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구 ()

동래구청
동래구청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부산광역시 북동쪽에 위치한 구.
정의
부산광역시 북동쪽에 위치한 구.
개관

부산광역시 동래구는 동쪽으로 해운대, 서쪽으로 북구, 남쪽으로 연제구, 북쪽으로 금정구에 접하고 있다. 위치는 동경 129°02'∼129°07', 북위 35°10'∼35°13'이며, 면적은 16.63㎢, 인구는 27만 2837명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3개 행정동(9개 법정동)이 있으며, 구청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에 있다.

자연환경

서쪽은 금정산맥이 북동에서 남서로 연하여 뻗어 있고, 동쪽은 장산의 서쪽 말단부에 위치하고 있다. 수영강의 지류인 온천천이 북쪽에서 남동쪽으로 흐르며, 하천 연변의 침식분지에 시가지가 발달해 있어 전체적으로 볼 때 남북으로 열린 분지지형을 이룬다.

중앙부에 위치한 마안산(馬鞍山)은 전형적인 도심 속의 산지이다. 2개의 종순형 산정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면은 완만하게 시가지로 뻗어 내려간다. 지명은 산의 모습이 말의 안장을 닮았다는 데서 비롯되었며, 동래의 진산인 윤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등성이의 봉우리로서 옛 동래읍의 주산에 해당된다. 주능선을 따라 동래읍성이 자리 잡고 있으며 산정일대는 이 고장의 사적공원인 마안산 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대포산과 유방산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대포산이란 조선 후기 이 산에 별포군 2백명이 군무하는 대포를 설치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유방산이란 2개의 산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의 모습이 여성의 젖가슴을 닮았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수안동에는 과거 농주산(弄珠山)이 있던 터가 남아 있다. 『동래부읍지』(1832)에는, “농주산은 안령에서 이어져 온 산으로 성비가 축조되어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풍수 형국에서 농주산은 마안산의 안산(案山)격에 해당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기록된 성비는 내주축성비를 말하고 있는데, 원래 농주산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온천동의 금강공원 내 독진대아문 뒤쪽으로 옮겨졌다. 농주산은 지금의 동래경찰서 자리이며, 일제강점기 시가지계획과 전차길 개설로 깎여 평지가 되었다.

구의 서쪽인 사직동에는 금용산(金湧山)이 있어 연제구와 부산진의 경계를 이룬다. 지명은 쇠미산의 한자식 지명으로 산에 쇠물이 많이 나왔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금정산맥의 지맥으로 북쪽으로는 금정봉에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화지산과 연결된다. 전형적인 노년산지로 사면이 완만하고 산정은 종순형이다.

이외에 칠산동에는 망월산이 있다. 동래읍성의 동장대가 있는 산으로 마안산과 이어져 있다. 옥봉산(玉峰山)은 명장동에 있는 산으로 해운대구와 금정구와의 경계를 이룬다. 또한 마안산과 망월산 사이에는 인생문고개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동래성 동장대를 따라 옛 북장대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동래성의 한 성터이다. 임진왜란 때의 동래부전투를 그린 「동래부순절도」에서 왜군이 동래성에 진입하는 길목이 인생문고개에 해당한다.

명륜동에는 시싯골(일명 새시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지금의 동해중학교 뒤쪽에 자리 잡은 해발 105m의 구릉성산지 골짜기의 옛 지명이다. 수곡·시시골·시실골 등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본래 돌감나무가 울창한 숲에서 유래되었다.

북동부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는 온천천은 옛 동래지방의 중심하천으로 동래천이라 불리기도 했다. 길이 6.96㎞, 너비 약 60∼90m 이다. 금정산의 고당봉과 계명봉에서 발원하여 금정구와 동래구를 관류하면서 거제천과 같은 소지류를 합류하면서 안락동 수영하수처리장 부근에서 수영강에 유입된다. 동래읍성을 감싸 돌아 풍수 형국에서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던 하천이었다. 사직동에는 홍골도랑이 흐른다. 금정봉에서 발원하는 사직천의 상류계곡으로 사직2동 지금의 주공아파트 자리로 관류하던 계류천이었다.

동래구는 내륙에 위치하고 있으나 남해로부터 멀지 않은 거리에 있어 온대 해양성 기후를 보이고 있다. 북서쪽을 달리고 있는 금정산맥이 겨울철의 북서풍을 막아 주어 비교적 온화하다. 연평균 기온은 14.9°C이고, 8월 평균기온 25.2°C, 1월 평균기온 2.8°C로 비교적 온화한 편이며, 연중 강수량은 1386.5㎜이다. 상대습도는 59.9%, 평균풍속은 3.1㎧이다.

역사

온천동 금강공원·금사동·사직동 등의 여러 곳에서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동래 지역에 취락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동래의 조개더미에서 발견된 쇠를 제련하는 야철터는 이 지방이 선사시대 철 생산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삼국시대 동래 지역의 명칭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삼국사기』 권34, 지리지에 의하면, “동래군은 본래 거칠산국이었는데, 경덕왕 때 동래군으로 고쳐 지금도 이를 따르고 있다. 영현이 둘이다”라고 하고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3, 동래현조에 의하면, “옛 장산국이다(혹은 내산국이라고도 한다). 신라가 점유하여 거칠산군을 두었는데,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라고 하고 있다. 이들 두 자료에 따르면 동래의 옛 국명은 거칠산국·내산국·장산국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조에는 삼한시대 24개의 국명 중에 ‘독로국’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동래라는 설도 있다. 동래 지역의 옛 명칭은 거칠산국·장산국·내산국 등으로 달리 불리어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동래는 ‘독로’라는 음에서 독로-동네-동래로 음전 되어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757년(경덕왕 16) 지방행정제도를 개편할 때 지방명을 모두 중국식 한자음으로 고침에 따라 동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거칠산군 또는 거칠산국은 ‘거친뫼’, 황령산에서 따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동래라 함은 동쪽(동해)의 내산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 또는 삼신산의 약칭이라는 설도 있다.

