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역시 동구는 동쪽으로 남구, 서쪽으로 서구와 중구, 북쪽으로 부산진구와 접하여 남쪽으로는 부산만에 연해 있다. 동경 129°05'∼129°15', 북위 35°84'∼35°88'에 위치하며, 면적은 9.73㎢, 인구는 9만 2069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은 14개 행정동(4개 법정동)이 있으며, 구청은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2동에 있다.
북서쪽은 금정산맥 주능선과 수정산, 엄광산, 구봉산 등의 산지가 연봉을 이루고 있다. 이들 산지는 오랜 지질시대의 삭박작용(削剝作用)으로 전형적인 노년산지(老年山地)를 이루고 있으며 남동쪽이 바다에 연해 전형적인 배산임해(背山臨海)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과거에는 암석해안이었으나 지금은 매립되어 시가지와 도로 및 항만시설로 이용되고 있다.
엄광산(嚴光山)은 동구와 서구 동대신동, 부산진구 개금동과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1740년 『동래부지(東萊府誌)』 산천조(山川條)에, “엄광산은 부(府) 남방 30리에 있으며 위에 구봉이 있고 아래에 두모진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산은 북쪽으로 백양산과 마주하며, 남쪽으로는 구덕산과 이어지고, 한때 ‘고원견산(高遠見山)’으로 불리어 왔다.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 지명은 옛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일제강점기 형성된 일본식 지명으로 추정된다. 1995년 엄광산으로 지명을 고쳐 부르게 되었다.
수정동에 위치한 수정산(水晶山)은 동구와 부산진구의 경계를 이룬다. 전형적인 노년산지로, 서쪽으로 엄광산, 남쪽으로는 구봉산에 이어진다. 지명은 보석의 일종인 수정이 채굴되어 유래되었다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일제강점기 상서공원과 대지공원이 있었을 정도로 경관이 빼어나며, 지금도 부산 제일의 도심 산지로 부산 항만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초량동에 소재한 구봉산(龜峰山)은 서구와 경계를 이룬다. 엄광산과 구덕산으로 이어지는 부산항의 동줄산맥 산정의 하나이다. 지명은 산의 모습이 마치 거북처럼 엎드려 있는 데서 유래되었다. 정상부에는 봉수대가 있다.
좌천동에는 독립 구릉성 산지로 증산(曾山)이 있다. 범일동과 경계를 이루는 산지로 오랜 지질시대의 삭박작용으로 수정산에서 떨어져 나온 하나의 독뫼에 해당된다. 이곳 증산의 산허리에는 아리랑 고개라는 옛 지명이 있었으며, 지금은 ‘성북고개’로 지칭되고 있다.
수정동에는 관골이 있다. 수정동 남쪽 산록에 있는 골짜기로 부산천의 상류 계곡에 해당된다. 일명 ‘온정골’이라고도 불린다.
동구의 산록에서 부산천 · 초량천 · 호계천 등 하천이 발원하여 동구 중앙을 지나 부산만으로 유입되며 하천 유역과 해안 지역, 산기슭 하천 주변을 중심으로 취락이 발달해 있다.
수정산에서 발원하는 범천은 북서쪽으로 흐르다가 안창마을을 지나며 동쪽으로 방향이 바뀌어 옛 교통부와 평화시장을 지나 동천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이 하천 지명은 우리말인 ‘범내’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 일대가 1945년까지만 해도 사람이 들어가기 힘들 정도의 삼림으로 뒤덮여 있었고,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였다고 하여 붙여졌으며, ‘호계천(虎溪川)’이라고도 불렸다.
범천이 흐르는 계곡은 범천골이다. ‘호천곡(虎川谷)’ 또는 범천곡(凡川谷)‘이라고도 하였으며,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삼림이 울창해 사람이 출입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류의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복개되어 옛 경관은 찾아볼 수 없다.
