 송도역까지의 연장이 포함되어 있다. 현재 인천역의 급행선 플랫폼은 지하에 건설 중이다.
오늘날 경인선은 경인국도 및 경인고속도로와 함께 확대된 수도권으로의 서울∼인천을 잇는 운송체계에 있어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경인전철(京仁電鐵)은 모두 20개의 역이 있고, 구로역에서 서울∼신창 간의 전철과 분기한다. 2009년 현재 경인선의 1일 운행 횟수는 여객 열차는 일반전철이 왕복 356회, 용산역을 기종점으로 하는 급행열차는 왕복 237회 운행하고 있다.
여객 수송은 2009년에 1억 9971만 1045명이었으며, 이는 일일 평균 54만 7154명에 해당한다. 화물 수송량은 그리 대단하지 못한 편이어서 전국 철도 화물의 1.7%정도이다. 화물수송량은 2008년에 77만 6300톤이었으며, 그 가운데 대부분인 74만 773톤은 무연탄이다. 전동차는 매 6분(출퇴근 시간에는 매 3분)마다 배차되어 있으며, 소요 시간은 40분으로 인천까지 서울의 통근권을 확대시켜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