『고려사』 권57, 지리2 울주조에 의하면, “속현이 둘이 있는데, 동래현과 헌양현이다”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사』 권57, 지리2 동래현조에 의하면, “1018년(현종 9)에 본주(울주)에 소속시켰으며 후에 현령을 두었다. 이 현에는 온천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동래는 고려 초기 군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으로 강등되었다. 그 후 현령을 두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고려 전기에는 동래를 본관으로 하는 동래정씨 일족이 중앙정계에 진출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남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발호하는 왜구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해 동래읍성이 축조되었다.

조선시대 동래는 1397년(태조 6)에 일본과 대치하는 군사상의 요충지로 보고 이곳에 진을 설치하게 되자, 진의 장수인 병마사가 동래현의 행정관인 판현사를 겸임하였으며, 1423년 (세종 5)에는 병마사를 4품관인 첨절제사로 개칭하여 판현사를 겸임하였다. 1440년에는 부산포에 일본인의 왕래가 빈번하게 이루어지자 이에 대비하기 위해 진을 속현인 동평현으로 옮겼다. 이듬해 다시 환진하게 되었는데, 그 후 얼마 가지 않아 판현사를 현령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조선 전기 동래는 속현인 동평현을, 부곡인 고지도와 조정을, 향인 생천을 각각 거느리고 있었다. 그 후 1547년(명종 2)에는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당상의 문무관이 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 일본의 침략으로 동래가 점령되자 다시 현으로 강등되어 현령이 파견되었다. 1599년에는 명나라 장수들의 접대를 위하여 다시 도호부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당상의 무관을 부사로 임명하고, 부사 아래는 판관을 두었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사시설의 정비와 방어태세가 한층 더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1655년(효종 6)에는 경상좌병영 관할 하의 경주진관에 속해 있던 여러 진 중의 하나인 동래진을 경주진관에서 떼어내 독진이 설치되었으며, 이로써 야산군과 기장현 소속의 군사까지도 통합하여 지휘할 수 있게 하였다. 1690년(숙종 16)에는 부사가 종2품의 방어사를 겸임하게 되었으나, 2년 후 폐지되었다.

동래 지역은 『동래부지』(1740)에 의하면 7개 면(읍내면·동면·남촌면·동평면·사천면·서면·북면) 82리 19동의 체제로 행정구역이 나누어져 있다. 이후 9면체제로 변화되어『영남읍지』(1895)에는 9면(읍내면·동면·북면·서면·남촌면·동평면·부산면·사상면·사하면) 131동리로, 『동래부읍지』(1899)에는 8면(읍내면·동면·북면·서면·남촌면·동평면·부산면·사천면) 101동리로, 『경상도동래군가호안』(1904)에는 12면(읍내면·북면·서상면·서하면·사상면·사하면·동평면·남하면·남상면·동하면·동상면) 154동리로 변화되었다.

과거 부산의 중심부였던 동래 지역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부산의 외곽중심지로 그 지위가 전락되었다. 일제강점 초기 이곳에 있었던 읍성을 중심으로 한 관아시설이 철거되어 도시 경관이 크게 변모하였고, 종래의 객사 자리는 내성초등학교를 거쳐 동래공설시장이 되었다. 또한 이곳 주변에서 열리던 동래장은 주변부로 밀려나게 되었으며, 1930년대 시구도로개정사업으로 성벽이 철거되었으며 격자상의 가로망이 만들어졌다.

동래 지역은 1919년 부산 일대지역의 3·1운동의 중심지였으며,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이 매우 강했던 곳이다. 부산부가 설치되자 동래는 부산부의 속하였으며 1914년 군·면통폐합에 따라 이전 동래부 일부와 기장군을 합하여 동래군을 만들어 행정적으로 경상남도의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었다. 당시에는 1읍(동래읍) 11면(북면·남면·사상면·사하면·구포면·서면·기장면·철마면·정관면·일광면·장안면) 128리 7동으로 이루어졌다. 그 후 계속적으로 동래군 영역은 축소되었다. 이후 1936년에는 서면과 암남리, 1942년에는 동래읍의 전부와 사하면 등의 지역이 부산부로 편입되었다.

광복 후 부산부가 부산시로 개칭되었고, 1957년 1월부터 구제가 실시되어 부산시 동래구로 편제되었다. 그 후 직할시 승격 당시 34개 동이었으나 계속적으로 행정동이 증가하자, 1980년에는 일부지역이 해운대구로 분구되어 나갔다. 1988년에는 금정구가 분구되어 나갔고, 그리고 1995년 3월에는 연산동과 거제동이 연제구로 분구되었다.

