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조제 축조는 조차(潮差)가 크고 해안의 경사가 완만한 곳이 적당하다. 우리 나라의 서해안이 최적지이며, 간석지가 발달해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소규모의 방조제가 축조되어 경지나 염전으로 이용되어 왔다.
일제 강점기 때 간척사업은 사리 때만 바닷물에 잠기는 염생습지를 대상으로 하였고 국토개발이 시작된 1970년대는 중장비를 이용, 해면 매립을 하게 되면서 간척사업의 규모도 차츰 커지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방조제를 최초로 축조한 것은 1255년(고종 43)이며, 당시는 방축(防築) 또는 축언(築堰)이라 하였다.
즉 “문무 3품 이하 권무 이상의 관리에게 영을 내려 장정들을 차출하여 제포와 와포에 방축을 쌓고 좌둔전을 만들고 이포와 초포에 우둔전(右屯田)을 만들었다(會文武三品以下權務以上 出丁夫有差 防築梯浦互浦 爲左屯田 狸浦草浦 爲右屯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 시대 김방경(金方慶)이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으로 있을 때 몽고병의 침입으로 무리를 이끌고 “위도에 들어가 간척이 가능한 10여 리 땅에 방조제를 쌓고 농사를 지었다.(葦島有十餘里 平衍可耕 患海潮 不得墾 方慶令築堰 번種)”는 기록이 있다.
1643년(인조 21)에 김자점(金自點)이 황해도 사리원의 여주(廬州)를 개척할 때 방조제를 축조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대규모의 방조제는 1920년대에 일본인들이 산미증식운동(産米增殖運動)의 일환으로 대단위 수리조합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즉, 호남평야의 대부분은 1924년에 준공된 진봉(進鳳)방조제, 광활(廣活)방조제, 1926년에 준공된 화포(花浦)방조제, 1927년의 대창(大倉)방조제, 1929년의 서포(西浦)방조제, 1932년의 도선장(渡船場)방조제 등의 축조로 경지화되었다.
그 뒤 1970년에 들어 국토종합개발사업의 하나로 대단위 농업개발사업이 실시됨에 따라 1973년 계화도 지구에 제1방조제와 제2방조제가 준공되었다. 한편, 1972∼1981년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에 따라 평택지구 개발사업으로 아산만의 아산(牙山)방조제와 남양만의 남양(南陽)방조제가 준공되어 아산호와 남양호가 인공 담수호로 만들어졌다.
이 두 방조제는 충청남도와 경기도의 해안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로도 이용되어 이 지역 개발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이와 같이 대단위 방조제는 1970년 후반부터 충청남도 서해안 일대의 곳곳에서 진행되었다.
1979년에 준공된 삽교천(揷橋川)방조제는 1984년에 끝난 서산A·B지구 방조제와 1985년에 완공된 대호 지구의 대호(大湖)방조제 등으로 흘러드는 하천이 없는 거대한 담수호가 되었다. 또한, 이들 방조제는 도로로 이용되면서 지역간의 교통도 보다 편리하게 되고 있다.
이어 1994년 물막이 공사가 끝난 시화지구 간척사업의 완성으로 해안공업지대의 위상이 높아졌다. 1995년 물막이 공사가 끝난 전라남도 영암과 해남만 간의 간척사업은 초대형 간척사업이다. 더욱이 2004년에 완공 예정인 금강 하구에서 만경강에 이르는 대규모의 간석지를 개척하는 새만금지구 개발계획이 33㎞에 이르러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것이 완공되면 해면 매립 면적이 4만 100㏊에 이르는데, 국내 최대는 물론 세계적인 규모의 방조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광대한 농경지는 물론 임해공업단지가 조성될 예정이다.
결과적으로 이와 같이 간척사업의 추진으로 국토 면적이 넓어지게 되는 반면 서해안과 남해안의 해안선은 단조로워지고 해면매립에 따라 우리 나라 지도의 모습도 달라지는 한편 생태계의 파괴로 어민들은 어장을 빼앗기는 등 심한 갈등과 부작용도 고려해야할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