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척 ()

새만금간척사업
새만금간척사업
산업
개념
해안, 하천 변, 늪지, 호수 등의 수면을 토지로 전환하는 토목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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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간척은 해안, 하천 변, 늪지, 호수 등의 수면을 토지로 전환하는 토목공사이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시작된 한국의 간척은 200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갯벌의 발달이라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무대로 서해안과 전라남도 남해안에서 다양한 규모의 간척이 전개되었다. 역사적으로 한국 간척의 주요 목적은 토지, 특히 농지 확보에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된 초대형 간척으로 여러 환경 문제와 사회적 갈등이 야기되면서 간척사업의 유용성에 대한 사회적인 논쟁이 촉발되었으며, 초대형 간척사업의 추진을 멈추게 되었다.

정의
해안, 하천 변, 늪지, 호수 등의 수면을 토지로 전환하는 토목공사.
간척 유형과 기술

간척은 조수의 영향 여부에 따라 감조지간척(感潮地干拓)과 무감조지간척(無感潮地干拓)으로 구분된다. 감조지간척은 해안이나 주1 연안을, 무감조지간척은 호수나 늪 또는 조수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하천 변을 대상으로 한다. 한국에서는 갯벌이 발달한 서해안과 전라남도 남해안을 중심으로 감조지간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수면을 육지로 조성하기 위해서는 제방을 쌓아 물이 육지로 유입되는 것을 막고, 내부의 물을 방출하고, 지반이 낮은 경우 다른 곳에서 흙 등을 운반하여 지반을 높이는 작업 등이 필요하다. 각각의 공정에 해당하는 방조(防潮) 또는 방수(防水), 배수(排水), 매립(埋立) 등은 간척 과정에서 중요한 기술이나, 간척지가 놓인 환경적 조건에 따라 핵심 기술은 달라질 수 있다.

대표적인 간척 국가인 네덜란드의 간척에서는 방조제 축조 후 내부의 물을 빼내는 배수 기술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국토의 50%가량이 저지대에 있고 이 중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면적이 해수면보다 낮은 네덜란드의 지형적 조건에서 요구되는 핵심 기술은 배수에 있었다. 네덜란드의 상징으로 알려진 풍차는 간척지 배수 시설로 개발되어 사용된 설비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호소(湖沼) 간척이 대규모로 이루어진 일본에서는 호소의 물을 빼내는 배수뿐만 아니라 지반을 높이는 매립 기술이 많이 사용되었다. 매립이란 우묵한 땅이나 하천, 바다 등을 돌이나 흙 따위로 채우는 것을 가리킨다. 네덜란드와 달리 산이 많은 일본에서는 매립을 위한 자재가 풍부하였다.

갯벌의 발달과 간척의 활성화

한국은 간척 면적이나 규모, 역사 등 여러 면에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간척 국가이다. 역사적으로 한국의 간척은 한반도 서해안과 남해안 서부 지역에 발달한 갯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갯벌 간척이 주가 되던 한국에서는 네덜란드나 일본과 달리 배수나 매립 기술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였다. 지면이 높고 연중 대기에 노출된 시간이 많은 갯벌은 방조제를 쌓아 바닷물을 차단하면 그 내부를 쉽게 육지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간척 역사는 오래되었으며 간척 면적도 넓으나, 20세기 이전 간척 중 기록이 남아 있는 간척지는 극히 일부이다. 19세기까지 이루어진 간척 면적은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할 수 없으나, 지형도와 표토 토성도, 분포 지형도 등 주제별 토양도의 비교를 통해 과거 해안선을 복원한 연구들은 20세기 이전 간척 면적이 상당하였음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간척

조선시대 기록에서 간척을 지칭하는 용어는 ‘축언(築堰)’ 또는 ‘축동(築垌)’이다. ‘언(堰)’과 ‘동(垌)’은 방조나 방수의 기능을 하는 제방을 가리킨다. 간척을 통해 조성된 경지는 ‘ 언전’이나 ‘언답(堰畓)’, ‘동답(垌畓)’이라 하였다. 육지에 있는 기성 답을 뜻하는 ‘육답(陸畓)’과 구분되어 쓰인 ‘해답(海畓)’이란 표현 역시 간척으로 조성된 논을 의미한다. 크고 작은 간척지가 산재해 있는 서해안에는 간척과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언내(堰內)’, ‘언안(堰-)’, ‘언장(堰場)’, ‘원안[堰-]’, ‘원장[堰場]’ 등 ‘언’에서 유래하는 것들이 많다.

