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기장군, 서쪽은 북구, 남쪽은 동래구와 해운대구, 북쪽은 양산시와 접한다. 동경 129°02′∼129°08′, 북위 35°12′∼35°18′에 위치한다. 면적은 65.27㎢이고, 인구는 24만 6026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7개 행정동(13개 법정동)이 있다. 구청은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에 있다.
북쪽에는 계명봉, 서쪽에는 금정산, 동쪽에는 공덕산 · 개좌산을 잇는 능선이 구 전체를 둘러싸고 남쪽으로는 트인 분지지형을 이루고 있다. 태백산맥의 말단에 해당되며, 양산의 원효산에서 시작하여 승학산으로 이어지는 금정산맥이 구의 서쪽을 통과한다.
금정산(金井山, 801.5m)은 금정산맥에서 가장 높은 산지로서 주봉은 고당봉이다. 산정과 산릉은 치밀한 절리에 의해 파쇄된 기반암이 노출되어 마치 성채와 같은 경관을 보인다. 부산의 명산으로서, 부산 산지의 대부분은 금정산에서 갈라져 나간 지맥으로 볼 수 있다.
해발 500∼800m의 산정과 산릉 사이에는 비교적 넓은 산간분지가 발달하며, 분지에는 산록을 따라 산정과 산릉에서 떨어져 나온 크고 작은 자갈들이 질서 정연하게 깔려 있다. 산록을 따라 분지의 중앙으로 흐르는 소하천은 대부분 복류하여 지표수를 찾아보기 힘들다. 청룡동에 소재한 계명봉(鷄鳴峰, 601.5m)의 가장 낮은 동쪽 봉우리에는 조선시대 계명봉수대가 있던 곳이다. 지금은 약간의 석축과 불을 피우던 터만이 남아 있다.
부곡2동에 소재한 구월산(九月山, 317.4m)은 조선시대 동래부의 진산으로 당시 지명은 윤산(輪山)이었다. 산의 모습이 둥글다하여 이곳 주민들은 대머리산 또는 둥글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윤산 지명은 아래쪽에서 보면 산 모양이 수레바퀴 모양으로 둥글다고 해서 바퀴 윤자를 사용했다는 설이 있다.
여러 골짜기가 발달해 있는데, 그중 금정동의 죽전마을에 소재한 사시골이 가장 깊다. 일명 사소골[四所谷] 또는 사십골[四十谷]로도 불린다. 산성마을의 상수원이기도 한 사시골은 고당봉에서 서문으로 이어진 서남쪽 능선과 원효봉과 의상봉에서 서문으로 잇는 중성(中城) 사이의 모든 물을 모아 흘러내리는 계곡으로 울창한 수림 속에 묻혀 있다.
구의 동부에는 수영강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며, 수영강의 지류인 온천천이 구의 중앙부를 흐르고 있다. 온천천을 따라 주요 교통로와 주택지구가 발달했으며, 수영강 중류의 오륜동에는 부산시의 식수공급원인 회동수원지가 있다.
범어천은 온천천의 한 지류이다. 금정산과 범어사 동쪽에 있는 계명봉에서 발원하여 범어사를 감싸고 돌다가 청룡동의 상마전마을에서 합류하여 온천천으로 흘러들고 있다. 금사동에 흐르는 사천은 수영강 상류의 지류이다. 지금은 복개되어 도로가 되었고 일부분만이 하천으로 남아있다.
내륙에 위치하고 있으나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겨울철에는 금정산맥이 북서풍을 차단하기 때문에 온대해양성기후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2013년 기준으로 평균기온은 15.3℃인데, 강수량은 편차가 심하여 2013년에는 1,130.1㎜, 2012년에는 1,983.3㎜를 기록하였다.
