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연산동 고분군은 부산광역시 연제구에 있는 삼국시대 구덩식돌덧널무덤·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이다. 이 고분은 연산동 일대 지배자의 집단분묘로 10기의 대형고분과 많은 소형 돌덧널무덤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형고분은 5세기 후반부터 7세기까지 순차적으로 만들어졌다. 매장시설은 깬돌로 네 벽을 쌓고 뚜껑 돌을 덮은 구덩식돌덧널무덤과 ‘일(日)’자형의 으뜸·딸린덧널식돌덧널무덤 등이 있다. 이 무덤군에서 출토된 쇠판갑옷·투구·갑옷비늘 등 철기류를 통해 이 지역 지배자가 군사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신라에 복속된 정치체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72년 6월 26일에 부산광역시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2017년 6월 30일 사적으로 승격되었다.
지형상으로 보면 해발 427m의 황령산으로부터 동래구의 좁은 곡저면을 향해 뻗어나온 능선 중 한 지맥에 형성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쇠판갑옷[鐵製短甲] · 투구[胄] · 갑옷비늘 · 관모(冠帽) 및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과 같은 철기류들과 각종 옥류(玉類) 등이 출토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으며 이후 이 고분군이 연산동 일대 지배자의 집단분묘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미 심하게 도굴당한 채 방치되어 왔다. 고분의 분포상태로 보면 10기의 대형고분이 능선을 따라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그 주위로는 무수히 많은 소형의 돌덧널무덤[石槨墓]들이 분포한다.
연산동고분군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10기의 대형고분은 구릉 아래에서부터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다. 1987년 이 고분군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 신라대학교에서 가운데에 위치한 제4호분을 발굴하였고, 경성대학교에서 제8호분을 조사하였다.
1999년에는 터널공사로 인한 구제발굴이 능선 측면 하단부에서 이루어져 수 기의 소형 구덩식돌덧널[竪穴式石槨]이 발굴된 바 있다. 대부분 높이 2m, 너비 10m 정도의 원형봉분이 남아 있고, 구조는 깬돌으로 네 벽을 쌓은 뒤 뚜껑돌을 덮은 직사각형의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으로 추정된다. 고분은 구릉 아래로부터 순차적으로 축조되었으리라 추정되는데 대형분들은 5세기 후반에서 7세기경까지 조영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발굴조사되어 성격이 규명된 대형분인 제4호분은 봉분의 직경이 12.7m 가량 되는 반구형이며 매장시설은 ‘일(日)’자형으로 배치된 으뜸 · 딸린덧널식[主副槨式] 돌덧널무덤이다. 전체 무덤구덩이는 길이 10.5m, 너비 4m, 깊이 2.5m 가량 된다. 으뜸덧널은 길이 4.5m, 폭 2m, 딸린덧널은 길이 3.3m, 폭 1.7m이며 돌덧널은 무덤구덩이의 벽에 붙여 깬돌로 축조하였다. 완전히 도굴되었기 때문에 유물들은 모두 제 위치를 잃어버린 채 파편 상태로 몇 점이 수습되었을 뿐이다.
경성대학교에서 조사한 제8호분은 제4호분보다 봉분과 매장시설 모두 약간 큰 편이다. 주목되는 사실은 무덤구덩이 내에 돌덧널을 축조할 때 내부에 폭 약 50m 가량의 둑을 쌓아 형식적으로 으뜸덧널과 딸린덧널을 따로 축조했다는 점이다.
한편 2007년에는 이 고분군의 서쪽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어 덧널무덤[木槨墓] · 구덩식돌덧널무덤 · 독무덤[甕棺墓] 등 모두 17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5세기까지도 낙동강 이동지역에서는 ‘일(日)’자형의 으뜸 · 딸린덧널식 고분이 축조되나 점차 6세기에 접어들면서 단독덧널식으로 변하게 되는데 연산동 제8호분은 이러한 과도기적 양상을 반영하고 있다.
연산동고분군의 축조시기는 현재 알려진 유물들의 형식으로 보아 인접한 복천동고분군보다 약간 늦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고분군에서는 일찍부터 쇠판갑옷이 출토되어 당시 이 지역의 지배자층이 군사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그러나 토기를 비롯한 유물 양식에서는 신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으므로 어느 정도 신라에 복속된 정치체였다고 추정된다. 이 고분군은 부산지방의 여러 고분군 중에서 지하 유구와 외부 높은 봉분이 완전하게 남아 있는 유일한 고분군으로서 이 지방의 묘제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