구봉산에서 발원한 부산천은 수정동과 초량동을 차례로 관통하면서 부산만으로 유입된다. 유로는 약 2㎞이며 상류는 급경사이지만 하류는 완만한 구배를 갖고 있다. 이 때문에 부산천은 예부터 여름철 집중 호우시 홍수와 산사태가 빈발하여 유역에는 자연재해가 자주 일어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상류 일부만 제외하고 복개되어 유로를 찾아볼 수 없다.
증산에서 발원하는 좌천은 일명 ‘좌자천’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서면과 옛 조방 일대의 주거 밀집 지역 및 시가지 중심부를 관류하는 동천은 동구와 남구의 경계를 가르고 있다. 이는 시가지의 인구 조밀 지대를 흐르는 도심하천으로 일찍부터 하천오염 문제가 제기된 대표적인 하천이다.
이 지역 일대의 해안은 거의 매립되어 과거의 해안선은 찾아볼 수 없다. 과거 부산포 일대의 해안은 대부분이 산지로 항만부지가 매우 부족하여 바다 매축이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개항 이후 북변을 매축하여 중앙동에 평지를 조성하고, 영선상을 착평하여 중앙동 북쪽 지역과 초량의 바다 쪽 지역을 조성하였다. 그 뒤 이루어진 매축이 부산진 매축이었다. 이 공사는 1913∼1917년까지 진행되었으며, 이때 생겨난 매립지는 약 14만 평이었다. 현재의 수정동 구관 앞에서 좌천동 앞의 바다이며, 이후 1926년 착공된 매립은 지금의 범일동에서 우암동까지 이어진 자리이다.
동구는 바다에 임해 있어 전형적인 온대 해양성 기후를 보여준다. 북서쪽에 연해 있는 금정산맥이 겨울철 북서풍을 막아주어 온화하며 기온의 연교차가 비교적 적다. 여름과 가을철은 태풍의 경로상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아 풍수해를 입기도 한다. 연평균기온은 14.4℃로 1월에 가장 낮고, 8월에 가장 높다. 연평균강수량은 1491.6㎜이다.
동구 지역은 산지가 발달하여 과거 해안을 중심으로 취락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패총 등의 유물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삼한시대에는 변한에 속해있었고, 이후 신라에 소속되면서 거칠산국으로 편재되었다가, 대증현이 설치되면서 이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통일신라시대에는 『삼국사기』지리지에 “대증현은 신라 경덕왕 때 동평현으로 개명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동평현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동평현의 영현이었던 동래군이 동래현으로 강등되면서 울주군에 영속되자, 이 지역도 양주군(현 양산)의 지배를 받았다.
조선시대 들어와 일본과 교섭이 잦아지면서 부산포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은 대일본 외교교섭 및 무역거래의 중심지로 기능하였고, 조선 · 일본 관계의 중심이 되었다. 조선 전기 지금의 좌천동에 부산진 첨사영인 부산진 성이 있었고, 임진왜란 이후 부산진 성은 자성이었던 자성대 성으로 옮겼다.
1407년(태종 7)에 부산포(현 좌천동 일대) 부근에 왜관이 설치되었나 임진왜란 후 폐쇄되었다가 1601년(선조 34) 절영도에 임시 왜관이 설치되었다. 그 후 1607년 지금의 고관 자리에 두모포 왜관을 설치하였고, 1678년(숙종 4) 초량으로 옮길 때까지 70여 년간 존속되었다.
1740년(영조 16) 동래부가 7개 면으로 편재되면서 이 지역은 동평면에 속하게 되었다. 한편 동천이 유입하는 일대에는 과거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 소속의 만호영이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울산에 있었던 개운포 만호영을 지금의 좌천동 정공단 부근으로 이전하였다. 원래 정공단 부근에 부산진 첨사영이 있었는데, 그 첨사영이 현재의 자성대 성으로 옮겨가고, 그 첨사영 자리에 개운포 만호영이 옮겨지게 되었다. ‘개운포’라는 지명은 울산 개운포에서 유래된 것으로 부산의 개운포 지명은 만호영 이전에 따라 일시적으로 생성된 지명이었다.