기록에 등장하는 최초의 간척은 고려시대 몽골 침입기에 있었다. 천도(遷都) 이후 식량 확보를 위해 강화도에서 간척이 이루어졌으며, 평안도 위도(葦島)에서도 서북면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방경(金方慶)이 주도한 간척 공사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간척 관련 기록이 증가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조선 초기부터 간척 관련 기사가 실려 있으며, 16세기에 들어와서는 왕족을 비롯한 중앙 척신(戚臣)들의 간척이 사회적인 문제로 비화할 정도로 권세가들의 간척이 두드러졌다.

서해안 일대의 간척지 개발이 새로운 전기(轉機)를 맞이하게 되는 시점은 17세기 이후이다. 양란 이후 군영(軍營)을 중심으로 한 국방 체제의 전반적인 정비 과정에서 대두된 둔전(屯田) 확대책은 개인의 수준을 넘어서서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로서 간척지 개발이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과 왕실 가족의 가계를 담당하던 궁방(宮房) 역시 재원 확보를 위해 간척지 개발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조선 후기에 오면 간척 관련 기록물의 종류도 다양해진다. 관찬 편년사 자료뿐만 아니라, 둔전 및 궁방전(宮房田) 운영을 위해 작성된 양안(量案)이나 추수기, 개인들의 토지 매매 문기(文記)나 소송자료 등 다양한 수준의 자료에서 당시 전개된 간척의 역사를 찾아볼 수 있다.

조선 후기 국가가 주도한 대표적인 간척으로는 숙종 대 축조된 강화도 선두포언(船頭浦堰)과 경종 대 안산과 인천 사이[지금의 경기도 시흥시]에 축조된 진휼청신언(賑恤廳新堰) 등을 들 수 있다. 궁방의 간척으로는 19세기에 조성된 부안 용동궁 장토 등이 있다. 윤선도(尹善道)로 유명한 해남 윤씨 가문은 16~18세기 간척을 통해 소유지를 확대한 사족으로 유명하며, 이와 관련된 자료가 이 집안 소장 문서로 남아 있다. 일반 백성들도 쉽게 간척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그 규모는 대체로 영세하였다. 일반 백성들이 조성한 소규모 간척지는 그 밖으로 대규모 간척지가 조성되면서 여기에 편입되는 일이 많았으며, 이 경우 종종 소유권 분쟁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20세기 이후 간척

간척 법령의 정비와 규모 면에서 20세기 간척은 이전 시대와 구분된다. 현대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간척과 매립 등은 일본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한말 일본과 수교 이후 도입되었다. 갯벌을 뜻하는 간석지 역시 간척과 매립 등의 용어들과 함께 도입되었다. 1923년 4월에 제정된 「조선공유수면매립령」은 한국 간척사에서 제도적 변화를 불러온 법령이다. 간척사업의 법적 절차를 규정하고 있는 이 법령은 1921년에 제정된 일본의 「공유수면매립법」을 식민 조선에 적용한 것이다. 이 법령이 제정되기 전에는 「국유미간지이용법」[1907년 제정]에 따라 간척사업이 진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공유수면매립법」[1962년 제정]이 제정되어 식민지기 법을 대체하였으나, 법률적 체계와 내용은 이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조선공유수면매립령」의 이념은 해방 이후에도 간척사업의 법적인 토대로 지속되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간척 규모와 면적 역시 대폭 확대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반도 전체에서 약 558.53㎢의 토지가 간척을 통해 조성되었다. 이 시기에 추진된 토지개량사업은 대규모 방조제 축조와 간척사업의 활성화에 일조하였다.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는 국제 원조 양곡을 기반으로 민간 부문의 간척이 활성화된 시기이다. 이 시기 전개된 남한의 간척 면적은 약 235.44㎢에 달한다. 간척 규모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까지 간척은 주로 갯벌을 대상으로 이루어졌으며, 인간 노동력에 기반한 간척 기술이 지속되었다.

1970~1980년대 전반은 해외 차관을 이용한 국가 주도 대단위농업종합개발사업의 추진으로 간척 규모가 대대적으로 확대된 시기이다. 복식간척(複式干拓)의 추진과 중장비의 본격적인 도입 등 간척 방식과 기술 면에서도 이전 시기에 볼 수 없던 혁신이 있었다. 복식간척은 단식간척(單式干拓)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수심이 깊어 썰물에도 지면이 노출되지 않는 만의 입구나 하구를 방조제로 막고 내부에 있는 갯벌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다시 제방을 쌓아 토지를 확보하는 방식이다. 방조제 내부에 다시 제방을 축조해야 한다는 점에서 복식이라 한다. 복식간척은 내부에 수면을 포함한다.