청동기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노포동 · 구서동 · 장전동 · 금사동 · 부곡동 등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금정구에도 청동기시대부터 주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준다. 특히 노포동유적은 1984년에서 1986년 사이에 2차에 걸친 발굴 결과 목곽묘, 목관묘, 토광묘, 옹관묘의 네 종류의 묘제가 발굴되었다. 시기는 전기가 3세기 중엽이고, 후기가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초였다.
고려시대의 금정지역은 동래의 영역으로 존재하였다.『고려사』울주조에는 “속현이 둘이 있는데, 동래현과 헌양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려사』동래현조에 의하면, “현종 9년에 본주(울주)에 소속시켰으며 후에 현령을 두었다. 이 현에는 온천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고려 초기 이 지역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이었음을 보여준다.
고려 전기에는 동래를 본관으로 하는 정목 · 정항 · 정서 등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지방호족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동래부 일대는 일본과 대치하는 관방상의 요충지가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동래부의 군사시설과 방어태세가 중시됨에 따라 동래읍성과 연계하여 금정산성을 축조하게 되었다.
금정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성되었을 것이라는 흔적은 있으나, 오늘날의 성은 조선시대에 건설되었다. 효종 때 동래부사 임의백이 금정산에 성을 쌓을 것을 건의하였으나 그 이후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 그후 1701년(숙종 27)에 경상감사 조태동이 상계하자 숙종이 동의하면서 축성되기 시작하였다.
성의 둘레는 9,011보, 높이 15척에 동서남북 사방에 성문을 두어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성이 되었다. 피난 겸 항전의 보루로 축성되어 군용물자의 저장처로 사용되고 주민이 정착하였다.
조선시대 금정구의 행정구역은 동래부 북면의 부곡리 · 두구리 · 작장리 · 소산리 · 남산리 · 구세리 · 산성리 · 장전리와 동면의 서동 · 오륜대리 등에 해당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부산포의 초량 일대를 중심으로 부산부가 설치되어 금정구의 행정구역은 부산부의 지배를 받았다.
1914년 군 · 면통폐합에 따라 이전 동래부의 일부와 기장군을 합한 동래군은 경상남도에 편재되면서 금정구의 동리도 경상남도에 속하였다. 이때 『동래군지』(1937)에는 1읍(동래읍), 11면(북면 · 사상면 · 남면 · 사하면 · 구포면 · 서면 · 기장면 · 철마면 · 정관면 · 일광면 · 장안면) 128리 7동으로 기록되어 있다. 광복 후 부산부가 부산시로 개칭되고, 1957년 1월부터 구제가 실시되면서 부산시 동래구에 행정적으로 편제되면서 금정구는 동래구에 속하였다.
1960년대 도시산업화 이후 경부고속도로의 기점이 금정구가 되고, 부산시가지가 시의 북동쪽으로 확산되면서 금정구는 부산시의 대표적인 주거지역이 되었다. 특히 구서동 · 남산동 일대는 도심과 연결되는 전철이 개통됨에 따라 신흥주택지구가 형성되었다. 장전동 · 부곡동에도 아파트 지구가 형성되었고, 금사동 · 서동 등은 단독주택지구를 이룬다.
이와 같이 이 지역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1988년에 동래구에서 분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정동으로 부곡(釜谷) · 서(書) · 오륜(五倫) · 금사(錦絲) · 장전(長箭) · 선(仙) · 두구(杜邱) · 노포(老圃) · 청룡(靑龍) · 남산(南山) · 구서(久瑞) · 금성(金城) · 회동(回東) 등 13개 동이 있다.
대표적인 사찰로 범어사가 있다. 금정산의 동쪽 산기슭의 청룡동에 위치한다. 우리나라 31본산의 하나로 화엄종 10찰에 속한다. 범어사는 678년(문무왕 18)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되어 10여 년을 폐허로 있다가 1602년(선조 35) 중건하였으나 또다시 화재가 있었다. 1613년(광해군 5) 여러 고승들의 협력으로 중창하여 법당 · 요전 · 불상과 십왕상 그리고 필요한 모든 집기를 갖추었다. 현재 1966년 보물로 지정된 범어사 대웅전을 비롯하여 3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조계문(보물, 2006년 지정), 당간지주, 석등 등 문화유산이 있으며 이밖에 많은 전각 · 요사 · 암자 등이 있다.