개항이 이루어지면서 동구는 해안에 대규모의 매립공사와 함께 부두가 축조되었다. 1909년에 기공한 부산 착평공사는 부산진과 초량간에 위치하였던 영선산을 착평하여 그 토사를 이용, 매립해 양 지구를 연결하는 공사였다.
일제는 1941년 제3부두, 1943년 제4부두, 1944년 중앙부두를 축조하고 임해철도를 부설하였으며, 1935년부터 5개년 계속 사업으로 북방파제를 축조하여 연안무역 설비공사를 완성하였다.
일제강점기 이루어진 부두 축조공사를 통해 동구의 지리적 성격은 급변하였다. 일제강점기 초기 기존의 동래군이 동래군과 부산부로 분리되면서 현재 동구의 대부분은 부산부 부산면(범1·2동, 좌천동, 수정동)에 소속되었다. 또한 식민지 지배와 대륙 침략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경부선 철도의 가설로 매축이 시작되면서 교통의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해외동포의 귀환과 한국전쟁기 피난민의 유입으로 이곳의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수정산 · 구봉산 등의 산기슭을 중심으로 무허가 취락들이 형성되면서 주택 지구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동시에 철도교통과 해운의 중심이 되면서 동구 일대의 지역성은 급변하였다. 1951년 초량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57년 구제가 실시되면서 동구로 승격하였다.
현재 법정동으로 수정(水晶) · 초량(草梁) · 좌천(佐川) · 범일(凡一) 등 4개 동이 있다.
소림사(少林寺)와 금수사(金水寺) 2곳의 사찰이 있다. 초량동에 소재한 소림사는 1926년 창건되었으며 조계종파에 속한다. 이 사찰은 한국전쟁 당시 참전하기 위해 일본에 있던 거류민단 산하 청년들이 머문 곳이기도 하다.
초량동에 소재한 금수사는 1596년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강화사로 일본으로 건너갈 때 하루를 묵었던 곳으로, 수도처로 좋은 곳이라 하여 초옥사암이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1910년에 화엄사의 동호선사가 금수정사를 짓고 1960년 대광명보전이 건립되었다.
지정유산으로 부산진 지성, 정공단, 서문성곽우주석, 일신여학교 등이 있다.
범일동에 소재한 부산진성(부산광역시 기념물, 1972년 지정)은 임진왜란 전에 부산진 성의 자성이었으며 이후 부산진 성이 축조된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동서의 산을 따라 성벽으로 성곽을 두르고 바닷물을 끌어 참호를 20m쯤의 넓이로 파고, 배가 바로 성벽에 닿도록 하였다. 지금은 동문, 서문, 장대를 복원 신축하여 동문을 진동문, 서문을 금루관, 자성대위의 장대를 진남대라고 각각 명명해 그 편액을 달았다.
부산진 성의 서문에 있는 서문 성곽 우주석(부산광역시 기념물, 1972년 지정)은 원래 부산진 지성의 서문 자리였던 현 성남초등학교 교정에 있던 것을 현 위치로 이전한 것이다. 이 석주는 각자가 ‘남요인후(南徼咽喉)’, ‘서문쇄약(西門鎖鑰)’이라 하여 나라의 목에 해당되는 남쪽 국경이요,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는 뜻이 적혀있어 임진왜란 이후 왜적을 크게 경계한 당시의 시대적 정신을 표상한 유물이기도 하다.
좌천1동에 소재한 정공단(부산광역시 기념물, 1972년 지정)은 임진왜란의 첫 접전지에서 전사한 정발(鄭撥)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해마다 부산진 성이 함락된 음력 4월 14일이면 여기에 제단을 마련하여 장군의 충용을 추모하고 있다.
