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신석기시대부터 농업과 작물 재배가 나타난 유적지가 여러 곳이 존재하지만, 실질적으로 농지 개간은 국가체제를 형성하는 삼국시대부터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적극 장려되기 시작하였다. 삼국시대의 개간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는 서기 33년(다루왕 6)에 “남쪽의 주군(州郡)에 영을 내려 처음으로 논[稻田]을 만들게 하였다”라는 기록[『삼국사기(三國史記)』 권23, 백제본기1, 다루왕 6년], 242년(고이왕 9)에 “남쪽의 진펄[南澤]에 논[稻田]을 개간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2, 고이왕 9년]이 있어 중앙정부가 직접 관여하여 평지의 논을 개간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신라에서도 4~5세기에 철제 농기구의 발달을 기반으로 지방 세력이 성장하면서 농경지가 확대되었고, 6세기에 중앙정부의 관리와 통제 아래 전국적으로 수리 시설이 확충되면서 주1에 대한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561년(진흥왕 22)에 세운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에는 ‘해주백전답(海州白田畓)’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개간된 농지가 수리 시설의 영역에 속하면 답(沓)으로 이용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전(田)으로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개간의 자세한 기록과 그의 근대적 의미의 시작은 고려시대에서부터 나타난다. 고려 조정에서는 신라 말기 전란으로 발생한 유민을 안정시키고, 부실해진 국가경제의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973년(광종 24)에는 진전(陳田)의 개간을 장려하는 진전수조법(陳田收租法)을 만들어 개간자에게 조세를 감면해 주었다. 광종 때의 개간 장려 정책을 보면 사전(私田)을 개간할 때는 첫해의 수확물 전부를 개간하여 경작한 자에게 주고, 다음 해는 전주(田主)와 반분하지만 공전(公田)은 3년간 수확물 전부를 개간한 경작한 자에게 주고 4년째부터 법에 의하여 수조(收租)한다는 것이므로 개간자는 사전보다는 공전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러한 토지개간 정책은 고려 건국 초기에 백성을 보호하는 정책의 하나로 가난한 백성을 진전으로 이동시킴으로써 농업 발전을 모색하게 하였다.
고려 전기의 경지 개간의 추세는 산록지 하단부를 기점으로 상향하는 산전의 개간이 많았는데, 진전 역시 이와 같은 추세를 따라 발생하였다. 그러나 12세기 무신정변과 몽골의 침입 이후 고려시대의 개간 사업에서 특징은 해안지대에 제방을 쌓아 농지를 확장하는 간척사업도 행하여졌다는 것이다. 그 한 예로 고종 때에 몽골병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강화도로 천도하게 되었는데, 피난민의 생활과 군사들의 식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해안지대에 제방을 쌓아 농지를 조성하였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12세기 이후 수리 기술의 발전은 하천 지대나 연해 지역에서 방천 공사나 간척공사를 통해 활발히 수리 시설이 건설되면서 저습지와 연해 지역이 토지개간의 기반이 되었다.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새로운 농법인 시비법(施肥法)이 도입되면서 연해 지역에 확보된 경지들이 생산력이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면서, 연해 지역의 저평지는 양호한 농경지 특히 답(畓)으로 주목되어 개간의 대상이 되었다. 1414년(태종 14)에는 경기도의 통진(通津)과 고양포(高陽浦)에 방조제를 축조하여 200여 섬의 곡식을 파종할 수 있는 농경지를 개척하였으며, 세종 때에는 해안에 둑을 쌓아 농경지를 만들었다. 1486년(성종 17)에는 황해도 재령군의 전탄(箭灘) 일대에 큰 도랑을 만드는 사업을 실시하였다.
