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구(부산광역시) (())

부산광역시 북구청
부산광역시 북구청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부산광역시 북서부에 위치한 구.
정의
부산광역시 북서부에 위치한 구.
개관

동쪽으로는 금정구, 서쪽으로는 사상구, 남쪽으로는 부산진구, 북쪽으로는 김해시 대동면과 접해 있다. 동경 128°59'∼129°04', 북위 35°11'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은 39.36㎢, 인구는 31만 484명이다.(2015년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13개 행정동(5개 법정동)이 있다. 구청은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2동에 있다.

자연환경

동부 지역은 금정산맥이 북에서 남으로 이어 달리면서 금정산·백양산 등의 산지를 이루며 비교적 험준하다. 서쪽에는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어 하안에 퇴적지형을 형성하며, 인공제방이 축조되어 있다. 금정산지와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부분에는 산록 완사면과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남쪽에 있는 만덕고개는 부산의 동래구와 서부 부산을 잇는 주요 교통로이다.

백양산과 금정산이 부산진구, 금정구와의 경계를 이룬다. 화명동에 소재한 상학봉(上鶴峰)은 금정산 봉우리의 하나로, 해발 산 정상에 서면 낙동강은 물론 멀리 김해평야와 김해시가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경관이 수려한 산봉우리이다. 구포동에 소재한 범방산은 구포초등학교 뒤쪽에서 모라동쪽 구포도서관에 이르는 백양산의 줄기 중 하나이다. 호방산 또는 범바위산으로도 불린다.

만덕동에 소재한 만덕고개는 해발 290m에 있는 고개로 금정산맥의 북동부 상계봉과 백양산 사이의 교통로이다. 지명은 인근의 만덕사에서 유래되었다. 원래 지명은 기비현이었다. 금정산맥에 이르는 산록에는 많은 계곡이 발달되었다. 구포동에 소재한 박수골은 대리천 하구에서 구포시장터를 지나 서쪽을 향해 낙동강변으로 넘어가는 골이다. 지명은 고갯길에 있는 화강암이 오랜 세월 동안 풍화작용을 받아 모래처럼 부스러지기 쉬운 썩돌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되었다. 이외에 사당골, 비석골, 도둑골, 음정골 등이 있다.

북구 내 서부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금정산맥 산지에서 발원한 여러 계류천이 낙동강 좌안으로 유입된다. 이중 대표적인 하천은 화명동에 소재한 대천천이다. 대천천은 금정산에서 발원하여 산성마을인 금성동을 관류하다가 남서쪽으로 낙동강 본류에 유입하는 계류천이다. 길이 3.5㎞로 화명천으로도 불린다. 상류와 중류는 급경사이나 하류인 대천마을에 이르면 갑자기 경사가 완만해진다. 이때문에 대천천은 예부터 집중호우시에 자주 범람하였다. 중류 계곡인 산성골은 수려한 암반과 그 위로 흐르는 맑은 물, 그리고 웅덩이와 작은 폭포가 이어지면서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구포동에는 대치천이 흐른다. 구포 일대의 주거밀집지역 및 시가지를 관류하는 도시하천으로 구포천으로도 불린다. 유로의 연장이 3.22㎞의 준용하천이다. 하폭은 대부분 7∼12m 정도로 협소하여 호우 때 유수가 범람하여 저지대가 침수되어 자연재해를 입기도 한다.

낙동강 하류에 위치하고 바다에 가까워 기온의 연교차가 적은 온대해양성기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겨울철에는 동남에 금정산맥이 이어져 있어 경계하고 있는 금정구와 약간의 기온차이를 보인다. 봄철에는 이동성 저기압의 영향으로 강수량이 많으며 여름, 가을철에는 태풍 경로상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아 풍수해을 입기도 한다. 연평균기온은 14.9°C, 8월 평균기온 25.2°C, 1월 평균기온 2.8°C로 비교적 온화한 편이고, 연중 강수량은 1386.5㎜이다. 상대습도 59.9%, 평균풍속은 3.1㎧ 이다.

역사

북구 지역은 낙동강을 끼고 있는 지리적 조건과 따뜻한 기후 등의 좋은 자연적 조건으로 일찍부터 사람들이 정착하여 생활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금곡동 율리에서는 이를 잘 보여주는 조개더미가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토기와 석기들이 출토되어 신석기문화 규명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구포 말등고개의 조개더미와 화명동 수정마을 뒷산에서 발견되는 마제 돌도끼 등은 이 지역에 청동기 문화가 발달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북구 지역은 삼한시대에 거칠산국에 속했으며, 삼국시대에 신라에 병합되어 505년(지증왕 16)에 거칠산군 대증현, 757년(경덕왕 16)에 동래군 동평현이 되었다.

