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임당동 고분군 ( )

선사문화
유적
문화재
경상북도 경산시 영남대학교 앞 구릉 분포 고분군 가운데 가장 서쪽에 있는 삼국시대 고분군.
이칭
이칭
경산임당지역고분군, 경산임당유적,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암반굴착덧널무덤
건립 시기
삼국시대
관련 국가
신라
소재지
경상북도 경산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경산임당동고분군(慶山林堂洞古墳群)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83년 02월 03일 지정)
소재지
경북 경산시 임당동 676-1번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경산임당동고분군(慶山林堂洞古墳群)은 경상북도 경산시 영남대학교 앞 구릉 분포 고분군 가운데 가장 서쪽에 있는 삼국시대 고분군이다. 7기의 대형 봉토분으로 구성되었으며, 3호분과 4호분, 그리고 1호분의 일부를 제외한 고분이 발굴되었다. 발굴 결과 묘제는 암반굴착덧널무덤이라고 부르는, 암반을 굴착하여 무덤구덩이를 파고 여기에 나무덧널을 설치한 것이 주류이다. 남아 있는 봉토 각각에는 2기 이상의 고분이 연접하여 축조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정의
경상북도 경산시 영남대학교 앞 구릉 분포 고분군 가운데 가장 서쪽에 있는 삼국시대 고분군.
발굴경위 및 결과

영남대학교 북측에 동서로 길게 뻗은 구릉에는 원삼국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장기간에 걸친 다종다양한 유적이 많이 분포하고 있는데, 이를 ‘경산임당유적’이라고 부른다. 이 가운데 가장 서쪽에 군집한 대형분들이 ‘경산임당동고분군’이다.

고분군의 2호분이 도굴되어 은제 허리띠 등의 중요 유물이 외국으로 밀반출되려다 도굴범이 잡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도굴품의 출처를 확인하기 위한 영남대학교 박물관의 발굴 조사가 1982년 7월부터 12월까지 실시되어 그 성격이 밝혀졌다.

이때 발굴된 고분이 2호분과 5∼7호분이다. 이후 1987년 경산임당유적 전체 구릉에 대한 택지개발이 시작되어 고분군의 주변을 1994년 영남문화재연구원이 조사하였는데, 원삼국시대에 해당되는 널무덤, 덧널무덤을 비롯해 이른 시기 대형의 돌무지덧널무덤인 임당동 5 · 6호분이 발굴되었다. 2015년에 또 1호분이 도굴되어 이에 대한 발굴이 2016년과 2017년에 걸쳐 한빛문화재연구원(현, 한빛문화유산연구원)에 의해 시행되었다.

1982년 발굴 이후 고분군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었으나, 고분군 동편에 분포하는 경산조영동고분군과의 통합 관리의 필요성으로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慶山 林堂洞과 造永洞 古墳群)’으로 재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형태와 특징

사적으로 지정된 경산임당동고분군에는 지금 7기의 큰 봉분이 잔존하고 있다. 이 중 1호분의 일부와 2호분, 5 · 6 · 7호분이 발굴되었다. 경산임당동고분군의 묘제는 암반을 굴착하고 그 안에 나무덧널을 사용한 암반굴착덧널무덤이라고 부르는 것이 주류를 이룬다.

이들 고분은 대부분 으뜸덧널과 딸린덧널로 구성되었는데, 대형의 경우 으뜸덧널은 대략 길이 5m, 너비 2m, 깊이 2m 정도인 장방형이고, 딸린덧널은 대략 길이와 너비가 각 4m, 깊이 1,5m 정도인 방형이다. 덧널은 동쪽의 으뜸덧널, 서쪽의 딸린덧널을 일렬로 창(昌)자 모양으로 배치한 것이 주류이나 나중에는 으뜸덧널과 딸린덧널을 나란하게 명(明)자 모양으로 배치한 것(2호분의 남 · 북호)과 으뜸덧널만 설치한 단곽식(6A호)도 축조되었다.

으뜸덧널은 암반을 굴착하고 그 내부에 나무덧널을 설치한 다음 굴착한 암반의 지면에 화강암제의 개석을 덮었는데, 덧널의 바깥에 냇돌이나 깬돌을 채워 덧널을 보강하여 경주의 돌무지덧널무덤의 모습과 유사하다.