일신여학교(부산광역시 기념물, 2003년 지정)는 좌천동에 소재하고 있다. 1919년 3월 11일 일신여학교 학생과 교사 13명이 일으킨 의거는 경상남도의 3·1 독립만세운동이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동구 지역은 조선시대 일본과 접하고 있어 관방 관련 유적이 매우 많다. 범일동에 소재한 부산진 지성은 임진왜란 때 침범한 왜군이 부산에 주둔하면서 본래의 성을 허물고 왜식 축성법에 따라 축조한 것으로 현재 자성대에 남아 있다. 남아 있는 성터는 2단으로 성벽의 높이는 최고 10m, 최저 1.5m이다. 왜적이 물러난 뒤 명나라에서 원군으로 온 장수 만세덕(萬世德) 휘하의 부대가 잠시 주둔하기도 했다. 만세덕의 부대가 돌아간 이후 새로 성을 쌓고 사대문을 축조하였으며, 성내에 관아 건물을 정비하여 임진왜란 후 부산진 첨사영으로 사용되었다.
좌천동에 있었던 영가대(永嘉臺)는 1614년(광해군 6) 경상도 순찰사 권반이 자성대 성 밖 서쪽 해안 선착장 위에 세운 정자이다. 이후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는 이곳에서 항해의 안전을 비는 해신제를 지내고 일본으로 출발했다. 1905년 경부선 철도 부설로 철거되었고, 2003년 부산진 지성에 복원되었다.
한편 수정동에는 두모포 만호영이 있었다. 임진왜란 이전 기장현의 두모포에 있던 만호영이 지금의 좌천동 지역으로 옮겨졌으며, 이후 두모포에 있던 왜관이 초량으로 이전하면서 두모포 만호영을 1680년(숙종 6) 지금의 수정동으로 이전하였다. 이에 따라 이 지역 일대를 두모포라 하게 되었고, 두모포 만호영이 있는 마을을 두모리라 하게 되었다.
동구에는 왜관, 왜성 등 일본과 관련된 유적이 많다. 부산의 왜관은 1407년(태종 7) 조선 조정에서 일본인(주로 대마도인)이 장사를 할 수 있는 포구를 부산포와 제포(현 진해시의 웅천), 염포에 정해 주면서 세워지게 되었다.
부산포 왜관의 위치는 지금의 범일동 자성대 서북쪽이었다. 하지만 부산포 왜관은 임진왜란으로 없어지게 되었고, 임진왜란 이후 절영도(현 영도)에 임시 왜관이 설치되었다. 1609년 두모포(현 수정동으로 고관)로 옮겨졌으며, 1678년 현재의 용두산 일대 초량왜관으로 이전되었다. 이후 1876년 개항 때까지 198년 동안 존속되었다.
좌천동에는 왜성인 범천 증산성(凡川甑山城)이 있다. 지명은 왜성이 있던 산 지명에 유래하였다. 성을 쌓은 석재는 부산진 성의 석재를 이용했다. 전형적인 왜성 축성법을 사용하고 있다.
초량동 구봉산에는 봉수대가 남아 있다. 구봉 봉수대는 1725년(영조 1) 석성산(현재의 서구 남부민동 천마산)에서 옮겨온 것이다. 당시 석성산에 있던 봉수대는 왜관과 가까워 군사기밀이 누설될 것이 염려되었고, 이에 봉수대가 구봉산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봉수대는 부산포 일대를 조망하고, 황령산 봉수대와 다대포의 응봉 봉수대의 봉수를 받아 이를 부산포의 수군과 주위 봉수대에 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한편 수정동 동부경찰서 정문 오른쪽으로 화강암으로 된 부산진 매축기념비(釜山鎭埋築紀念碑)가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 바다를 매축하여 부산진 지역을 넓힌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일본인이 세운 것으로, 전면의 비면 음각은 분명하지만 후면은 시멘트로 메워져 내용을 판독하기 어렵다. 또 하나의 부산진 매축기념비는 고관 입구의 삼각지 공원 모서리에 화강암을 자연스럽게 다듬어 1983년 부산시가 세웠다. 또한 부산 해관 유적지는 원래 수정동에 있었으나 1883년 11월 당시 일본 조차지 앞인 현재의 중앙동 바닷가에 설치하였다.
초량동에는 옛 봉래각이 있다. 이 건물은 1930년 부산 최초의 종합병원인 백제병원 건물이다. 백제병원 건물은 봉래각이란 중국요리점으로 사용되었다가, 해방 이후 치안대(治安隊)의 사무실로 사용되었으며, 근대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8개교, 중학교 6개교, 고등학교 5개교가 있다.