고려시대의 북구 지역은 만덕사란 사찰로 유명했다. 『고려사절요』에 “충해왕의 서자 석기의 머리를 깎아 만덕사에 두었다”라는 기록이 있고, 『고려사』에도 관련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후기 정치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조선 전기 사료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사찰 지명이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지역은 1021년(현종 13) 양산군 동평현에 속했다.

조선시대인 1428년(세종 10년) 이 지역은 동래현의 속현이 되었다. 1547년(명종 2)에는 동래현이 동래부로 승격하면서 동래부에 속했다. 이후 구포지역은 1740년(영조 16) 양산군에 속했다.

『양산군지』(1899)에 감동진, 즉 구포에는 창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를 남창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구포에는 그 창지가 남아있다. 이곳은 수참이 설치된 곳으로 낙동강을 거쳐 서울로 왕래하는 왜인의 편의를 돕는 곳이었으나 나중에 왜인과 무역을 하는 요충지로 변해갔다. 이곳은 경부철도가 개통되기 이전, 물자의 집산지이자 교역지였고, 특히 포목·석유·소금·젓갈·명태 등을 바닷배에 싣거나 아니면 육로로 실어와 이를 내륙의 왜관·안동·상주 지역까지 올렸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주변의 생활 물자를 집산하는 구포장(매 3·8일)은 항상 번성하였다.

한말에 구포지역은 양산군의 행정적 지배에서 동래부의 지배로 넘어왔다. 1904년에는 동래부 계서면 구포리, 1906년에는 동래부 좌이면 구포리로 나타나고 있다. 1910년에는 조선총독부의 지방관제에 의해 구포는 부산부로 편입되었다. 1914년에는 다시 동래군의 소속으로 되돌아갔으며, 면의 명칭도 좌이면에서 구포면으로 변화되었다. 그 후 1943년에는 면에서 읍으로 승격되면서 구포읍에는 현 북구의 행정영역인 구포리·덕천리·만덕리·화명리·금곡리·금성리가 소속되었다. 구포지역이 가지고 있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일제강점기인 1912년 6월 이곳에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은행이 설립될 수 있었다.

부산 서북부의 관문 역할을 하면서 김해·양산을 포함하는 광역도시권의 교통중심지로 남해고속도로가 제2낙동교를 통과하며, 구포대교와 경부선 철도의 구포역이 위치하면서 빠른 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주택지구로는 만덕동·화명동·금곡동 등을 중심으로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특히 화명동과 금곡동은 대규모 택지조성과 더불어 서낙동강변의 신흥주거지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1963년 부산시로 편입되어 구포리는 구포동으로 변화되었고, 이후 구포읍과 사상면이 편입되어 각기 부산진구의 구포출장소와 사상출장소의 관할이 되었다.

1975년 부산진구의 구포·사상출장소를 통합해 시 직할 북부출장소가 되었으며, 1978년에 북구로 승격되었으며, 이때 편입한 김해군 대저읍·가락면·명지면 일원은 1983년 시 직할 강서출장소가 되었다.

1989년 강서출장소가 강서구로 승격, 분리되었다. 1995년에는 삼락동·모라동·덕포동·괘법동·감전동·주례동·학장동·엄궁동 등 과거 사상출장소 관할 지역이 사상구로 분리되었다. 법정동으로 구포(龜浦)·금곡(金谷)·화명(華明)·덕천(德川)·만덕(萬德) 등 5개 동이 있다.

유물·유적

문화재로는 만덕사지(부산광역시 기념물, 1972년 지정)가 있는데, 1973년 이 절터가 주택단지로 개발되면서 현재 절터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절터의 중앙부에 장방형의 축대(동서 68m, 남북 54.3m, 높이 약4m)가 거의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데, 이곳이 만덕사의 금당지로 추정되고 있다.

이 축대를 중심으로 뒤편과 동북 및 서북쪽 200m 정도 내려간 시냇가에는 당간지주가 있어, 여기가 만덕사의 어귀임을 보여준다. 이 당간지주는 1972년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 두개의 돌기둥 중 한개 기둥만 남아 있다. 기단부는 파손되었고 간대로 보이는 석재가 돌기둥의 하단에 놓여 있다. 돌기둥의 규모는 가로 40㎝, 세로 60㎝에높이는 3.5m이다.