딸린덧널은 암반을 굴착한 다음 내부에 나무덧널을 설치하고 흙을 채우고 덮었다. 이 묘제 외에도 고분군에서는 1기의 대형인 돌방무덤(5A호)도 확인되었다. 동-서축의 이 돌방은 앞의 암반굴착식과는 다르게 지상에 냇돌과 깬돌을 쌓아 축조한 것으로 서쪽의 입구 남쪽으로 붙여 작은 널길을 낸 것이다.

추가장이 시행되지 않은 홑무덤의 굴식돌방무덤으로 영남 지방에서는 가장 앞선 것 가운데 하나로 판단되고 있다. 고분군에서는 이외에 어린아이를 매장한 독무덤도 확인되었다.

이들 덧널 위에 이를 굴착하며 나온 암반 조각과 주변을 정리한 암반 조각이나 흙을 섞어 봉분을 쌓았는데, 2기 이상의 봉분을 연결한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여러 덧널식의 봉분을 이루어 전체 모습은 2기의 봉분이 연접된 경우 표형분(瓢形墳)에 가깝고, 더 많이 연접된 경우 여러 봉우리를 가진 모습이었으나 대부분 무너져 마치 타원형의 동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발굴 결과 연접된 각각의 봉분은 대략 직경 18m, 높이가 5m 정도의 원형이었다. 발굴된 주요 대형분의 경우 G-5 · 6호와 2호는 2기가 연접되었고, 5 · 6 · 7호는 5호의 3기(A · B와 옹관), 6호의 1기(A), 7호의 4기(A · B · C와 옹관)가 연결되며 연접되어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또한, 일부 발굴된 1호분의 경우 많은 고분이 연접하여 한 봉분처럼 보이는 것인데 북측에서 발굴된 2기(A · B)가 연접되어 있었고, 발굴되지 않은 그 남쪽에 이들에 연결된 고분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봉분의 연접 방식은 원형이나 타원형의 봉분을 첫 번째 피장자의 무덤으로 축조하고, 다음 피장자의 봉분은 먼저 축조된 봉분의 일부를 헐고 그곳에 덧널을 축조한 다음 봉분을 이어가는 방식으로 계속 연결하였으나 나중에는 앞선 봉분을 헐지 않고 그대로 둔 다음 덧널을 앞의 봉분에 붙여 축조하고 그 봉분을 연결하기도 하였다. 봉분의 축조 과정은 각 봉분의 기저에 돌려 축조한 호석(護石)이 그대로 남아 잘 알려 준다.

의의 및 평가

비록 도굴의 피해를 많이 입었으나 경산임당동고분군에서는 금동제의 관과 관식, 은제 관식, 금제 귀걸이, 은제 허리띠, 곱구슬을 매단 유리목걸이, 금제나 은제의 반지와 팔찌, 금동제 신발 등의 회려한 장신구와 금동장이나 은장의 큰칼 등이 출토되어 이들을 착용한 주인공의 모습을 그릴 수 있다.

이외에도 각종 마구류, 무기류, 철공구류, 토기류 등 수천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착용한 유물로 판단할 때 이 고분군의 피장자는 4∼6세기에 걸쳐 경산 지역의 지배 집단 역할을 한 인물들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이 이전에 여기에 존재했던 압독국(押督國) 또는 압량소국(押梁小國)이 신라에 병합된 후 지방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얼마 떨어지지 않는 조영동과 부적리에 분포하는 대형 고분들과는 같은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되어 당시 사회 구조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경산임당동고분군은 시기를 달리하는 고분이 지속적으로 연접하여 축조됨으로써 그 축조 서열을 호석과 토층으로 확인할 수 있어 신라 고분의 상대 편년에 기준을 제공하고 있다.

이 고분군의 또 다른 특징은 암반을 굴착한 무덤이기에 인골이 잘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인골 자료의 분석을 통해 순장이 시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친연(親緣) 관계 등이 추적되고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경산 임당 1호분』(한빛문화재연구원, 2020)
『경산임당지역고분군Ⅶ-임당5 · 6호분』(영남대학교박물관, 2003)
『경산임당지역고분군Ⅵ-임당2호분』(영남대학교박물관, 2002)
『경산임당동유적Ⅰ』(영남문화재연구원, 1999)
김용성, 『신라의 고총과 지역집단-대구·경산의 예』(춘추각,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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