범어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집 계통의 건물로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측면에는 공포를 배치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경내의 삼층석탑은 신라 말기 화강석으로 만든 석탑으로 높이 4m의 2중 기단 위에 3층으로 되어 있다. 기단 면석 상하에 탱주를 대신하여 안상을 새겨 넣은 것이 특이하다. 조계문은 다른 사찰의 일주문과는 달리 일주문을 세울 때는 기울어 무너지지 않도록 설치하는 다릿발과 하인판을 설치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금정산성(사적, 1971년 지정)은 길이가 약 17여 ㎞로 국내 산성 가운데 규모가 가장 광대하다. 성벽과 성문 등 많은 유구가 현재도 남아 있다. 성벽 높이는 1.5∼3.0m 가량이며 성내 총면적은 약 8,213㎢에 달한다.
성내의 부대건물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좌기청(座器廳) 6칸, 좌우행랑 각 5칸, 군기고(軍器庫) 4칸, 화약고 1칸, 내동헌 3칸, 별전청(別典廳) 4칸과 그외에 장대(將臺), 중군소, 교련처, 승장소(僧將所), 산성창 등이 있었다. 이외의 관방유적으로 청룡동의 계명산봉수대가 있다. 계명산봉수대는 황령산봉수대의 봉수를 받아 양산의 원적산봉수대로 이어진다.
금정산성 안에는 국청사와 해월사지가 있다. 금성동에 소재한 국청사는 신라 때 창건된 사찰로 1703년(숙종 29) 금정산성이 축성된 뒤 국청사와 해월사 승려 100여 명과 범어사 승려 300여 명으로 금정산성을 지킨 호국사찰이었다.
국청사에는 현재도 당시 승병장이 사용한 금정산성승장인이라는 철제인(鐵製印)을 보관하고 있다. 금정산성승장인은 2008년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해월사지는 국청사와 함께 금정산성 내의 호국사찰로서 산성방어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였다. 그러나 해월사의 창건 경위는 정확하게 밝혀지고 있지 않다.
금정구에는 고분군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노포동에 소재한 고분군(부산광역시 기념물, 1996년 지정)은 삼한시대 또는 삼국시대 초기의 매장유적이다. 여기에서 무문토기시대 주거지 2동, 토광묘 45기, 옹관묘 6기가 조사되었고 유물은 토기류 134점, 철기류 263점, 구슬류 433점, 석기 4점이 출토되었다.
오륜동에 소재한 고분군은 1967년 회동수원지 확장공사로 마을과 이 고분군이 모두 물속에 잠겼다. 1971년 가뭄으로 수원지의 물이 마르자 석곽이 노출되었으나 당국에 신고 되기 이전에 일부가 도굴되었다.
유적은 하현마을의 뒷산 낮은 구릉의 완만한 동쪽 사면에 남북으로 약 200m, 동서로 약 50m에 걸쳐 조성된 삼국시대의 군집묘다. 이 고분군에서는 수혈식석곽묘 29기 · 옹관묘 1기 · 지석묘 1기가 발굴되고, 환두대도 · 유자이기 · 철족 · 철겸 · 철부 · 고배 · 유대장경호 등이 출토되었다.
여기서 출토된 토기는 신라의 영향권 아래에서 제작된 신라토기였다. 시기로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형성된 삼국시대의 군집묘 유적으로 보고 있다. 이외의 고분군으로 회동동고분군, 선동 하정고분군, 두구동 토기요지, 선동 신천고분군, 노포동 직장고분군, 서동토광묘 등이 있다.