개화기 좌천동에는 일신여학교가 설립되어 부산 지역 근대 여성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일신여학교는 호주장로교 선교회 여자 전도부가 1895년 좌천동의 한칸 초가집에서 수업연한 3년의 소학 과정의 학교를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현재 좌천동 부산진교회 앞에 남아있는 2층 벽돌 교사가 지어진 것은 1905년이었다. 1909년에는 구한국 학부대신의 인가를 얻어 고등과를 설치하였고, 1925년 동래읍 복산동에 신축 교사를 지어 이전하여 동래일신여학교라 개명하였다. 현재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이다.
한편 일제강점기 좌천동 정공당이 모셔진 자리 부근에 육영학숙의 건물인 육영제(育英齊)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민족사상이 투철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1942년 일본 천황의 생일날 학생들이 천황을 칭송하는 노래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폐쇄되기도 하였다.
동구 범일동에는 시민회관이 자리 잡고 있다. 남구 대연동에 부산문화회관이 건립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부산 문화의 중심 기관이었다. 1973년 개관되었으며, 부산의 옥내 문화행사가 열리던 곳이었다.
수정동에는 시민도서관 수정 분관이 있다. 수정동에는 부산 언론의 중심기관 중 하나인 부산일보사가 있다. 1946년 대청동 사옥에서 창간되었으며, 이후 중앙동에 있다가 1985년 현재의 사옥으로 이전하였다. 1959년 부일장학회를 설립하였고, 국내 최초의 민간 상업방송인 부산문화방송을 개국하여 신문과 방송의 입체화를 시도하였다.
또한 동구 초량동에는 주한 부산 일본총영사관과 주한 부산 중국총영사관이 있다.
동구 지역은 과거 어촌이 입지하여 마을마다 풍어를 비는 민속과 당산제가 열린다.
범일동에는 산신과 용왕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용왕당 안에는 약사여래(藥師如來) 채색도가 걸려 있고 가까이에는 최영 장군 사당이 있어,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원래 당사는 자성대의 서북쪽에 있었으나 20여 년 전 철거되고 당산제를 지내지 않다가, 1993년 현 위치에 다시 당사를 짓고 당산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이밖에 좌천동에는 산령당과 고당이 있다.
부산에는 여러 지방의 지명을 이용하여 민요가 전래한다. 그중 동구의 초량에 해당하는 민요로서 「부산가서 붓사고」가 있는데, “부산가서 붓사고 초량가서 초사고 / 영도가서 섬사고 / 통영가서 갓사고 / 밀양가서 밀산다.”라는 가사가 전해지고 있다.
개항 이전 부산의 상업은 범일동에 소재했던 부산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지금의 부산진시장을 중심으로 벌어진 장으로 매월 4일과 9일의 5일장이었다. 일제강점기 지금의 중구 일대에 도심지가 형성되면서 상업기능의 비중이 약화되었다.
동구 지역은 일제강점기 조선방직을 중심으로 섬유공업이 발달하였다. 범일동에는 시민들이 현재도 조방터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이는 조선방직공장 터를 줄인 말로, 조선방직공장은 1917년 세워진 부산 최대의 공장이었다. 현재의 시민회관, 범일전신전화국 등 공공건물과 아파트, 자유시장과 평화시장이 들어선 자리이다.
상업기능은 범일동의 부산진시장 · 자유시장 등의 도매시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상권은 경상남도 전역에 걸쳐 있다. 특히 부산진시장은 동래시장과 함께 조선시대부터 있어온 가장 오래된 시장 중 하나이다. 지하철 범일동역을 끼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또한 범일동에 위치한 자유시장은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대표적인 재래시장이다. 특히 화훼도매시장으로 명성이 높다.