조선시대의 개간 사업은 전국적으로 행해졌으나 그중에서도 미개간지가 많은 황해도, 평안도에서 주로 행해졌다. 세종 시대 이후의 토지개간과 양전 사업으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바로 전에는 170만 8000 결(結)로 조선 역사상 가장 많은 주2 면적을 나타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토지대장은 소실되었고 전쟁으로 토지는 황폐화되어 1611년(광해군 3)에는 전결 면적이 54만 1000결 정도로 감소하였다. 임진왜란을 전후로 봉건 지배층의 사유지 확대가 계속되면서 농민이 경작하고 있는 토지까지도 진전이라 사칭하여 수탈하였으며 지방 관리들이 지방관아의 경비 부족이라는 이유로 농민을 동원하여 황무지를 개간하는 한편 농민의 토지를 수탈하면서 관둔전(官屯田)도 확대되었다. 이와 같은 개간지에 대한 대농민 수탈은 19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봉건 지배층의 조선시대는 후기에 이르러 사회적으로 극심한 문란과 부패, 농민 수탈 가중 등이 진행되면서, 조선시대 말의 미간지 면적은 간석지 20만 정보, 하천 변 황무지 7만 정보, 산기슭 경사지 80만 정보로 증가하였으며 그의 절반이 국유지였다. 이 시기 일제는 국가적 차원에서 우리나라의 미간지 확보를 위해 조선 정부를 압박하여 1907년 7월에 개간되지 않은 국유지의 이용을 위한 「국유미간지이용법」을 제정하면서 한국 농민의 개간권이 제한되고 일제의 국유 미간지 침탈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가운데 1910년 국권피탈 이후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이 실시되면서 ‘30년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계획의 주요 내용은 920만 석의 미곡을 증산하기 위해 관개(灌漑) 개선, 개간, 개척과 같은 ‘토지개량사업’과 시비(施肥) 증대, 주3 개선, 신품종 보급 등과 같은 ‘농사개량사업’으로 실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1차 토지개량사업의 경우, 1920년부터 1925년까지 진행하기로 하였던 면적의 59%인 9만 7500정보를 달성하는 데 그쳤다.
1926년부터 ‘제2차 계획’을 추진하면서 토지개량사업을 대행할 기관으로 1926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내에 ‘토지개량부’를 설치하였고, 1927년에는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를 만들었다. 이와 함께 조선총독부 내에 제2차 계획을 추진하는 기관을 정비하고 확충하였다. 1926년 조선총독부는 기존에 존재하던 ‘토지개량과’ 외에 식산국(殖産局)에 ‘수리과(水利課)’와 ‘개간과(開墾課)’를 신설하였고, 1928년에는 토지개량과, 식산과, 개간과를 통합하여 ‘토지개량부’를 만들었다. 토지개량부는 ‘산미증식갱신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여러 행정기관, 농회, 금융 조합 등을 동원하는 데 앞장섰다. 하지만 제2차 계획 시기에 진행된 토지개량사업의 실적도 전체적으로 좋지 않았다. 착수 면적은 원래 계획의 46%, 준공 면적은 원래 계획의 51% 정도를 달성하는 데 그쳤다. 이 시기 세계 대공황과 연이어 발생한 농업공황으로 쌀의 가격이 크게 떨어지면서 토지개량사업을 실행하기가 어려워지면서 1931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개량부가 폐지되었고, 1932년에는 조선총독부 토지개량부까지 폐지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의 식량 사정이 점점 악화하면서, 조선총독부는 1940년 수립한 ‘조선증미계획(朝鮮增米計畵)’을 개정하여 1942년 ‘개정증미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에서 조선총독부는 1943년 ‘300정보 이상의 대지구 관개개선사업’을 진행하고 ‘간척사업’을 시행하기 위한 기관으로 조선토지개발영단(朝鮮土地開發營團)을 설립하였지만 전쟁 수행 중 노동력과 자금이 부족하면서 관개개선사업과 간척사업은 자재 부족 등으로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고, 계획된 목표도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이후 미군정에서는 일본 정부의 농지기반사업을 계승 · 수습하여 사업을 시행하였지만, 사회의 극심한 혼란으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더욱이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농지 기반 시설은 큰 피해를 보았다. 정부는 전쟁 후 1953년에 농업증산 5개년계획을 수립하면서 식량 증산이 시급한 정책과제임을 제시하고, 농지기반조성사업을 시행하였으나 개간 실적은 미미하였다.