전적류로는 범어사의 성보박물관과 부산대학교 도서관 고전자료실을 중심으로 소장되어 있다. 범어사는 약 1,000여 종의 전적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중 불교와 관련된 전적이 950여 종에 이르고,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고전적만도 660여 종에 이른다.
이 전적들 가운데에는 임란 이전의 조선 초기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삼국유사』(보물 제419-3) · 『함허어록』(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1999년 지정) · 『불조역대통재』(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1999년 지정) 등은 보물이나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부산대학교 도서관 고전자료실에는 대체로 영남지방의 각 문중 및 개인의 독지가로부터 기증받은 자료가 주종을 이룬다. 대부분이 한국고서이며, 중국과 일본의 고서도 일부분 포함되어 있다. 특히 『대동여지도』, 『목장지도』(보물, 2008년 지정) 등의 고지도가 귀중본으로 소장되어 있다.
한편 부산대학교 박물관에는 오층석탑(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이 있다. 울산광역시 청량면 삼정리 대곡사 절터에 있었던 것을 1966년 11월에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옮겨와서 복원한 것이다.
장전동에는 금정산성부설비(부산광역시 기념물, 1972년 지정)가 있다. 금정초등학교에서 서쪽으로 약 200m 주택지 가운데 있는 큰 암반 위에 세워져 있다. 1807년 성문을 수축하고 성곽을 다시 쌓아 산성의 면모를 새롭게 한 사실을 밝히고 기념하기 위해 1808년(순조 8)에 세운 비석이다.
천연기념물로 범어사 경내에 있는 등나무군락(천연기념물, 1966년 지정)이 있다. 예부터 이곳은 4∼5월 개화기를 맞이하여 등나무 꽃이 만발하면 소나무, 팽나무, 느티나무 등 모든 나무에 등나무 꽃이 피어 아름다운 경관을 형성한다. 등운곡이란 이름도 등나무꽃이 구름과 같이 장관을 이룬다는 뜻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곳이 언제부터 등나무가 자생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가장 오래된 나무의 나이는 약 100년 정도이고 총 5만 5934㎡의 면적을 가지고 있다. 100년에서 130년생의 노송과 89∼90년 된 굵은 참나무류, 팽나무, 느티나무 등 450주가 밀생하고 있다. 오래된 수령은 등나무 줄기가 20㎝ 이상 생장하고 권경이 40㎝ 정도이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22개교, 중학교 12개교, 고등학교 15개교가 있고, 부산대학교 · 부산외국어대학교 · 부산가톨릭대학교 · 대동대학교가 있다. 장전동에 소재한 부산대학교는 1946년 5월 15일에 인문학부와 수산학부로 구성된 국립부산대학으로 개교되었다. 1953년에 종합부산대학교로 설립이 인가되었으며 1954년에 현재의 위치인 장전동 캠퍼스 시대가 시작되었다.
부곡동에 소재한 부산가톨릭대학교는 1991년에 수영구 광안동 은혜의 집에서 개교를 하였으며 1993년에 간호학과를 신설하였다. 1964년에 간호학교로 개교한 지산대학이 1999년에 통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부곡동에 소재한 대동대학교는 1971년에 대동간호학교로 개교하였으며 2010년에 대동대학교로 교명이 개명되었다. 남산동에 소재한 부산외국어대학교는 1982년에 남구 우암동에 개교한 사립 종합대학으로 2014년에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금정구의 대표적인 문화시설로는 2000년에 개관한 금정문화회관이 있다. 문화예술공연 · 전시를 목적으로 건립된 전문 공연시설이다. 금정구를 비롯한 동래, 양산, 기장 등 부산 동 · 북부권 주민의 문화 욕구를 충족하고 있는 문화 · 휴식공간이다. 도서관 시설로서 청룡동에 소재한 금정도서관과 서동도서관이 있다. 한편 금정산성 내의 금성동에는 부산교육원이 있으며 학생들의 수련시설로 이용되고 있다.