돌기둥의 바깥쪽 중앙에는 위아래로 융기된 선대가 조각되어 있고, 꼭대기 부분은 바깥으로 깎아 호선을 그리면서 2단의 굴곡을 두어 공간미를 나타내었다. 돌기둥 상단 안쪽에는 장방형의 간구를 두었는데 간공은 없다. 만덕사 창건 때와 같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짐작되며 주변의 만덕사 국장생표와 더불어 만덕사지의 경계를 알려주는 자료가 되고 있다.

한편 금당지 주변에서는 와당과 무문전 등이 발견되었고, 석탑, 불상대좌, 석등 등의 석재가 주위 일대에 넓게 흩어져 있었는데, 1979년 부산시립박물관에서는 이러한 석조유물들을 수습하여 삼층석탑 1기와 불상대좌 일부를 박물관으로 옮겨 복원·건립하였다. 이때의 조사에서 만덕사에 석조불상과 삼층석탑 2기가 건립되어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만덕동 병풍암에는 마애석불이 새겨져 있다. 병풍사 또는 병풍암, 석불사라고도 하는 이 사찰은 상계봉 동남쪽의 8부 능선에 있는 바위 벼랑에 있다. 1930년 조용선 선사가 창건한 절로 바위에 십일면관음보살과 동자상을 새겼다.

금곡동 율리 서당골에는 신석기시대 후기에서 말기에 이르는 유적으로 패총이 있다. 이 패총은 약 200∼250㎝ 높이의 병풍처럼 두른 바위 입구에 형성된 깊이 2.8m, 높이 약 2m 정도의 바위 그늘에 의지해서 만들어진 주거지와 패총의 복합유적이다. 1972년에 부산대학교박물관에서 전면 발굴하였기 때문에 현재는 암굴만 남아있다.

화명동에는 고분군이 있다. 고분군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해발 약 50m의 나지막한 작은 구릉으로 구릉의 정상과 동쪽 및 남쪽으로 뻗은 능선 위에 축조되어 있다. 서쪽으로는 500m 떨어져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 화명동 고분군은 동래 복천동, 김해 대성동 고분군보다 규모가 작은 중·소형분인데도 불구하고 이들 대형 고분군보다는 빨리 수혈식 석곽묘를 채용하고 있다. 이는 고대사회에서 새로운 문물의 수용관계를 규명할 수 있는 고분군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덕천동 고분군은 낙동강 하류의 동쪽 기슭이자 금정산의 서쪽 기슭인 덕천동 계곡에 소재한다. 고분군에서 전 시기의 1회용 단장묘인 수혈식 석실묘에서 여러 차례 추장을 한 가족묘가 발굴되어 묘제가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는 가야 말기의 고분군으로 이 시기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구내에는 개인소장으로 여러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효자천승호 열녀이씨 정려교지(1872)는 효자 천승호를 통훈대부사헌부감찰(通訓大夫司憲府監察)로, 열녀 이씨를 숙인(淑人)으로 증직(贈職)한 교지와 양산유림의 추천서이다. 교지·동문록 서간문(1615)은 심야항공의 무과 합격 교지이다. 허통윤소 진사입격 교지(1613)는 화명동 출신 윤소공이 18세 때 진사로 합격한 교지이다.

동쪽 산지는 금정산성을 경계로 금정구와 접한다. 만덕동에 소재한 상학봉 망루는 산성을 지키는 방어시설 중의 하나이다. 높이 628m의 봉에 망루가 있었으며, 현재 복원되어 있다. 일명 상계봉이라고도 한다. 봉우리는 각양각색의 바위로 되어 콩등바위, 베틀굴, 영감바위, 할멈바위, 삿갓바위, 수박바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구포왜성(부산광역시 기념물, 1972년 지정)이 있다. 일명 ‘덕천동왜성’으로도 불린다.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왜장 등이 김해와 양산 사이에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쌓은 일본식 성으로 김해성의 지성이다. 성은 금정산의 한 지맥이 끝나는 덕천동에 위치하여 서편으로는 낙동강을 끼고 그 아래에 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전략상의 요지에 해당되었던 곳이다. 얼른 보아 왜성터 임을 알 수 있는 흔적을 남기고 있으며, 성 위의 석축터는 거의 완전하며 누각지(樓閣址) 1개소와 성벽은 최고 높이 10m, 최저 높이 8m가 남아 있다. 이 성은 일명 ‘의성(義城)’ 혹은 ‘감동포성(甘同浦城)’이라고도 한다.