1957년부터 개간 사업의 실질적인 시도기로 1961년까지 연간 14㎢ 정도를 개간하여 총 70㎢ 정도의 농지를 조성하였다. 당시 농림부는 1957년 ‘농지개발[개간]사업실시요강’을 작성하여 각 시도에 통지하였고, 1958년 유휴지 개발을 촉진하기 위하여 유휴지 이용 방안을 성안하였는데, 이 법은 1962년 3월에 공포된 「개간촉진법」 제정의 기초가 되었다.
「개간촉진법」이 공포된 1962년부터 1966년까지는 연간 사업량이 220㎢로 20년간[1962~1981년]의 개간 면적의 60%에 달하는 1,100㎢의 면적을 개간하여 당해 총 경지면적의 5.1%, 호당 경지면적 1만 900㎡에 비교하여 10만 호의 농가 소유 면적에 해당하는 농지의 확대를 가져왔다. 이 시기 개간이 활발하게 된 것은 1962년을 시작 연도로 하는 제3차 농업증산 5개년계획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수립됨으로써 관계 기관과의 협조 체계가 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1963년 3월부터 1968년까지는 UN 한국개간사업조사기구[UNKUP]의 활동으로 농지 개간 가능 면적을 조사하였는데 전국 10대 강 유역의 7,570㎢가 개간 가능지로 판명하였다.
1962년에 제정된 「개간촉진법」은 사유재산권의 침해 등의 문제점이 야기되면서 폐지되고 1967년 1월에는 「농경지조성법」을 제정 · 공포하였다. 민간 주도형 개간 사업으로 추진하도록 하고, 종전의 사업비 재원인 국고보조 및 지원 부담 등을 변경하여 지방비와 미공법 480호의 Ⅱ[PL · 480 · Ⅱ]로 사업비의 일부를 보조하였을 뿐 대부분 농민 부담으로 조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농경지조성법」[19671971년] 시기에는 「개간촉진법」하에서 진행된 개간 실적[19621966년]의 40%도 되지 않는 420.54㎢의 개간만이 이루어졌다.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1972~1976년]은 대단위 단지화 개발기로 과거 소규모의 산발적인 개간을 지양하였다. 개간 방법도 토양 및 급지 조건에 알맞은 원지형 반계단식 및 계단식 공법을 택하여 단지화 또는 집단화하는 방향으로 전환한 첫 번째 시도기였다. 「농경지조성법」에서는 국가의 종합적 개발계획의 수립 및 실시에 관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대단위 단지화 개발의 곤란, 개간 적지의 지주 동의 없이는 개간 불가능 등의 문제점들을 보완 · 정비하기 위하여 1975년 4월에 「농경지확대개발촉진법」을 공포하였다.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1977~1981년]은 농지 확대 개발 의무화 기간으로서 「농경지확대개발촉진법」에 따라 국가가 직접 개발에 참여하였고, 사업비도 국고보조금과 지원 부담 및 융자금으로 조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기간에는 대단지를 중점적으로 개간하였는데, 개발 면적은 82㎢에 달한다. 또한, 1982년부터 1985년에도 계속하여 대단위 중심의 개간이 지속되었는데, 같은 기간 19.58㎢가
전작지주4의 개간은 1995년까지 1,971.13㎢가 개간되어 전체 개간 가능 면적의 30.1%가 농지화되어서 이용되고 있고 초지 가능 면적은 2,990㎢로 이 중 904㎢가 개간되어 30.2%의 개발 실적을 보였다. 과수원으로 이용이 가능한 개발 가능 면적은 1,160㎢로 1995년까지 82㎢가 개발되어 7.1%의 실적을 보였다.
농지 개간 사업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된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까지 활발히 추진되었으며 그 이후 농산물 시장개방 확대 등으로 농업 수익성 악화로 농지 유휴화가 많아지면서 농지를 신규로 개간할 필요성이 많이 낮아졌고, 현재는 거의 중단된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