과거 동래읍성이 있던 곳은 단독주택이 형성되었으며 온천동 일대에는 고급아파트단지가 조성되었다. 사직동과 안락동 일대는 신흥주택지역으로 개발되어 현재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고 있다. 동래 지역은 현재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고 도시산업도로가 이곳을 지나면서 부산의 부도심 역할을 하고 있다. 법정동으로는 수안(壽安)·낙민(樂民)·복천(福泉)·칠산(漆山)·명륜(明倫)·온천(溫泉)·사직(社稷)·안락(安樂)·명장(鳴藏) 등 9개 동이 있다.

유물·유적

칠산동의 학소대에는 대한불교 조계종파인 법륜사(法輪寺)가 입지하고 있으며, 낙민동 일대의 대규모 패총지는 1970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 패총은 원래 낙민동·수안동에 걸친 낮은 구릉지대의 서남 경사면 일대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던 대규모 유적이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파괴·소멸되었고 구릉지대의 일부만 보존되고 있다. 유적의 앞쪽에는 온천천이 흐르고 있는데, 원래는 수영강의 상류에 해당하며 현재는 해안선에서 약 6㎞ 정도 떨어져 있지만 당시는 유적의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패총은 발굴된 유물로 보아 과거 동래지방에 정치적 집단이 출현하는 전환기에 형성된 생활유적으로 보인다.

복천동에는 고분군이 198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 고분군이 조영되어 있는 구릉은 가장 높은 곳이 표고 62.5m이고,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가면서 점차 완만하게 낮아지고 있다. 구릉 위에 축조되어 있는 이 고분군은 1969년 주택공사로 고분군의 일부가 파괴되면서 세상에 알려진 이후 지속적인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다. 발굴 결과 경주지역과 같은 화려한 금은제 유물은 많지 않으나 철제 유물이 많은 것이 특징이었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무구류가 많았다.

복천동 고분군에서 확인된 묘제는 목곽묘·수혈식석곽묘·횡구식석실묘 등이다. 이 묘제 가운데 목곽묘와 수혈식석곽묘는 그 규모에 의해 다시 각각 대형분과 각기 독립된 주·부곽으로 이루어졌고, 소형분은 부곽이 없는 단독분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사직동에 소재한 고분군은 1964년 인근 주민에 의해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발굴결과 석관은 4벽과 개석이 각각 1매의 판석이며 바닥에는 작은 자갈돌이 깔려 있었다. 무문토기는 북벽 가까이에 대소 2점이 놓여 있었지만 작은 호형토기는 깨어져 없어졌고 큰 호형토기는 복원되었다.

동래구 충렬사에는 「동래부순절도」와 「부산진순절도」가 소장되어 있었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성에서 벌어진 전투와 4월 15일 동래성전투의 상황을 상세하게 그린 회화이다. 당시 조선군이 장렬하게 전사하는 모습들이 실감 있게 그려져 있다. 1760년(영조 36) 화공 변박(卞璞)이 그린 역사기록도로 기법과 양식, 내용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동래성과 부산진성의 구조, 규모, 형태, 건물배치 등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현재는 태릉의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져 있으며, 각각 1963년 국가지정 보물로 지정되었다.

한편 송상현 종가 소장 「동래부순절도」는 1658년(효종 9) 당시 동래부사였던 민정중이 동래부전투의 상황에 대해 3폭을 그리게 하여 조정과 충렬사 그리고 송공의 종가에 각각 1폭씩 보내어 보관되어 오던 것이다. 현재는 청주 송상현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다.

동래구 온천동에서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동래야류’는 본래의 명칭이 ‘들놀음’이다. 한자표기로 야유(野遊)이나 속음화하여 야류라 부르고 있다. 동래야류는 14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기영회의 후원으로 전승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경 중단되었던 것을, 광복 후 복원하여 1967년 12월 21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전통민속춤인 동래학춤은 동래구 온천동에서 고려시대부터 전래되어 오고 있는 전통 무용이며,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동래학춤은 토속적 민속춤으로 궁중학춤과는 분장, 장단, 표현방식에 있어 현격한 차이가 있다. 동래에는 예전부터 교방이 있어, 한량들이 많았다는 점과 학과 친밀감이 있었다는 지리적 조건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학춤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 가야금 산조는 1989년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산조로 약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부산의 가야금산조는 강태홍류이다. 강태홍류는 가락을 엇박의 묘를 살려 쓰는 한편, 개방현 보다는 박아서 내는 소리와 아랫줄을 눌러내어 짜는 소리를 유달리 많이 사용함으로써, 박력이 있고 남성적이면서도 섬세한 면을 겸하고 있다. 이외에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강백천류대금산조가 있다.

1972년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된 내주축성비는 원래 동래성 남문 밖에 세워져 있었던 것을 일제강점기 현재의 금강공원 안 독진대아문 위쪽으로 옮겨 세운 비석으로 현재는 시립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1731년(영조 7) 동래부사 정언섭이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동래읍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축성의 내력을 적어 1735년(영조 11)에 건립한 것으로, 석재는 화강암으로 높이 270㎝, 넓이 107㎝의 크기로 비두는 쌍으로 된 이수가 여의주를 물고 있고, 비대에는 연꽃무늬가 양각되어 있으며, 그 수법은 소박하다.

