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고분 ()

경주 대릉원 일원 중 남쪽 하늘에서 바라본 황남리 고분군 전경
경주 대릉원 일원 중 남쪽 하늘에서 바라본 황남리 고분군 전경
고대사
유적
삼국시대 신라부터 통일신라까지의 무덤을 지칭하는 용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신라고분은 삼국시대 신라부터 통일신라까지의 무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경주의 신라고분은 신라 최고 지배자의 칭호가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왕으로 바뀌어 감에 따라 묘제도 함께 변화하였다. 신라식 덧널무덤은 덧널 위에 야트막한 봉토를 쌓은 형태로 사로국이 신라국가로 탈바꿈하는 시기의 것이다. 4세기 후반부터 등장하는 돌무지덧널무덤은 금관과 금제 허리띠 등 각종 금제품을 다량 부장한 경주 시내 평지의 대형분들이다. 6세기 전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함께 돌방흙무덤으로 교체되며, 8세기 후반 신라 지배체제의 와해되면서 소형 돌덧널무덤으로 바뀌었다.

정의
삼국시대 신라부터 통일신라까지의 무덤을 지칭하는 용어.
개설

신라는 경주를 수도로 하여 오랫동안 존속했던 나라였고, 또 시기에 따라 영역이 확장되었으므로 신라고분은 시기에 따라 묘제와 고분 구조가 변천되었으며, 그 분포범위도 달라졌다. 수도 경주에서 중심 묘제의 변천을 기준으로 신라 고분문화의 시기를 구분하여 살펴보면, 신라국가 형성기인 조기(3세기 후반∼4세기 전반)에는 경주와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신라식 덧널무덤〔木槨墓〕가 축조되었고, 전기(4세기 후반∼6세기 전엽)에 경주에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 당시 지배 영역인 낙동강 이동의 영남지방에서는 구덩식 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墳〕과 앞트기식 돌덧널무덤〔橫口式石槨墳〕이 축조되었다. 후기(6세기 전반기∼)에는 돌방흙무덤〔石室封土墳〕이 중심 묘제가 되었으며 6세기 중엽부터는 신라가 진출한 중부지방에도, 그리고 삼국통일 이후에는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의 한반도 전역에 신라고분이 축조되었다.

내용

서기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전반기까지, 즉 신라의 고분문화 조기에 축조된 신라식 덧널무덤이란 주검을 안치한 주곽과 부장품을 매납한 부곽을 지하에 판 하나의 긴 토광 안에 설치한 것으로 생김새로는 세장방형(細長方形) 동혈주부곽식(同穴主副槨式) 덧널무덤이다. 경주 구정동유적에서 처음 발견된 뒤 경주 죽동리와 황성동에서도 조사되어 구정동형 덧널무덤, 경주식 덧널무덤이라 부르기도 한다. 신라식 덧널무덤은 영남지방에서 원삼국시대 전기의 널무덤에 이어 후기에 축조된 직사각형의 덧널무덤으로부터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 김해 대성동유적, 부산 복천동유적에서 나타나는 주곽과 부곽을 별도의 토광에 설치한 이혈주부곽식(異穴主副槨式) 덧널무덤과는 구별되는 존재이며, 환두대도와 철창을 비롯한 많은 무기, 철제 갑옷과 투구 등이 부장되고 순장의 흔적이 발견되는 등 사로국(斯盧國) 단계의 무덤과는 질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진한 12국 가운데 하나인 사로국이 신라국가로 탈바꿈해가는 시기에 신라의 정체성을 드러낸 것으로 평가되며, 그 분포범위는 포항 옥성리, 울산 중산리와 양동, 경산 임당동과 대구 서변동 등 경주의 주변으로 넓어져가고 있어 신라의 세력범위가 점차 확대되어갔던 과정을 보여준다. 신라식 덧널무덤은 지상에는 흔적이 없고 지하유구만 발견되지만 원래는 덧널 위로 지상에 야트막한 봉토를 쌓았던 것이다.