매년 정월대보름 금정구청 주관으로 전통 세시풍속이 축제의 형태로 재현된다. 축제 내용으로는 당산제, 길놀이, 정월민속놀이, 풍물한마당, 사물놀이, 판소리, 달집태우기 등이 있다.
금정산과 범어사와 관련된 여러 전설이 있다. 그중 「범어사의 창사유래」는 신라 흥덕왕 때의 일로 전한다. 왜인들이 10만 병선으로 동해에 침범하니 왕이 근심하던 중,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태백산에 의상화상(義湘和尙)이 있으니 근심하지 말며, 동국 해변에 금정산이 있으니 7일 7야 동안 화엄신중(華嚴神衆)을 독송하라.”라고 일러주었다.
왕이 의상과 함께 금정암 밑에 가서 독경하니 제불 · 천왕 · 신중 등이 왜군을 쳐서 섬멸시켰다. 이에 금정산 아래에 범어사를 지었다는 것이다. 이외의 전설로 국청사 전설, 미륵사 전설, 어산교 낭백스님 전설, 계명봉(鷄鳴峰) 전설 등이 있다.
금성동 · 오륜동에서 쌀 등의 식량작물을 생산하는 농사가 이루어진다. 두구동 일대의 신흥주택지에서는 도시적인 토지이용과 혼재되면서 도시 원예작물이 재배되고 있다. 제조업은 대부분 금사동에 집중되어 있고, 부곡동 · 서동 등지에도 발달하였다. 제조업체의 60% 이상이 소규모 업체이다.
구서동과 장전동에는 산업도로를 따라 대규모 업체가 입지해 있다. 업종별로 보면 금사동에 섬유 · 의류 · 화학 · 고무 · 조립금속업, 두구동에 목재가공업, 구서동에 비금속공업이 발달하였다. 중심기능은 대부분 동래구에 의존한 탓에 상업중심기능의 발달이 미약하며 온천장∼부산대학교∼구서종합상가를 잇는 간선도로변를 따라 편재되어 분포한다. 한편 부산대학교 앞에 형성된 상업지역은 대학생과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부산의 대표적인 소비기능 중심지이다.
부산 동부지역의 관문 역할을 하면서 교통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조선시대 동래부에서 시작되는 영남대로가 이 지역을 지나 양산으로 연결되었으며 기찰 등의 지명이 아직 남아 있다. 경부고속도로, 도시고속도로, 산업도로가 이곳에서 시작되고, 지하철 1호선이 구의 중앙을 지난다. 부산종합터미널이 노포동에 입지하여 육로교통의 접속 지점에 속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금정산의 자연경관과 동래부의 역사가 어우러져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금정산성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산성으로 주말에는 시민들이 등산을 목적으로 찾는 명소이다. 산성 내의 산지촌인 금성동은 토속음식인 산성막걸리와 염소고기 등으로 유명하며, 술을 만드는 누룩은 이 마을의 특산물이다. 금성동은 동래구의 금강공원과 케이블카로 연결되어 있다.
범어사에는 많은 유물이 있을 뿐 아니라 성보박물관이 건립되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오륜동에 소재한 오륜대는 시민이 자주 찾는 관광지이다. 오륜동은 회동수원지가 조성되기 전까지는 깊은 계곡으로 맑은 계천과 그 계천의 물이 모인 산중 호숫가에 기암절벽을 가진 명승지로도 이름나 있었던 곳이다. 회동동 쪽에 둑을 쌓아 댐을 축조하자 오륜동 쪽은 수몰이 되어 그 경관이 크게 바뀌었다.
금정구의 재래시장으로는 남산동의 새벽시장과 오시게장이 있다. 새벽시장은 청룡동과 남산동의 경계를 이루는 범어천 다리 근처의 공터에서 열리는 장이다. 대개 새벽 오전 6시에서 9시경까지 열리고 있다. 노포동 지하철역 부근에는 2일과 7일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오시게장이 있다.