북구 지역은 일제강점기 이 일대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근대와 관련된 유적이 있다. 구포동에는 한국 최초의 지방은행인 구포저축주식회사터가 있다. 구포은행이 1912년 6월에 설립되었으나 이 은행에 앞서는 저축주식회사는 1908년(융희 2)에 설립되었다. 일제강점 이전에 이미 설립된 이 회사는 한국지방금융기관으로 선구적 역할을 했다. 이 저축회사는 구포를 중심한 지역의 물산객주와 지주 70여 명이 합자하여 설립한 것으로, 1912년 구포은행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구포동에는 1982년 국가 지정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팽나무가 있다. 구포역에서 동쪽으로 약 1㎞ 떨어진 산기슭에 소재하며 나무 주위에는 돌담이 있다. 이 팽나무는 지면 위로 노출된 곁뿌리 7개 정도가 굴곡을 이루고 있다. 원줄기는 비대 생장의 불균형한 모습을 보이고 요철이 심한하다. 나무 높이는 19.7m로. 수령은 약 500년 이상으로 보는 노거수이다. 팽나무 아래에는 당산이 있는데, 때문에 이를 ‘당산목’이라고도 한다.

교육·문화

북구에는 일찍부터 근대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구포에는 당시 지방 유지들이 신학문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을 모으면서 구포 사립구명학교를 건립하였다. 1906년 발기하여 1907년 개교하였으며, 구포초등학교의 전신이다. 여기에는 백산 안희제의 역할이 있었다. 구명학교에 이어 화명동에서도 일찍부터 신학문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의지에서 1908년 사립화명학교가 세워졌으며, 예비과 1년, 본과 4년, 보습과 2년에 1회 입학생은 50여 명으로 시작되었다. 초대교장은 윤대의였으며, 1918년 구포의 구명학교와 합해져 구포공립보통학교로 발전하였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27개교, 중학교 16개교, 고등학교 9개교와 부산정보대학과 한국폴리텍7대학 부산캠퍼스가 있다.

구포동에는 이곳 문화활동의 중심기관인 낙동향토문화원이 있다. 1988년 개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역전통문화의 계발, 보급, 전승, 선양과 향토사 및 향토문화 연구 그리고 자료수집, 보존, 보급활동 등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민속

낙동강 하류 지역인 이곳에는 동네마다 당산나무가 있고 새해가 되면 정월대보름날 자정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해마다 정초가 되면 구포 대리마을에서도 풍물을 치는 사람이 앞장서서 동네사람들과 함께 당산 앞에서 지신밟기를 시작하여 가가호호를 돌면서 지신풀이 하던 풍습이 전해 내려온다.

지신밟기는 모든 액이 소멸되고 한해의 복이 보장되는 것으로 믿어온 백성들의 기원이 담긴 민속놀이이다. 세시풍속으로는 구포 대리지신밟기, 달집태우기, 널뛰기, 그네뛰기, 연날리기, 다리밟기 등 민속놀이 행사가 있었다.

구내의 여러 자연마을에는 당산이 있다. 금곡동에는 동원당산, 공창당산, 화정 산제당, 만덕동에는 상리당산, 중리당산, 사기당산, 화명동에는 화정고당, 용당고당, 수정 고당, 대천리 고당 할매집 구포동에는 최씨 할배·할미당, 대리당산, 덕천동에는 남산정 당산 등이 있다.

설화·민요

구내의 상계봉에는 여러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닭과 연관된 전설이 있는데, 만덕동의 사기마을 아래쪽 풍수지리설로 명당으로 알려진 곳에 홋뫼를 만들어 놓았더니 이 상계봉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났다는 전설이 있다.