서기 4세기 후반기부터 시작되는 신라의 고분문화 전기를 대표하는 것은 경주의 돌무지덧널무덤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이란 매장주체부인 덧널의 주위와 위에 냇돌을 쌓아 적석부를 만들고 그 위로 다시 봉토를 쌓고 봉토 주위로는 냇돌로 호석을 쌓아 돌린 고분이다. 황남대총(皇南大塚) · 금관총(金冠塚) · 천마총(天馬塚) 등 대형분들은 일체의 구조가 지상에 축조되지만 중 · 소형분들은 지하에 토광을 파고 덧널을 설치하였다. 돌무지덧널무덤의 기본형은 원형분이지만 원형분 2기를 남북으로 잇대어 외형상 표형(瓢形) 쌍분(雙墳)을 이루는 부부합장묘도 있고, 중 · 소형분의 경우 호석을 잇대어 달아내가며 고분을 추가적으로 설치해 나가거나 한 줄의 호석 안에 여러 개의 무덤덧널〔墓槨〕을 설치한 예들도 있다.

경주에서 돌무지덧널무덤의 출현은 신라에서 고총(高塚)문화가 본격화한 것으로 지상에 거대한 봉분을 조성한 돌무지덧널무덤들이 경주 시내 평지에 대고분군을 형성하고 있는데, 표형 쌍분인 황남대총은 남북 길이 120m, 높이 22m에 이르고, 단독 원분 중에도 직경 80m, 높이 20m에 달하는 것까지 존재한다. 부장품에 있어서도 금관과 금제허리띠, 금귀걸이를 비롯한 각종 금제품과 기승용(騎乘用) 마구, 철제 무기 등이 대량으로 부장되어 경주의 돌무지덧널무덤은 고분 규모뿐만 아니라 출토유물에 있어서도 다른 시기나 지방의 고분을 압도한다. 이와 같은 돌무지덧널무덤이 경주 이외의 지방에서 발견되는 예도 간혹 있으나 전형적인 것은 극히 드물다.

경주 돌무지덧널무덤의 조사는 1921년 최초로 신라 금관이 우연히 출토된 금관총의 발견 이래 본격화되어 일제강점기에 금령총(金鈴塚)식리총(飾履塚), 서봉총(瑞鳳塚) 등 수많은 고분이 발굴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호우총(壺杅塚)은령총(銀鈴塚) 발굴을 시작으로 중 · 소형분 중심으로 조사가 계속되어 우리나라 고고학 발굴의 중심이 되었다. 1970년대 들어 경주 고도(古都)개발과 함께 대형분인 천마총 · 황남대총이 발굴된 이후 대형분의 발굴은 자제되고 있다. 이와 같은 조사 · 연구를 통해 돌무지덧널무덤은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엽까지 신라의 지배계층이 경주에서 배타적으로 축조한 독특한 고분형식이며, 당시 신라의 최고지배자는 마립간(麻立干)으로 불렸으므로 ‘마립간시기의 묘제’라 평가되고 있다. 마립간시기 신라의 왕릉들은 금관과 금제 허리띠가 출토되는 경주 평지고분군의 대형분 가운데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돌무지덧널무덤의 기원에 대해서는 종래 북방아시아의 고분이나 고구려 돌무지무덤〔積石塚〕과 연관시켜 보기도 하였으나 앞 시기 덧널무덤으로부터 발전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경주 돌무지덧널무덤의 고총문화는 지방으로도 급속히 파급되어 가야산 이남 낙동강 이서의 가야권역을 제외한 전 영남지방과 동해안으로 강원도 영동의 강릉지역까지 곳곳에 고총들이 밀집하여 대고분군들이 형성되었다. 가까이는 양산 북정리고분군, 부산 연산동고분군, 경산 임당동고분군, 대구 달성고분군과 불로동고분군, 멀리는 창녕 교동고분군, 성주 성산동고분군, 상주 병성동고분군, 의성 탑리고분군, 안동 조탑동고분군, 삼척 갈야산고분군, 강릉 초당동고분군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신라식 고총의 분포지는 신라의 직접 또는 간접지배를 받은 신라의 영역으로 판단된다.

다만 신라 전기의 이 지방 고분군들은 산 능선과 경사면에 위치하고, 매장주체부는 앞 시기 덧널무덤으로부터 구덩식 돌덧널무덤으로 전환되었으며, 이어서 굴식〔橫穴式〕고분의 장법을 받아들여 한 무덤덧널〔墓槨〕에 추가장(追加葬)을 가능하게 한 앞트기식 돌덧널무덤도 발생하여 함께 축조되어 경주와는 다른 점이 있다. 또한, 지역에 따라 덧널무덤으로부터 구덩식 돌덧널무덤이나 앞트기식 돌덧널무덤으로의 전환 시기가 각기 다르고 돌덧널의 축조 석재나 기법, 또는 부곽의 배치상태 등 세부적으로 차이가 있어 각 지역 고분의 매장주체부 구조는 그 축조집단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이와 같이 매장주체부에서는 지역마다 각기 특색을 나타내고 있지만, 외형상 경주고분과 같은 모양으로 고총화되고, 특히 관모(冠帽), 허리띠, 귀걸이와 같은 복식품(服飾品)을 비롯하여 마구 · 무기 등 부장유물이 경주와 같고 토기도 신라토기가 부장되어 신라의 지방고분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고분규모와 부장품의 질과 양에서 경주고분과는 일정한 격차를 유지하고 있어 그 정치적 관계를 알 수 있다.