오시게장은 과거 동래부의 동래시장이 일제강점기 중반에 상설시장화하면서 정기시장의 형태가 분리되어 남아 있는 전통시장이다.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2·7일장으로 개시되다가 1930년대에 상설화되면서 정기시와 병존하였다. 1960년대 중반까지는 상설시장과 정기시장이 동래 읍내장의 자리에서 계속 병존하였다. 그러다가 시가지 확장이 이루어지면서 기능상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명륜초등학교에 형성되었던 소전거리는 석대동으로, 정기시의 형태는 온천동 비석골로 이전하였다. 1970년대 초반 다시 시가지화에 밀려 부곡동 오시게로 이전하였고, 1982년에 구서동 지하철역 부근, 이후에 노포동 지하철역으로 이전한 것이다. 오시게 시장에서 취급하는 주요 품목은 식료품이 가장 높으며 채소류와 건어물, 곡류 등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약재와 가금류의 비율이 다른 재래시장보다 훨씬 높게 나타나는 것이 특이하다.
금정산 자락에서는 여러 예술행사가 열리고 있다. 매년 10월 금정문화회관에서는 금정예술제가 열리고 있다. 음악 · 국악 · 무용 · 합창의 무대공연, 미술 · 서예전시,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문화강좌 강연, 붓글씨 대회, 음악 경연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금정산성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에 지신밟기와 달집태우기가 열린다. 또한 금정산성 축성일(5월 25일)을 기념하는 문화행사로 성 만들기 경연대회, 산성 수문장, 기타 부대행사로 금정 백일장, 사생대회 등을 개최하고 있다. 한편 해마다 산악인들의 축제인 금정제가 열린다.
금정구 내의 주요 박물관으로 범어사 성보박물관과 부산대학교 박물관이 있다. 성보박물관은 2003년에 개관하였다. 소장 유물은 조선 후기 불화를 비롯하여 50여 점의 진영, 1,000여 종의 전적과 14종의 목판 ·23종의 현판을 비롯해 각종 불기와 유물 등이다.
전시된 유물 가운데 대표적인 전시품은 『삼국유사』와 「사천왕도」, 「백의관음도」, 의상대사 진영 등을 들 수 있다. 부산대학교 박물관은 1964년에 개관하였다. 소장 유물은 총 2만 1349점으로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대표적인 시설로는 경륜 · 경정 및 다양한 스포츠 시설과 휴식 공간을 제공하는 스포원이 있다. 두구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2002년 아시안게임에 대비하여 건립되었다. 기존의 체육 경기장과는 달리 ‘공원’과 ‘개방’의 개념을 도입한 ‘공원형 경기장’으로서 경륜장, 실내체육관, 테니스경기장 외에 가족산책공원, 잔디광장, 인공연못과 음악분수, 조깅, 자전거 코스 등 시민을 위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국내외 각종 경기시 경기장으로 활용될 뿐만 아니라, 가족단위의 소풍, 야유회, 산책 등 여가선용 및 휴식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다. 금정산에는 산악자전거와 행글라이더, 패러글라이딩, 암벽 등반 등 다양한 레저를 즐길 수 있는 장소가 많다.
구의 동남부에 위치한 동이다. 일제강점기 초기 금천과 사천 두 개의 자연마을을 합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한때 행정동인 서동에 속하였으나 인구증가로 1985년 12월에 서3동이 분동되면서 이 지역은 금사동으로 되어 옛 지명을 찾게 되었다.
『동래부지(1740)』 산천조에는 오늘날의 수영강 상류를 사천이라 하였는데, “사천은 기장군 원적산과 경계의 사배야현의 두 곳에서 발원하여 해운포로 유입된다.”라는 기록이 있다.