복천동에 소재한 송공단은 1972년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 송공단은 1742년(영조 18)에 동래부사 김석일이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충렬공 송상현이 순절한 정원루의 위치에 설치한 제단으로 송상현을 비롯한 순절제인을 모시고 있다. 이 단이 세워지기 전에는 동래읍성의 남문 밖에 있었던 농주산에 순사한 사람들의 전망제단이 있었다. 이 전망제단은 1742년(영조 18)에 송공단이 세워지면서 이곳으로 이안되었다. 송공단은 동서남북으로 모두 4단으로 되어있는데 북단에는 송상현·조영규·노개방을 모시고, 동단에는 유생 문덕겸·비장 송봉수와 김희수·겸인 신여로, 서단에는 노개방의 부인과 송상현의 첩 김섬과 정발의 첩 애향을 모셨다. 매년 음력 4월 14일 동래 기영회에서 송공단의 제사를 올린다.

한편 금강공원에는 비석터가 있다. 1974년 동래의총이 이곳으로 옮겨진 뒤 비석을 한적한 자리로 옮겨두자는 뜻으로 조성되었으며, 현재는 크고 작은 비석 19기가 모여있다. 수안동에 소재한 동헌 안에는 부사로 재임한 동안의 부사 선정비가 여러 기 있다.

동래 지역에는 조선시대 관방유적이 풍부하다. 수안동에는 동래부 사청인 동헌(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이 있다. 정면 도리방향 7칸, 측면 보방향 4칸으로 되어있으며 현재 남아있는 동래부의 동헌은 1711년(숙종 37) 당시의 부사 이정신에 의해 충신당으로 이름지어졌다. 서익랑은 파괴되었고, 망미루와 독진대아문은 현재의 온천동 금강공원 안에 이건되었다. 아헌인 충산당만이 본래의 위치에 보존되어 있으나 부지는 축소되고 원래 떨어져 있었던 건물인 동익랑이 충신당 가까이에 이건 되어 있다. 부산지방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단일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유일한 동헌으로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관아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는 문화재이다.

수안동의 객사 터에는 시장이 들어서 있다.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전패를 모시어 두고 초하루·보름에 관원들이 궁궐을 향해 배례를 하고, 중앙관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공간으로 중앙권력을 상징하는 건축 경관이다. 동래부사청인 동헌의 서쪽은 현재 동래공설시장 자리로, 일제강점 이후 이 객사는 내성초등학교 교사로 사용되었다가 공설시장을 개설할 때 헐리게 되었다.

온천동 금강공원에 소재한 동래부 동헌 외대문(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은 원래 동헌의 출입문이었다. 정면 3칸, 측간 1칸으로 되어 있다. 본래는 수안동에 있는 동래부 동헌 앞 대문으로 망미루 뒤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을 일제강점기 시가지 정리란 이름 아래 금강공원 송림으로 옮겨졌다. 1655년(효종 6)에 동래부의 군사권이 경상좌병영 휘하 경주진영에서 독립하여 동래독진이 되었음을 알리는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衛門)’이란 현판이 정면의 문 위에 걸려 있다. 그 아래 양쪽 기둥에는 ‘진변병마절제영(鎭邊兵馬節制營)’, 오른쪽에는 ‘교린연향선위사(交隣宴餉宣慰司)’란 현판이 걸려 있다. 진변병마절제영이란 이곳 동래부는 국경을 지키는 사명을 지닌 병마절제사의 진영이란 말이고, 교린연향선위사란 일본과의 외교로 일본 사신을 접대하는 관청이란 뜻이다.

안락동에는 충렬공 송상현을 모신 사당이 있는 충렬사(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가 있다. 충렬사는 1605년(선조 38) 당시의 동래부사 윤훤이 동래읍성 남문 밖 농주산에 송공의 위패를 모신 송공사를 지어 매년 제사를 지낸 것이 시초가 되었다. 그 후 1642년(인조 2년)에 선위사 이민영의 청으로 충렬사라는 사액이 내려짐에 따라 송공사는 충렬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1652년(효종 3)에는 현재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1978년에 현재의 규모로 대대적으로 정화된 후, 부산지방에서 순절한 88위의 선열의 위패를 직책 또는 증직의 순서에 따라 모시게 되었다. 현재는 매년 봄 2월과 가을 8월 동래 유림에서 제향을 올리고, 5월 25일에는 부산시민의 정성이 모아진 제향이 올려지고 있다.

충렬사에 소재한 군관청(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은 원래 동래읍성 내에 있었으나 유지·보수 문제로 이건된 것이다. 동래부청사 건물의 하나로 군관의 집무소였다. 이 건물은 수안동의 장관청(부산시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과 함께 무청으로서 그 희소가치가 크다. 한편 마안산 능선에는 동래읍성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 북문 문루, 인생문 등이 복원되어 있다. 동래구 사직동에는 조선시대 동래부의 수령이 지역의 풍요와 안녕을 위해 제사를 올리던 사직단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 허물어져 현재는 주택가로 변하게 되었다.

온천동에는 1972년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고려5층석탑이 있었으나 2015년 경기도 이천시로 이전되면서 지정해제되었다. 2중 기단 위에 5층탑신을 올려놓은 전형적인 고려석탑이다. 이 탑은 원래 경상북도에 있던 것으로 중구 대청동 내에 있었던 것을 개인이 1957년경 현 위치로 이전한 것이다. 현재 하층기단과 제5층 옥개석이 없어지고, 기형의 상륜부를 최근 보충하였기 때문에 탑의 원형을 일부 상실하였다. 탑의 높이는 4.2m로서 약간 고준한 감이 있으나 안정감은 충분한 편이다. 하층기단이 없어져서 기단부의 원형은 알 수 없으나 상층기단의 갑석이 넓고 상면은 상당한 구배가 있다.