6세기 전반기 중에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는 더 이상 돌무지덧널무덤이 축조되지 않고 돌방흙무덤으로 중심 묘제가 교체되면서 신라의 고분문화는 큰 변동을 맞이하며 후기로 들어간다. 돌방흙무덤은 추가장이 가능하도록 내부로 드나들 수 있는 연도(羨道)가 달린 굴식 돌방〔橫穴式石室〕을 주체부로 설치하고 그 위에 원형으로 봉토를 쌓은 것이다. 경주 시내의 평지고분군에도 돌무지덧널무덤들 사이에 섞여 일부 존재하나 대부분은 경주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지에 고분군을 형성하여 분포하고 있다. 돌방은 대체로 지상에 설치되었으며 깬돌로 평면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으로 벽을 쌓았고 직사각형은 넓은 판석 1∼2매를 덮어 평천정으로, 정사각형은 벽의 상부를 안으로 좁혀가며 쌓아 궁륭상(穹窿狀) 천정으로 만들었다. 연도는 보통 돌방의 남쪽 벽에 달려 있는데, 남벽 가운데에 있는 것, 동벽 쪽에 치우친 것, 서벽 쪽에 치우친 것 등이 있으며, 특히 서벽 쪽에 치우친 것이 많이 나타나는 것이 신라 돌방무덤의 특징이다. 돌방 내부에는 높은 시상(屍床)을 설치한 것이 일반적이며, 시상 위에는 돌로 만든 머리받침〔頭枕〕과 발받침〔足座〕이 놓여 있는 예가 많아 나무널을 사용하지 않고 시신을 직접 안치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신라의 돌방무덤은 고구려 돌방흙무덤에서 유래된 것으로 판단되며, 신라의 고분문화 전기에도 지방고분 가운데 일부 존재하였던 것인데, 6세기 전반기에 신라의 최고 지배층이 이를 받아들여 경주를 중심으로 널리 축조하게 된 것이다. 경주에서 이와 같은 묘제의 교체 시기는 율령의 반포, 불교의 공인 등에서 알 수 있는 신라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맞물려 있으며, 돌방무덤이 축조되면서 신라고분은 박장화(薄葬化) 되어 고분 규모도 축소되고 부장품도 극히 간소화되어 대체로 무덤 내부에서 제사에 사용된 토기들만 출토된다. 신라 후기에는 굴식 돌방무덤과 함께 경주에서 앞트기식 돌덧널무덤도 활발하게 축조되었는데, 앞트기식 돌덧널무덤은 굴식 돌방무덤에 비해 규모도 작고 내부시설도 간소하여 위계상 차이를 드러낸다. 또 불교의 공인에 따라 화장묘(火葬墓)도 발생하여 활발하게 조영되었다. 한편, 신라 고분문화 후기가 되면 신라 왕릉들의 입지도 시내 평지 고분군에 밀집 분포된 전기와 달리 산지로 옮겨가 개별적으로 독립 배치되어 달라진 왕권의 위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경주 무열왕릉의 뒤쪽에는 4개의 규모가 큰 고분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고, 이들은 태종무열왕의 직계 조상인 신라 중고기(中古期)의 왕릉들로 판단되는데 이들의 조성 시기가 각 왕들의 사후인지는 알 수 없다.