좌천동에는 가구 판매점과 자개 상점이 밀집해 있다. 평지가 좁고, 해안 매립지는 대부분 철도와 도시고속도로 용지로 이용되기 때문에 간선도로변에 상업 · 업무기능이 집중되어 있다. 수정동에는 구청 · 동부산경찰서 등이 소재하여 업무기능에 특화되어 있다.
동구 지역은 부산역과 부산진역이 있고, 부산항이 위치해 외부 지역과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동구 범일동에는 부산에서 가장 먼저 건설된 입체고가도로인 자성고가로가 있으며, 연안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항만인 부산 북항이 있다. 부산항이 들어서기 전까지 이곳은 초량에 민가가 약 100호, 고관에 150호, 부산진에 400여 호가 산재하는 자연항이었다. 개항과 함께 일본 선박 등 대형 상선이 접안하기 시작하면서 항만 시설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1898년 부산 해관(현 세관) 부지 매립공사 및 확장공사를 시작한 것이 효시가 되었다.
제1부두는 잡화와 컨테이너, 제2부두는 잡화, 중앙부두는 원목과 통나무, 제3부두는 잡화와 컨테이너 및 식물검역, 제4부두는 잡화와 조달물자, 제5부두는 컨테이너와 양곡부두, 제6부두는 컨테이너와 일반부두, 제7부두는 석탄 및 광석, 국제부두에는 컨테이너, 연안부두에는 컨테이너와 연안화물이 취급되고 있다. 그 외의 부두로는 주로 관공선, 예선선 등이 정박하는 관공서부두가 있다. 이중 동구에 해당되는 구역은 중앙부두와 3·4·5부두, 관공서부두이다. 좌천동에는 부산지방 해운항만청이 입지하고 있다.
과거 역사유적이 많으며 근대 역사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관광자원이 많다. 초량동에 위치한 청관거리는 부산의 근대화와 함께 한 지역이다. 1884년 청나라가 지금의 중국 화교학교 자리에 영사관을 설치했다. 이와 함께 그 주위로 중국(청국) 사람들의 점포를 겸한 주택이 형성되면서 청관거리가 조성되었다. 점포에는 비단 · 포목 · 양복지 · 거울 · 꽃신 등 중국 상해 등지에서 수입해 온 상품이 많았다.
일제강점기 일본 세력이 초량까지 밀려오자 청관거리도 그 빛을 잃어갔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미군이 진주하고, 중앙동의 텍사스촌이 1953년 옛 부산역 앞 대화재로 소실되자 초량의 청관거리 일부로 옮겨오게 되었다. 현재도 이 일대는 텍사스 거리라고 불린다. 이 지명은 중앙동 시절 미군이 권총을 차고 서부활극을 연상시키는 장면을 자주 연출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이곳은 미군이 철수하면서 외국선원들이 찾아들게 되었고, 1980년대 동유럽이 개방되어 외항선원과 러시아인들이 많이 찾는 관광 쇼핑센터가 되었다.
부산진시장 등의 재래시장 외에도 동구에는 가구 거리, 자개 골목 등 특정 업종이 집중한 시장들이 있다. 범일동에 소재한 가구 거리는 길이 1㎞ 거리에 장롱, 찬장, 책장, 책상, 침대, 경대 등 가구를 판매하는 점포가 100여 곳 밀집하여 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가구점이 입지하기 시작하였으며, 1960년대 후반부터는 칠기 가구 등 고급 제품이 취급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좌천동에는 자개 골목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자개 골목에는 나전칠기에 사용되는 자개 공예품을 가내공업으로 생산하는 점포가 밀집되어 약 40여 개의 점포가 있다. 동구의 주요 먹거리촌은 초량에 형성된 돼지갈비 골목이다. 초량동 텍사스 거리 뒤편 복개천을 중심으로 돼지갈비 골목이 형성되어 있다.
매년 10월 좌천동에서는 가구 축제가 열린다. 좌천동 가구 상가의 상권 회복을 위해 1992년부터 해마다 열렸으나, IMF 사태 등으로 일시 중단됐다가 2002년부터 다시 개최되고 있다. 이 축제에서는 공예품 및 가구 전시 등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린다.