교육·문화

동래부는 조선시대 부산의 교육의 중심지였다. 명륜동에는 동래향교(부산광역시 기념물, 2013년 지정)가 있다. 동래향교는 1392년(태조 원년)에 국가의 교육진흥책에 따라 지방에 향교를 설립할 당시 설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동래성함락과 함께 불타버리고 왜란이 끝난 후인 1605년(선조 38)에 동래부사 홍준이 재건하였다. 원래 향교는 읍성의 동문 밖으로 2리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1704년(숙종 30년)에 유생들의 소청에 의하여 1705년 동래부의 동쪽 수백 보 거리에 있던 관노산 밑에 이전되었다가이후 중성과 학소대 부근, 그리고 인생문 부근 등으로 여러 차례 옮겨지게 되었으며, 1813년(순조 13) 현재의 위치인 명륜동으로 옮겨졌다. 건축물을 보면 반화루는 정면 3각과 측면 2간의 2층 누각으로서 아래층은 명륜당과 동무·서무로 들어가는 삼문으로 되어 있다. 동재·서재는 초익공 삼량 맞배지붕이며 개구부의 벽체는 판자로 되어 있다. 가장 중심 건물인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겹처마 건물이다.

안락동에는 안락서원이 있다. 1652년(효종 3) 남문 앞에 있던 충렬사 사당을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강당과 동·서재를 짓고, 선비들을 받아들여 강학을 하게 되었다. 1766년(영조 42)에는 강당인 소줄당이 보수되고 그후에도 계속 보수가 거듭되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강행되었을 때는 안락서원은 임진왜란 때의 충신 열사를 봉안하고 있던 사액서원이었기 때문에 철폐되지 않고 선열의 얼을 기리면서 국난극복에 대한 교육의 장으로 명맥을 잇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과 함께 충렬사의 제향과 서원의 강학은 민족정기를 북돋게 한다는 이유로 방해를 받았다. 서원에서의 강학이 여의치 않게 되면서 서원은 폐지되고 말았다. 강당인 소췌당은 충렬사의 정화공사와 함께 충렬사 안에 복원되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22개교, 중학교 14개교, 고등학교 14개교가 있다.

명륜동에는 동래문화회관이 있다. 대공연장, 소공연장, 놀이마당, 전시실을 갖추고 있어 동래학춤, 동래지신밟기, 충렬사 제향 등 유·무형의 전통 문화를 계승·발전시키고 있다. 복천동에 소재한 시민도서관 동래분관은 일성관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이곳에는 서당이 있었는데 1919년 동래청년회가 인수하여 쓰다가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구민들이 뜻을 모아 문화 계몽운동과 청년 사회단체의 집회소도 겸할 수 있는 근대 회관을 짓기로 하고,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1933년 10월에 낙성식을 갖게 되었다. 이 도서관은 1968년 11월 20일 개관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명장동에는 1993년 개관한 명장도서관이 있다.

민속

동래 지역에서는 매년 대보름 지신밟기와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지신밟기는 상고시대부터 전국적으로 전승되어 온 안택축원의 제의적 민속이지만,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쇠퇴해가던 것을, 1970년에 복원 실시하여 1977년 12월 13일 부산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곳에서도 다른 지방과 같이, 음력 섣달 중에 악기, 의상, 도구 등을 준비하고, 이듬해 정월 초이사흘께부터 시작해 대보름 전에 마친다. 일제강점기 3·1운동이 있은 후 동래 사람들은 이 지방에 옛부터 있었던 민속놀이인 줄다리기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줄다리기에는 음력 대보름날 부산시를 동(좌천동에서 북쪽)과 서(수정동에서 남쪽)로 패를 갈라 2만 명 이상이 참가하였다. 1930년에 부활하여 3∼4년 간 계속하기도 했으나 그 이후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동래지방은 전통 민속인 동해안 별신굿의 중심이었다. 원래 내륙지방에도 있었으나 지금의 별신굿은 주로 해안지방의 어민들이 중심이 되어, 풍어와 어부들의 무사를 기원하는 목적으로 벌어졌다. 1978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동해안별신굿은 남·서해안 별신굿과 함께 전승되고 있는 무속이다. 동해안 별신굿의 무격은 직업적 세습무로서, 활동범위가 넓고 무가와 창이 뛰어나다. 이곳에는 마을의 풍요와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당산으로 명륜동 주산당, 삼성대 당산, 주산당, 명장동의 옥봉산 당산 등이 있다.

설화·민요

동래에는 전설과 관련된 여러 장소들이 있다. 명륜동에 소재한 관왕묘는 중국 촉한의 장군 관우를 모신 사당으로 지난날 관왕묘가 있었던 자리가 김장군이라는 아기장수가 태어난 집터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이는 인근의 삼성대의 전설과 관련이 있다. 삼성대는 이는 동래의 토성인 안·송·옥 등의 3성씨의 시조가 살았던 곳으로 어린 김장군이 태어난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인생문 고개란 ‘임진왜란 때 동래부 사람들이 이 곳에 있었던 성문을 통해 피난 간 사람은 모두 목숨을 건졌다’는 ‘사람을 살려낸 문의 자리‘라는 전설에서 비롯된다.

한편 사직동에는 ‘베틀굴’이라는 바위 지명이 있다. 이 지명은 임진왜란 때 이 동굴에서 여인네들이 모여 전장에 나간 낭군들의 군포를 짰다는 전설에서 비롯된다. 굴 안에는 왼쪽으로 작은 구멍이 있는데, 이는 사랑하는 남편을 보내고 군포를 짜며 외로움과 그리움을 달랠 길이 없어 비녀를 뽑아 바위에 꽂은 구멍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이 굴은 비녀굴이라고도 하였다.

