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최초로 육로에 가설된 전신선은 1885년 8월 20일(양력 9월 28일) 개통된 한성∼제물포(지금의 인천)간의 전신선이다.
이 전신선은 청나라의 주도 아래 가설되었고 한성전보총국이라는 청나라의 기구에 의하여 운영되었으나, 남로전선은 1887년 3월 13일 창설된 한성전보총국과는 별도의 기구인 전보총국의 주관하에 독자적으로 가설되었다.
남로전선의 가설을 둘러싸고 한때 일본과의 격렬한 외교적 마찰이 있어 마치 일본의 강요에 의하여 이루어진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부산은 남부의 요지로 우리 정부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전신가설을 생각하였으며, 선로를 계획할 당초에는 최단거리를 택하여 충주 · 대구를 거쳐 부산에 이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실제 착공에 있어서는 행정연락을 고려하여 난공사를 감수하면서까지 충청감영의 소재지인 공주와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를 경유하여 대구를 거쳐 부산에 이르는 우회선로를 택한 것으로 보아 우리의 독자적인 효용에 의하여 가설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가설공사의 초기에는 덴마크인 뮐렌스테드(Muhlensteth,H.J.)와 영국인 헬리팩스(Helifax,T.E.)라는 서양인이 기술자로 참여하기는 하였으나, 전 공사를 우리의 기술진이 시공하여 뒷날 초창기 전기통신사업에 있어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남로전선의 가설은 1885년 서로전선이 준공된 이후 곧바로 계획되어 처음에는 청나라의 한성전보총국에서 대설하도록 조약을 체결하였으나, 조약체결 1년이 지나도록 진척이 없어 1887년에 우리 정부에서는 자주적인 가설로 방침을 바꾸고, 전신기기와 물료의 구입 및 기술자 확보 등을 자체의 힘으로 해결하여 가설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887년 2월 26일 당시 인천에 있던 독일상사인 세창양행에 주문하였던 3만 4,150원 상당의 전선 및 전신물료가 도착하지 않아 공사의 착공이 늦어졌다. 그 뒤 1888년에 필요한 물료가 도착하기 시작하여 그 해 3월 6일에는 한성에서, 3월 18일에는 부산에서 각각 공사가 착공되어 같은 해 6월 9일 준공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