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8월에 개성송신소가 간이송신소로 착공되어 1943년 3월 제1방송(일어) 위주로 개소되었다. 이 송신소의 건설은 우리 나라 기술자만으로 이루어졌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정보국에서 방송전파를 강력하게 통제하여 시민들의 고급수신기를 압수하는 한편, 무허가 라디오의 수신도 단속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조선방송협회 기술부 시험실에서 근무하던 성기석은 1942년 봄부터 일본인 몰래 흥미와 연구를 겸해 몇 대의 단파수신기를 만들어 해외 단파방송을 듣는 한편, 친지들에게 나누어주고 서로 단파방송 청취소식을 교환하곤 했다.
이와 같은 소식은 방송국에 근무하는 사람들 간에 퍼져 나갔고,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1942년 12월 우리 나라 기술자들이 경기도 경찰부에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받는 한편, 경향 각지의 방송관계자는 물론 심지어 라디오를 취급하던 상인들까지도 검거되었다. 그 결과 개성송신소 직원이 전원 구금되어 수일간 방송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당시 일제의 극심한 정보통제로 인하여 해외의 동정을 전혀 알 수 없던 상황에서, 방송국에 근무하던 우리 나라 기술자들만은 비교적 쉽게 외국의 소식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개성송신소단파수신사건이 발생하기 전에도 한국인 기술자들은 조기방송이나 불시의 방송에 대비하여 일본인과 조를 이루어 혼성 숙직을 하였는데, 이때 밤중에 몰래 일어나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방송국에서 송출하는 ‘자유의 소리’ 방송을 듣곤 하였다.
이 방송에서는 이승만의 ‘2천만 동포에 고한다’라는 우리말 방송이 30분간 방송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처음에는 조정실에 근무하는 기술자들만이 알고 있었으나, 차츰 직원들간에 알려지게 되어 거의 모든 한국인 방송관계자들이 이 방송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개성송신소단파수신사건이 발생하여 당시 정동방송국에 근무하던 한국인 기술자 13명 가운데 10명이 잡혀 들어가는 등 전국적으로 약 150여 명의 한국인 방송관계자들이 투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