「담바구타령」은 동래지방에서 담뱃대를 만들었기 때문에 생긴 노래로서 “구야구야 담바구야/ 너으나라 어떻길래/ 대한나라 나왔는냐/ 우리나라도 좋거니와/ 대한나라 유람나와/ 담배씨 한줌 가지고와서/ 건너편 밭대기/ 이리저리 숨어놓고/ 낮이면 찬냉수주고/ 밤이면 찬이슬맞혀/ 겉잎이 점점나타나서/ 속잎이 솟아나서/ 총각의 삼지 한삼지요/ 처자의 삼지 한삼지라/ 청동화로 백탄숯을/ 이글이글 피아놓고/ 소상반죽 열두마디/ 동래부죽 질기맞차/ 담배한대 묵고나니/ 목구멍안에 설안개치고/ 도한대를 묵고나니/ 백구밑에 요분이난다.”라는 가사가 전해진다.

산업·교통

동래 지역의 공업은 소규모 업체를 중심으로 섬유·의류, 조립금속·기계, 화학·고무 등의 업종이 발달했으나, 기존 업체가 계속 다른 지역으로 이전함으로써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상업기능으로 온천시장·동래시장·안락시장은 주택가 인접 상가로 발달하고 있다. 온천동 일대는 온천장을 중심으로 위락·소비 문화권이 형성되어 있으며, 허심청·동래관광호텔 등 온천욕 및 숙박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고, 대중음식점과 유흥업소가 몰려있다. 온천동에는 롯데백화점과 대형마트 등이 있어 대형 소매업이 발달해 있다.

동래 지역은 조선시대 부산 일대 교역의 중심지였다. 지금 동래시장이 있는 자리는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읍내장으로 매 2·7일 열리면서 좌수영장(5·10일), 부산장(4·9일), 독지장(1·6일), 하단장(5·10일)과 함께 동래 지역의 5일장 체계를 이루었다. 『임원경제지』를 통해서 거래되는 품목을 보면, 쌀, 콩, 메밀, 면포, 마포, 비단, 과어, 사어, 청어, 북어, 대구, 전복, 해삼, 김, 채소, 꿀, 유기, 자기 솥, 나무, 종이, 연죽, 돗자리, 소 등 곡물·직물·어류·식기·자리·종이·연죽류 등이 많이 거래되었다. 동래는 개항기부터 초량에 중심기능을 빼앗겼으나, 시장은 주변 농업지역에 서비스 기능을 제공하면서 꾸준히 존속할 수 있었다.

동래 지역의 교통은 지하철 1호선, 3호선, 4호선이 통과하며, 안락·동래·내성·미남 등의 교차로를 중심으로 중앙로를 비롯한 사통팔달의 도로망이 발달해 부산 교통의 요충지이다. 최근 산복도로가 개통되어 미남교차로와 금정구를 연결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관내를 흐르는 온천천에 여러 교량이 건설되어 있다.

동래구 수안동과 연제구 거제동을 잇는 세병교는 병기를 씻어서 거둔다는 뜻으로 전쟁이 끝나 평화를 기원한다는 의미이다. 다리이름은 동래성 남문의 익성 가운데 앞쪽 문이 세병문인 데서 유래한다. 오늘날의 세병교가 건설되기 전에는 광제교라는 돌다리가 있었다. 이섭교는 수안동에 있던 다리로 1694년(숙종 20)에 건설된 다리이다. 동래구 수안동에서 연제구 연산동으로 갈 때 건너야 하는 수영천에 놓인 다리로서 3개의 아치를 연결한 돌다리였다. 동래구 안락동과 해운대구 반여동 사이에 놓인 원동계는 길이는 98m로, 동래구-해운대를 잇는 충렬로 상의 중요한 교량으로서 옛날에는 여울다리 또는 시내그랑이라 불렀다. 이 다리의 북쪽에는 현재 도시고속도로 원동인터체인지가 자리 잡고 있으며, 남쪽에는 동해 남부선철도의 철교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관광

온천장을 비롯하여 관광유적이 풍부하다. 동래온천은 『고려사』 지리지 이후의 여러 사료에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동래부지』(1740)에서는 “열은 달걀을 익힐 만하고 병을 가진 자가 목욕을 하면 문득 낫고 신라시대에는 왕이 자주 행차했다. 벽돌 네 모서리에 구리기둥을 세웠는데 그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는 기록이 있다. 1766년(영조 42) 온정을 지키는 집과 대문을 세웠으며 이때 세워진 온정 개건비(부산시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4호)가 지금도 남아있다. 가까이 있는 용각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시영으로 온천수를 양수한 자리이다. 1992년 복원하였으며 음력 9월 9일에 용왕제례가 열리고 있다. 동래온천장이 온천으로서 본격적인 발전한 것은 1915년 부산진과 동래 사이 경편궤도가 설치되어 경편기차와 전차가 경편궤도를 겸용하고 부터이다. 그러나 그때의 전차는 동래가 종점이었는데 전차가 온천장까지 연장된 것은 1927년이었다. 현재 허심청, 녹천탕 등의 온천은 부산 시민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이용하는 명소이다. 온천장 인근의 금강공원에는 금정산성 남문으로 오르는 케이블카가 있어 등산객들과 시민들이 자주 이용한다.