부산 청관거리에서는 매년 10월 상해거리축제가 열리고 있다. 상해거리 전역과 화교 소 · 중 · 고등학교, 부산역 등지에서 개최되며, 외국인 장기자랑과 용춤, 사자춤, 경극 등의 중국 전통공연 행사, 중국음식 경연 대회 등 중국 문화를 소개하는 갖가지 행사가 열리고 있다.
동구 지역의 대표적인 공원은 자성대 공원이다. 부산진 성이 위치하였던 성터인 자성대를 보수하고 누각을 세워 조경을 하여 역사의 장이자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조성하였다.
동구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두모포라 불렸으며, 일부 지역은 고관이라고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행정구역을 재편하면서 수정동이란 지명이 처음 사용되었다.
두모포 왜관이 있었던 수정동 자리는 황토가 적고 지면에 모래가 많아서 비가 와도 신발에 물이 묻지 않으며, 맑은 샘이 솟아나는 자리라고 하여 수정동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한편, 지금의 수정동과 초량동 뒤를 감싸고 있는 산을 사병산(四屛山)이라 하였는데, 수정동 뒷산은 마이성(馬餌城 또는 馬里城)이라 불렀다. 이 성의 정상에는 큰 분지가 있었는데, 그 일대는 조금만 파도 크고 작은 수정이 나왔다 하여 그 산을 수정산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산 아래의 마을 이름도 수정동이라 호칭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1949년 동제 개편에 의해 수정1·2·3·4·5동으로 분동 되었다. 2008년 1월 수정3동이 수정2동에 통합됨으로써 수정1·2·4·5동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구의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지명은 『동래부지』에 수록된 좌자천(佐自川)에서 유래되었다. 좌자천은 가야산에서 시작되어 지금의 수정동 중앙을 거쳐 부산진 동쪽을 돌아 바다로 들어가는 작은 계류천이었다. 좌자천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곳이 바다의 입구이므로 태풍 피해가 잦은 곳이라는 설과, 물이 깊지 않고 잦은 물이었다는 설, 골짜기 아래에 있는 자지내 마을이 한자로 표기되면서 좌자천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한편 범천 증산성은 일명 좌성(左城)이라 하였는데, 일제강점기 부산면에는 좌천동과 좌일동, 좌이동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이에 좌성 주변을 좌1·2동이라고 하고, 원래 좌자천 하구에 있는 마을을 좌천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1959년 동제 개편에 의해 분동 되었고, 인구 변동에 의해 통폐합되어 좌천동1·4동이 되었다. 2015년 7월 좌천1동과 좌천4동이 통합하여 좌천동이 되었다.
동구의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다. 부산역이 소재하고 있어 부산의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다. 지명은 이곳의 한글 지명인 ‘샛뛰’에서 유래되었다. 샛뛰는 억새 · 갈대라는 뜻의 ‘草’자와, 뛰 ‘梁’자의 음을 따서 지은 것이다.
한편, 초량동은 조선 후기 해정리라고 하였으며, 고지대에는 고분이 있었고, 해변에는 노송이 울창하였다. 1959년 동제 개편에 의해 분동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5년 12월 초량5동이 초량3동에 통합되었고, 2008년 1월 초량4동이 초량6동에 통합됨으로써 현재 초량1·2·3·6동이 있다.
동구의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동천을 경계로 남구와 접하고 있으며, 지명은 일제강점기 범천1리와 범천2리를 합병하여 이들 지역의 약칭으로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 현재의 범천은 범6동에서 범1동으로 내려오는 계곡을 일컬으며, 호랑이를 뜻하는 ‘범’이라는 한자 음을 빌려 표기한 데서 유래되었다.
한편, 자성대라 불리는 부산진 지성이 있는 곳은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와 부산 성내리라고 불렸는데, 이도 범일동에 흡수되었다.
1959년 동제 개편과 1975년 일부 지역이 남구에 편입되면서 범일3동은 폐지되었다. 2008년 1월 범일6동이 범일4동에 통합됨으로써 현재 범일1·2·4·5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