구의 서부에 위치한 금정산성 내부에 위치한 동이다. 금성동 지명은 금정산성 안의 동네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금성동은 죽전(竹田) · 중리(中里) · 공해(公邂) 등 3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었다.
죽전마을은 화살을 만드는 대나무가 많이 생산되어 붙여진 이름이고, 중리마을은 중성문(中城門)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공해마을은 공해란 말이 관아를 뜻하며 산성 내의 좌기청(座起廳), 군기고(軍器庫), 화약고(火藥庫), 내동헌(內東軒), 별전청(別典廳) 등의 관아가 위치하였던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구의 중앙에 위치한 동이다. 조선시대에는 구세리라 불리었다. 구세는 구세동거에서 따온 말로 중국 당나라의 장공예는 9대가 한집안에서 살았다는 고사에서 집안이 화목한 것을 이르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굿을 하는 동네라는 뜻에서 굿판 굿터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동래정씨, 밀양박씨의 집성촌으로 오랫동안 자연마을을 형성하고 살아왔으나 지금은 도시화로 집성촌은 사라졌다. 인구 증가로 구서1·2동으로 분동되었다.
구의 중앙에 위치한 동이다. 지명은 범어사에서 볼 때 남쪽 산등성이라 하여 유래되었다. 남산 · 남중 · 신암 등 세 곳의 자연마을이 있으며, 남산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작은 마을로 반남산마을이 있다. 이중 가장 먼저 취락이 형성된 곳이 남산마을이다.
신암마을은 이 지방 사람들이 ‘서근덤’이라 부르는데 푸석돌(썩돌)이 많아서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남중마을은 남산마을과 신암마을의 중간에 위치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남산동은 임진왜란 후 남산김씨 9세대가 이곳에 씨족마을을 형성하여 마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구의 북부에 위치한 동이다. 행정적으로는 청룡노포동의 관할 하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동래구 북면 작장리와 소산리에 해당되는 지역이다.『동래군지』(1937)에는 작장리와 소산리 지명 대신 노포리로 기재되어 있다.
노포 · 작장 · 대룡 · 녹동 등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작장마을이 중심 마을이었으나 울산지역으로 도로가 열리면서 노포마을이 중심이 되었다. 지금은 울산과 양산 방면으로 가는 도로와 경부고속도로가 있고 종합버스터미널, 지하철 시발지인 차량기지창이 위치하고 있어 비교적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구의 북동부에 위치한 동이다. 행정적으로 선두구동의 관할 하에 있다. 『동래부지』(1740)에 의하면, 북면 두구리로 기록되어 있으며 “동래부에서 30리 거리에 위치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1968년에 종합양계단지로 지정된 후, 양계사업의 발달로 시내의 달걀과 육계의 공급원이 되었다. 조리 · 죽전 · 대두 · 임석 · 중리 · 수내 · 송정 등 7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대두마을이 가장 먼저 형성된 마을이다.
구의 중남부에 위치한 동이다. 지명은 가마실을 한자 표기한 것으로 부곡동에서 서동으로 넘어가는 산의 모양에서 유래되었다. 동의 동북쪽에 위치한 해발 326m의 구월산을 등지고 있으며, 산업도로가 지나고 있다.
부곡동의 별칭으로 기찰이 사용되었다. 이는 『동래부지』 관해조에 십휴정(十休亭) 기찰이 있어 여기에서 연유된 명칭이다. 옛 자연마을인 부곡과 오시게마을은 부곡1동으로, 금양과 기찰마을은 부곡2동으로 되었다.
구의 남동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래부읍지』(1832년)에 동래부는 명장리 · 서리 · 금사리 · 반여리 · 회동리 등을 동상면이라 하였고, 이중 서리가 현재의 서동에 해당된다. 1968년 2월, 영주동 · 충무동 등의 고지대 철거민의 정책 이주지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1974년에는 준공업지구로 선정되어 농촌 변두리지역에서 도시공업화지역으로 바뀌었다.