동래의 전통음식으로는 동래파전이 있다. 동래파전은 해산물과 육지의 산물이 어우러져 독특한 맛을 내고 있다. 육지 산물로는 조선파와 미나리로 이들이 가장 향취를 돋울 때는 겨울을 지나 새순이 땅내음을 풍길 때이다. 과거에 동래파전이 봄 한철만 성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해산물로는 굴, 홍합 등을 이용한다.

특산물로 동래 담뱃대와 유기가 있다. 동래지방에는 일찍부터 담뱃대를 만드는 수공업이 성행하여 부산지방의 주체적 수공업의 대종을 이루었다. 옛날에는 연관이란 이름으로 불린 담뱃대가 있었는데, 언제부터 생산되었는지는 확인하기는 어렵다. 조선시대 울산 병영에는 무기제작창이 있었고, 이를 중심으로 연관이 많이 생산되었는데, 이곳에서 동래지방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추정한다면 대략 150년 정도 됐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담뱃대와 함께 동래의 명물로 손꼽혔던 것은 유기이다. 백동으로 만든 수저와 밥그릇은 동래의 것이 가장 모양이 좋았으며, 유기에 색깔과 무늬를 넣는 정교한 세공은 전국에서도 유명하였다.

전통적으로 계승되던 춤으로 동래고무가 있다. 연원은 고려시대 교방청 여기들에 의해 추어지던 무고에 있다. 고려 충렬왕 때의 시중 이혼이 귀양살이를 하던 중, 바다에 떠내려 온 큰 뗏목으로 북을 만들어 치고, 그 장단에 맞춰 춤을 춘 것에서 유래되었다. 1920년대에 권번이 창설되면서 광복 직후까지 전승되다가 중단되었던 것을 1986년에 복원해 1993년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었다.

관내에서는 매년 3월 3·1절 축제와 10월 동래 읍성 축제가 개최된다. 동래읍성 축제는 동래읍성 북문광장, 문화회관, 온천천 등 동래 일원에서 진행되며 동래부사행렬, 영화제, 동래성전투재현, 동래장터운영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복천동에는 시립박물관 복천동분관이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가야박물관 중 하나이다. 동래고분 일대의 발굴이 완료되어 1981년 사적 제273호로 지정 고시되면서 이곳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복천동고분 유물의 전시를 전시하여 향토사 인식의 교육장 및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전시대상 유물은 1508점이다.

온천동의 금강공원 내에는 부산민속예술관이 있다. 동래의 전통민속예술의 발굴과 계승·보급을 위해 1976년에 개관하였다. 그 주요 민속예술에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인 동래야류와 부산시 무형문화재 지정 제3호인 동래학춤, 제4호인 동래지신밟기, 제10호인 동래고무, 제8호인 가야금산조들로써 부산민속예술보존회가 이곳에서 전수를 하고있다. 한편 온천동에는 세계해양생물전시관이 있다. 이 전시관에는 현재 약 85개국의 해양생물표본 2만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관내에는 여러 식생이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명륜동 동래향교 안의 명륜당 서쪽에 있는 은행나무는 높이 18m, 가슴높이 둘레 3.1m, 수관 폭 약 11m에 이르며 수령은 25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낙민동의 낙민동 팽나무는 높이는 16m, 가슴높이 둘레 2.6m, 수관폭 약 20m, 수령은 20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외에 안락동에 소재한 회화나무는 동래고등학교 뒷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 17m에 가슴높이 둘레가 2.8m나 된다. 이 나무의 수관 폭은 약 15m에 이르며 수령은 25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대표적인 스포츠 시설로는 사직동에 있는 사직종합운동장이 있다. 1985년 8월에 실내체육관이, 10월에는 야구장이 준공되었다. 1989년 3월에 실내수영장을 개장하였고, 그외 체조 경기장인 체조체육관, 유도, 역도, 검도 등을 할 수 있는 종합실내훈련장, 테니스장, 롤라스케이트장이 있다. 또한 명장동 마안산에는 시민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인생문고개에서 마안산 북쪽으로 난 산책에 따라 형성된 체육공원으로 시민들을 위한 운동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동래구의 대표적인 공원인 금강공원은 부산에서 가장 먼저 개장된 공원이다. 부산민속예술관, 세계해양생물전시관들과 역사유적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인근의 온천장, 금정산이 있어 시민들이 많이 찾는 공원이다.

동(洞)
  1. 수안동

동래구 중앙에 위치한 동으로, 구의 중심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동이다. 옛날부터 동래부사가 집무하던 동헌이 위치하고 있어 부산의 중심지였다. 일제강점기만 하더라도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늪지대로 미나리꽝이거나 연밭이었으나 현재에는 매축되어 아파트가 조성되어 동래구 관내에서 가장 많은 아파트가 형성된 곳이다. 동래경찰서, 동래소방서, 동래등기소 등 행정기관이 밀집되어 있고 해운대 방면으로 통하는 충렬로, 부산시청 방면으로 이어지는 중앙로 등과 연결된 교통의 요지이다. 1914년 평남·안민·장남·안국·서호동을 합하여 수안동이 되었고, 신락과 희룡동을 병합하여 낙민동이 되어 동래군 동래면에 편입되었으며, 다시 1957년 1월 1일부로 수안동과 낙민동의 2개의 법정동이 행정동인 수민동의 관할이 되었다.

