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천서당은 1573년 조선 전기 문신 갈천 임훈과 동생 임운이 후학 양성을 위해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에 건립한 서당이다. 임훈이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양성하던 곳에 동생 임운과 성팽년 , 정유명, 정몽서, 신복행 등이 합심하여 서당을 만들었다. 이후 화재로 인하여 몇 번의 이건과 중건을 반복하다가 결국 소실되었으나, 1877년(고종 14) 정몽서 및 임훈의 후손들이 합심하여 재건했다. 현재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강당과 솟을 대문이 남아있으며, 뜰에는 후손들이 세운 두 형제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거창 갈천서당(葛川書堂)은 조선 전기 문신 갈천(葛川) 임훈(林薰, 15001584)이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양성하던 곳에, 임훈 사후 동생 임운(林芸, 15171572)과 성팽녕(成彭年, 15401594), 정유명(鄭惟明, 15391596), 정몽서(鄭夢瑞, ??), 신복행(慎復行, 15331624) 등이 합심하여 세운 서당이다.
임훈은 1540년(중종 35) 생원시에 합격했고, 1553년(명종 8) 54세 때 관천(館薦)에 의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나, 노부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다시 천거되어 언양현감, 비안현감에 임명되었고, 광주목사를 역임한 뒤에도 장악원정, 장예원 판결사 등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을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고향에 머물면서 갈천에서 90리 떨어진 마학동(磨學洞)에 학문을 강론하기 위해 서당을 지었는데, 그가 죽으면서 서당은 쇠퇴했다. 이런 상황을 안타갑게 여긴 성팽녕 · 정유명이 서당 중건을 발의하자 정몽서 · 신복행이 중건에 참여했고, 임훈의 동생 임운이 서당의 규모와 제도를 마련했으며, 당시 수령의 경제적 보조를 받아 갈천의 서쪽 석담(石潭) 아래 회암(回巖)의 위로 이건 · 중수하면서 갈천서당이 되었다.
갈천서당이 건립된 후 임진왜란을 겪었고, 이로 인해 서당은 소실되었다. 이후 소실과 중건을 반복하다 화재로 소실된 후 한동한 중건되지 못했다. 1877년(고종 14) 정몽서의 후손과 임훈의 후손 임방수(林芳洙) · 임수기(林秀基)가 서당을 중수하고자 기획했고 마을 사람들도 재물을 내어보탰다. 이에 옛날 규모를 따라 재건했다. 서당의 중수에는 성재(性齋) 허전(許傳)이 참여하였다. 이상의 건립 경위 및 변천 과정은 『갈천서당중수기(葛川書堂重修記)』, 『갈천서당개건상량문(葛川書堂改建上樑文)』, 『갈천서당명(葛川書堂銘)』 등의 사료에 기술되어 있다. 갈천서당은 1993년 12월 27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갈천서당이 현재 위치한 곳은 경상북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이다. 북상면은 덕유산 남쪽과 맞닿아 있으며, 갈천서당은 거창향교에서 직선거리로 약 12.5㎞ 떨어져 있다. 갈계리에는 소정리 일대에서 발원한 소정천이 흐르고 있는데, 소정천은 거창위천에 합류하고, 거창위천은 황강에 합류해 합천댐까지 이어진다. 갈천서당은 소정천이 거창위천에 합류하기 직전에 위치하고 있다. 소정천의 다른 이름이 갈천이며, 임훈의 호 갈천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갈천서당은 정면 5칸, 측면 1칸이며, 홑처마 맞배지붕 형태를 띠고 있다. 대문은 맞배지붕의 솟을 대문이다. 뜰에는 후손들이 세운 두 형제의 신도비가 있다.
갈천서당은 19세기 말에 중건된 서당으로 당시까지도 서당 건립이 꾸준히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서당에서 여론을 형성하는 등 향촌 유림들이 구심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임훈 갈천문집 목판 및 임운 첨모당문집 목판이 1979년 12월 29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