경주에서 굴식 돌방을 내부 주체로 한 왕릉과 귀족들의 무덤은 통일신라 말까지 계속 축조되었는데, 8세기 이후 왕릉들 중에는 판석으로 호석을 둘러 방위에 맞추어 12지상을 새기고, 그 밖으로 돌난간을 세워 회랑을 돌려 화려하게 장식한 것들이 생겨났다. 왕릉 앞으로 혼유석, 돌사자와 문인석, 무인석, 귀부(龜趺) 위에 비석을 배치하여 능역을 조성한 것도 있는데, 가장 잘 정비된 신라의 능묘제도를 보여주는 것은 신라 제38대 원성왕릉으로 추정되는 괘릉(掛陵)이다. 왕릉들보다는 규모가 작은 경주 황성동고분용강동고분에서는 사람과 동물 형상으로 만들어 돌방 내부에 배치한 도용(陶俑)이 발견되었고, 또 용강동 돌방무덤에서는 돌방 내부에 방위를 따라 배치한 청동 12지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예들은 신라가 삼국통일 후 중국의 매장 습속을 받아들인 과정을 보여준다. 경주 구정동에는 12지상이 배치된 판석조 호석을 정사각형에 가깝게 축조하여 고분의 평면이 사각형을 이루는 방형분이 존재하는데, 왕릉을 비롯하여 모두 원형인 신라 돌방무덤과는 다른 유일하고 독특한 예이다.

신라의 후기 고분문화는 지방으로도 급속히 확산돼갔다. 원래의 신라 영토였던 낙동강 이동의 영남지방은 물론, 6세기 중엽 신라의 가야 병합, 한강 유역 점령과 원산만에 이르는 동해안지방 진출에 따라 신라가 새로 차지한 지역에는 수많은 신라고분군이 형성되었다. 옛 가야지역인 합천 삼가고분군, 그리고 남한강 상류의 충주 누암리고분군 · 하구암리고분군과 중류의 여주 매룡리고분군이 대표적인데, 신라 후기 최대의 지방 고분군이라 할 수 있는 충주 누암리고분군에는 굴식 돌방무덤이, 경기도 최대의 신라고분군인 여주 매룡리고분군에는 앞트기식 돌덧널무덤이 주로 축조되어 위상을 달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신라의 지방고분에서는 단각고배(短脚高杯)와 부가구연장경호(附加口緣長頸壺)라 불리는 6세기 후반기의 특징적인 신라토기가 출토되는 공통점이 있다.

신라의 고분문화 후기에도 이와 같이 6세기 말∼7세기 초까지는 수도인 경주는 물론 지방에서도 지상에 상당한 규모의 봉토를 가진 고분들이 대고분군을 형성하며 축조되었으나 7세기 전반기부터 지방에서는 고분이 급속히 쇠퇴해갔다. 이후 신라의 지방고분은 소경(小京) 등 행정치소를 중심으로 규모가 작은 돌덧널무덤 중심의 소규모 군집분(群集墳) 형태로 변모하였다. 이 지방 고분들에서도 대개 관료들이 착용한 것으로 보이는 당식(唐式) 과대(銙帶), 즉 허리띠가 많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지방 관인(官人)들을 중심으로 신라 지방고분의 명맥을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8세기 후반 이후가 되면 이마저도 찾아보기 어렵고, 극히 드물게 소형 돌덧널 3∼4기, 많아야 10기 미만의 군집분이 발견되거나 간혹 아주 소형의 돌덧널이 단독으로 존재할 뿐이다. 즉, 고분문화 상에서 통일신라 후기는 지방고분의 소멸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신라의 지방지배체제 와해, 선종불교의 유행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의의와 평가

신라고분은 신라국가의 성장 · 발전과정과 함께 변화되었다. 경주의 신라고분은 신라의 최고 지배자 칭호가 이사금 · 마립간 · 왕의 순서로 바뀌는 것과 발맞추어 묘제가 덧널무덤→돌무지덧널무덤→굴식 돌방무덤, 앞트기식 돌덧널무덤으로 전환되는 것처럼 신라의 정치적 성장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지방의 신라고분은 신라의 영역 확장에 따라 그 분포지가 넓어져 갔고, 신라의 지방 지배 방식이나 제도의 변화에 따라 고분의 구조와 고분군의 형상이 달라졌다. 이와 같이 신라고분은 신라국가의 성쇠와 관련된 당시의 온갖 정보를 담고 있어 신라사는 물론 한국고대사 연구의 기본자료가 되며, 금관을 비롯하여 신라고분에서 출토되는 화려한 유물은 한국 고대문화의 위상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참고문헌

「고신라(古新羅)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의 변천과 편년」(최병현, 『한국고고학보』 10·11, 1981)
『삼국시대분구묘(墳丘墓)연구』(강인구, 영남대학교출판부, 1984)
「삼국유사와 신라왕릉」(강인구, 『삼국유사의 종합적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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