  1. 칠산동

동래구 중앙에 위치한 동으로, 칠산동 지명의 유래는 과거 동래에 있었던 거칠산국의 ‘칠산’에서 유래하였다. 거칠산은 ‘거칠다’의 우리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거친뫼’ 즉 황령산을 지칭하는 것으로 풀이하는 설도 있다. 또한 현재 동래읍성의 주산인 마안산을 칠산이라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복천동과 함께 광복 후 행정동인 복산동의 관할이 되었다.

  1. 낙민동

동래구 중앙에 위치한 동으로, 지명의 유래는 현재 문헌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시대 남문동변동이라 불리던 지역으로 수령이 민정을 살피려 나가는 지역이었데, 수령이 백성을 즐겁게 해준다는 뜻에서 이같이 명칭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1914년 신락과 회룡동을 병합하여 낙민동이 되어 동래군 동래면에 편입되었으며, 다시 1957년 1월 1일부로 수안동과 낙민동의 2개 법정동이 병합되면서 행정동인 수민동의 관할이 되었다.

  1. 명륜동

동래구 중앙 서부에 위치한 동으로, 지명은 이곳에 위치한 동래향교의 명륜당에서 유래되었다. 동래향교는 조선 초기에 세워졌으나 몇 차례 이전을 하였고,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1605년(선조 38)에 중건된 후에도 여러번 위치를 옮겼으며, 지금의 위치에 세워진 것은 1813년(순조 13)에 동래부사 홍수만에 의해서이다. 조선시대에는 읍내면의 신향교동·객달동·범어동이라 칭하였다. 1906년에 이들 마을을 교동이라 하였으며, 1942년 부산부 동래출장소가 설치되어 명륜정이라 칭해지다가 광복 후 명륜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인구증가로 명륜1·2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른다.

  1. 명장동

동래의 중앙 동부에 위치한 동으로, 지명의 유래는 현재 살필 수 있는 자료가 없다. 다만 인근의 명창리와 같이 명편을 간수했던 곳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명편은 옛날 의장 때 쓰는 기구의 하나로 이를 흔들어 소리를 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정숙하게 하는 물건으로 일명 정편이라고도 한다. 동래부사는 동래 독진을 지휘하여 동래뿐만 아니라 인근 양산·기장의 군사까지 호령하였는데, 이때 사용하던 명편을 이곳에 간수케 하였다하여 명장이라고 전해진다. 이 지명은 『동래부지』(1740)에 수록되어 있다. 1975년 구획정리사업 이후 도시형태로 변모되었다. 1980년대 이후 아파트와 학교 설립 등으로 급속한 인구 증가가 이루어졌으며, 1990년에 명장1·2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른다.

  1. 복천동

동래구 중앙부에 위치한 동으로, 지명은 이곳에 있었던 우물에서 유래되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동래부지』 성곽조의 의하면, 동래읍성 안에는 우물이 6개가 있다는 기록이 있고, 한말의 기록에는 옥미정동·대정동·야정동등의 우물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복천동은 복천동고분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고분군은 삼국시대 이 지역 수장급의 무덤으로 그 문화의 번성을 엿볼 수 있으며 이 일대가 고대로부터 생활 근거지로 기능하였음을 시사해준다. 일제강점기 복천동과 칠산동이 행정동인 복산동의 관할이 되었다.

  1. 사직동

동래구 서부에 위치한 동으로, 1916년 이곳에 있는 사직단의 이름을 따서 사직동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갯밭, 딧밭등 신촌·칠충대 등의 자연마을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서면 여고리·석사리의 2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석사리라는 이름이 석사로 바뀌었다. 사직단의 터는 현 사직3동의 신동아맨션과 동은교회 일대이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1979년 이후 사직1·2·3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른다.

  1. 안락동

동래구 중앙 동부에 위치한 동으로, 지명은 이곳 충렬사에 소재한 안락서원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안락동은 동래부 읍내면 동부에 속했던 호현리·충렬사리·안락리·염창동·구향교동 등을 포함하는 지역으로 민가가 밀접한 곳이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 염창(廉倉)은 염창(鹽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염창은 현 동래고등학교와 충렬사 사이에 있던 조그만 마을로, 옛 수영이나 명장 지역은 염전이 있어서 여기서 나는 소금을 보관한 창고가 많아서 유래되었다. 충렬사리와 안락리는 서원마을로 바뀌어 호현·화현 등의 4개의 마을을 합해 원리라 하였다. 1979년 이후 안락1·2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른다.

  1. 온천동

동래구 서부에 위치한 동으로 지명은 이곳에 위치한 온천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온천동에는 온정원이라는 원이 있었을 뿐이었다. 일제강점 후 온천장에 산저리와 장전리의 일부를 합하여 온천리라고 명명함으로써 비로소 행정단위의 동리명이 생기게 되었고, 동래읍의 미남마을도 포함하게 되었다. 실제 『동래군지』(1937)에 의하면 온천동은 동래읍 온천리로 기록되어 있다. 광복 후인 1947년에는 산저·미남정이라 불리던 미남마을과 산저리 일부가 합쳐져 부산부 동래출장소 온천동으로 개명되었다. 이후 인구증가로 온천1·2·3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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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명총람』(부산광역시, 1995-2002)
『동래구지』(동래구청,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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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향토지』(부산직할시 동래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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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와 해운대』(동래와해운대지편찬위원회, 1980)
부산광역시 동래구(www.dongnae.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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