이와 달리 단식간척은 한 번의 방조제 축조로 토지를 확보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간척 방식의 변화와 함께 간척 면적도 절대적으로 확대되었다. 2020년 한국의 총 토지 면적은 1970년 최초 통계치보다 2,382㎢가 증가하였다. 이는 제주도 면적의 약 1.3배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와 같은 면적 증가를 이끈 것은 대형 간척사업이었다. 이 시기까지 간척의 주요 목적은 농지조성에 있었다. 복식간척을 통해 조성된 방조제 내부의 호수는 담수화되어 일대 농지에 농업용수로 공급되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하구를 막는 복식간척이 주를 이루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하구보다 더 바다로 나가 큰 만구를 막는 복식간척이 추진되었다. 1987년 착공하여 1994년 완공된 시화방조제나 1991년 착공하여 2010년 완공된 새만금방조제는 큰 만의 입구를 막은 대표적인 방조제이다. 이 시기 간척은 농업 이외에도 다른 산업적 목적을 위해 추진되었다. 큰 만의 입구를 막는 초대형 간척사업의 추진과 함께 어장 상실로 인한 사회적인 갈등뿐만 아니라 갯벌 파괴와 내수면 오염 등의 환경문제가 불거지면서 간척사업의 유용성에 대한 사회적인 논쟁이 촉발되었다. 새만금방조제는 축조 과정에서 공사의 중단 여부를 결정하는 재판이 열리기도 하였다. 새만금방조제는 대법원 판결에 따라 공사가 재개되어서 완공되었지만, 국가가 계획하던 복식간척 중심의 초대형 간척사업은 추진을 멈추게 되었다. 기존에 축조된 방조제를 허물고 갯벌을 복원하자는 역간척(逆干拓) 움직임 또한 시작되었다.

의의와 평가

수면을 육지로 전환하는 간척은 자연 이용 방식의 변화이며, 이 과정에서 소유관계 역시 변화한다. 이는 자연과 사람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의 변화를 의미한다. 환경 변화와 사회적 관계의 변화를 동시에 수반하는 간척은 공공성의 논리로 정당화되어 왔다. 한국의 간척 역사를 관통하는 지배적인 공공성 논리는 토지, 특히 농지 확보에 있었다. 농지 확대라는 차원에서 간척에 부여된 공공성은 공적 사업뿐만 아니라 민간 간척에 대한 공적 자금의 투입을 정당화하였다.

1970년대 이후에도 간척의 주요 목적은 농지 확대에 있었으나, 국가의 전체 경제개발 계획 로드맵 속에서 국토의 효율적 이용과 개발을 표방하였다. 식량 자급을 목표로 하던 국가는 농업 근대화의 기치 아래 농지 확대를 통한 식량 증산을 국가적 차원의 당면 과제로 내세웠다. 토지 확보 또는 국토 확대라는 차원에서 간척에 부여된 공공성의 이면에는 갯벌과 바다에 대한 이중적 인식이 깔려있다. 간척은 공공의 이용 대상이면서 이용도가 낮은 갯벌의 이용도를 높이는 활동으로 인식되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된 초대형 간척으로 갯벌이 급속도로 파괴되는 시점에서 갯벌이 지니는 산업적 가치뿐만 아니라 환경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인식 역시 높아지게 되었으며, 국토의 일부로서 갯벌의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토지 확보를 목표로 한 간척지 개발의 역사는 조선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20세기 말까지 지속하였다. 토지 확보라는 이상은 장기간에 걸쳐서 지속한 하나의 역사적 지층으로서 전체 간척의 시대를 구획하는 이념적 차원으로 작용하였다. 역간척 움직임은 오랜 역사 동안 이어지던 간척의 시대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양선아, 『간척』(해남, 2024)
『한국생업기술사전: 농업 1』(국립민속박물관, 2020)
정윤섭, 『해남윤씨가의 간척과 도서경영』(민속원, 2012)
홍금수, 『전라북도 연해지역의 간척과 경관변화』(국립민속박물관, 2008)
『한국의 간척』(농어촌진흥공사, 1995)

논문

양선아, 「19세기 궁방의 간척: 부안 삼간평 용동궁 장토를 중심으로」(『한국문화』 57,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2)
양선아, 「조선 후기 간척의 전개와 개간의 정치: 경기 해안 간척지 경관의 역사인류학」(서울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10)
임채성, 「식민지 조선에 있어서의 간척사업에 관한 연구: 조선인의 능동적 참여와 성장」(서울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1995)
최영준, 「강화지역의 해안저습지 간척과 경관변화」(『대한민국학술원논문집(인문사회과학편)』 30, 대한민국학술원, 1991)
송찬섭, 「17·18세기 신전개간의 확대와 경영형태」(『한국사론』 12,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85)
주석
주1

강어귀 또는 하천의 하류에서 밀물과 썰물의 영향을 받아 강물의 염분, 수위, 속도 따위가 주기적으로 변화하는 하천.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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