원래 서리로 불리던 서동은 섯골과 내곡(안골) 두 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었다. 내곡은 안마실(안마을)이란 뜻으로 동명으로는 부적격하여 서리마을이 동명으로 발전한 것이다.
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이다. 오륜대에 인접한 동으로 행정적으로 선두구동의 관할 하에 있다. 선동은 두구동의 임석마을과 같이 선돌이 있어 이를 표지물로 동리 이름이 지어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설뫼’를 입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자의 뜻을 취한 것이고, 선돌을 선동이라 한 것은 한자의 음을 취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정 · 상현 · 하현 · 신현 · 신천 등 5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었는데 이중 하현마을은 1942년 회동수원지의 건설로 없어져 4개의 자연마을만 남아 있다. 남북으로 경부고속도로가 통과하고 개발제한구역이 많아 개발이 늦어지고 있다.
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이다. 부산시민들의 휴양처로 알려진 회동수원지와 인접한 동이다. 지명은 당시 주자학을 숭상하는 시대에 경승지인 이곳은 처사들이 은둔 · 유상하기 알맞은 곳이므로 높이어 부른 이름이다. 1942년에 회동수원지 건설로 5개 마을 중 4개 마을이 수몰되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말기에 농민들의 반침략운동이 전개된 곳으로 유명하다. 1942년에 일제가 수원지를 만들 때 이곳의 자연마을과 전답이 매몰되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일제가 피해보상을 원만하게 처리하여 주지 아니하자 봉기하였다. 행정동인 부곡3동 관할 하에 있다
구의 남서부에 위치한 동이다. 부산대학교가 위치하고 있어 교육의 중심지이다. 조선시대 사료에 북면 장전리로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의 형성은 일찍부터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장전은 긴 화살이라는 뜻으로 금정산 성안의 죽전마을과 같이 화살대를 만드는 대나무가 많이 생산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금정산 자락에 위치하여 안락하고 쾌적한 주거 환경을 이룬다. 전철과 간선도로가 관통하여 교통이 발달하였고, 신개발로 조성된 주택지역이 형성되어 있다. 원래 장전 · 소정 2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었는데 장전마을을 중심으로 장전1동, 소정마을을 중심으로 장전2동이 되고, 장전2동의 동편은 장전3동이 되었다.
구의 북서부에 위치한 동이다. 행정적으로는 청룡노포동의 관할 하에 있다. 1904년에 탁지부에서 편찬한 『경상남도동래군가호안』에 청룡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 청룡은 불교에서 ‘이십팔수’ 가운데 동방에 있는 일곱 성수를 총칭하기도 하며 사신의 하나로 동쪽 하늘을 맡은 신을 뜻하기도 한다.
청룡동은 범어사의 동편마을이란 뜻에서 지어진 동명으로 풀이되고 있다. 자연마을로 청룡 · 용성 · 신리 · 상마 · 하마 등 5곳이 있다. 이중 청룡마을 외에도 용성마을도 용과 관계가 깊다. 신리마을은 1940년대 북면 사무소가 기찰(부곡동)에서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형성되기 시작하여 새로이 생긴 마을이란 뜻이다. 상마 · 하마는 청룡마을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이곳에 삼을 많이 심었던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이다. 회동수원지와 접한 동으로 행정동인 금사동의 관할 하에 있다. 조선시대 동래부 동상면 지역이었으며 1914년에 금천 · 사천 마을을 병합하여 금사리라 하였다. 이때 회천 · 동대 마을을 합해 회동리라 하였다.
『동래부지』(1740) 고적조에는 “동대는 사천가에 있고 바위의 높이가 4∼5장 가량 되고 물이 굽이쳐 돌아 못을 이루어 깊이가 수장이나 되며 물고기가 많아 낚시하기 좋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85년 12월 1일에 인구증가에 따라 서3동에서 옛 동명인 금사리를 따서 금사동이 발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