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接)’이란 원래 무리라는 뜻을 지녔지만 서당에서는 동급의 학도를 지칭한다.
고려시대의 사학(私學)인 12도(十二徒)에서 사찰·정사를 빌려 하과(夏課 : 고려때 선비들이 여름철인 오뉴월에 시작하여 오십일을 한정하고 절에 들어가서 詩賦를 지어 공부하던 일)를 개설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서, 서당은 물론 사학(四學)·향교 등의 관학에서도 성행하였다.
거접 활동은 반드시 특정 서당의 내부 행사로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임필대(任必大)의 「오산서당절목(梧山書堂節目)」에 의하면, 거접 활동은 서당 외부인사에게도 개방되었다. 또한 거접 활동 및 강학(講學)을 지원하기 위한 서당계(書堂契)가 조직되기도 하였다.
이황(李滉)의 「이산서당기(伊山書堂記)」에도 사학의 접에 참여하기 위하여 타처의 유생이 원정해 오는 경우가 보인다. 한편 거접 과정에는 정자·산사(山寺) 등에 모여 시부(詩賦)등을 지어 그 실력을 겨루기도 하였다.
이 행사는 대체로 음력 6월을 맞이하여 개접례(開接禮)라는 잔치를 개최하고, 동접(東接)·서접(西接) 등으로 편을 갈라 시제(詩題)를 놓고 경쟁하였다. 과거의 예에 따라 제일 먼저 제출하는 답안을 일천(一天), 그 다음을 이천(二天), 마지막 답안을 말천(末天)이라고 하였다.
장원한 사람은 장원례를 베풀어 참석자 전원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접을 파하는 것은 대체로 칠월 칠석, 또는 그 전날에 이루어지고, 이 때에도 세연례(洗硯禮), 또는 파접례(罷接禮)라는 연회를 개최하였다. 파접날의 글제는 흔히 한유(韓愈)의 시구인 ‘등화초가친(燈火稍可親)’으로 하는 것이 관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