이곳 구포장에는 다음과 같은 구포장 타령이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샛바람 반지(바람받이) 하단장/ 너무 칩어서 몬뽀고(못보고)/ 나리(나루) 건너 명호(鳴湖-명지)장/ 선개(船價-배삯) 없어 몬뽀고/ 골목골목 부산(釜山)장/ 질(길) 못 찾아 몬뽀고/ 벌판 겉은 김해장/ 여빗돈이 없어 몬뽀고/ 강건너 떡돌(덕두)장/ 나릿배가 없어 몬뽀고/ 꾸벅꾸벅 구포장/ 허리가 아파 몬뽀고/ 고개 너머 동래장/ 다리가 아파 몬뽀고/ 미지기 짠다 밀양장/ 싸게를 묵어서 몬뽀고/ 아가리 크다 대구장/ 너무 넓어서 몬뽀고/ 이산 저산 양산장/ 산이 많아서 몬뽀고/ 울루루 갔다 울산장/ 하도 바빠 몬뽀고/ 언제 볼까 언양장/ 어정어정 몬뽀고/ 남실남실 남창장/ 물이 짚어서 몬뽀고/ 들락날락 입실(入室)장/ 문이 닫혀 몬뽀고/ 코 풀었다 흥해(興海)장/ 미끄러버서 몬뽀고/ 똥 쌌다 구례장/ 냄시가 나서 몬뽀고/ 깍아 말린 감포(甘浦)장/ 딱딱해서 몬뽀고/ 이리저리 몬뽀고/ 장꾼 신세가 말 아니네/ 이장 저장 몬뽀고/ 장타령만 하는구나/ 이장 저장 다 다녀도/ 우리 구포장이 제일 일세

산업·교통

농업은 낙동강 하천 부지에서 시설농업이 이루어진다. 이 하천 부지는 인공제방을 축조하면서 형성된 부지로 소유권은 부산시에 있다. 농민은 매년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농지를 경작한다. 토질이 매우 비옥하며, 금정 산맥의 산록에서 국지적으로 텃밭 농사가 이루어진다.

한편 사상공업단지가 발달해 있는 지역이 사상구로 분리되어 나감으로써, 종전의 공업단지지역이 주거지역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제조업체의 생산활동은 부진하다. 주요 업종은 신발, 화학·섬유, 철강·기계 등이며, 신발산업의 침체와 인력난 등으로 대부분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상업기능은 구포역와 덕천로터리 주변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구포는 조선시대 낙동강 수운과 동래를 잇는 포구로 각종 산물이 집산되던 곳이었다. 지금도 구포 시장에는 3·8일에 김해·양산 일대의 보부상과 노점상·소비자들이 모여 정기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매달 3일과 8일에 열리는 장날이 되면, 노점상들이 늘어나면서 시장은 주변 지역으로 확대된다. 5일장은 일출에서 일몰까지 열린다.

상인의 규모는 계절에 따라 꽤 차이가 있으나, 평균 1,500∼2,000명 정도 규모이다. 김해·양산·밀양·창원 등 경상도 상인뿐만 아니라 경북·전남 지역 상인 등 전국의 상인이 모인다. 주거래 품목은 농산물·수산물·해산물 등을 비롯하여 공산품, 일용품, 잡화 등이 중심이다.

구포장의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1871년에 간행된 『영남읍지』이다. 이 읍지에 보면, 구포장은 3·8일장으로 읍내장(2·7일), 좌수영장(5·10일), 부산장(4·9일), 독지장(1·6일)과 함께 동래 지역의 5일장 체계를 이루고 있다. 구포는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기 이전까지는 물산의 중요한 집산지이며 교역지였다.

경부선 구포역, 구포대교, 남해고속도로 등에 진입로가 있는 북구는 부산 서북부의 관문으로 교통의 요충지이다. 최근에는 지하철 2·3호선이 개통되어 교통은 매우 편리하다. 낙동강에 연해 있어 조선시대부터 교통의 요충지가 여러 곳 있었다.

금곡동에 소재했던 동원나루터는 김해의 대동면과 상동면 사이를 오가는 뱃길의 선착장이자 멀리 남쪽으로 구포나루터까지도 수시로 나룻배가 오르내리기도 한 곳이다. 조선 세조 때 김해 생림면에 있던 수참이 이곳 나루터로 옮겨오자 동원나루는 왜인과 무역을 위한 요충지가 된 유서 깊은 나루터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곳에 있었던 수참은 일본인들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일본어로 ‘시찌맨’이라 불리기도 했다.

덕천동에는 조선시대 교통 역원이었던 기찰이 있었다. 덕천동의 의성 아래 덕천천 물길이 낙동강으로 들어서는 자리를 옛날은 기찰이라 불렸다. 이곳 기찰은 왜인들이 왜관을 거치지 않고, 개항 후는 해관을 거치지 않고 낙동강 물길을 따라 배로써 밀무역을 하는 잠상을 단속한 수검소였다.

구포동에는 삼세조창이 있었다. 이곳에 조창이 생기게 된 것은 1682년으로, 당시는 남창이라 하였다. 이 구포의 삼세조창을 감동진 삼세조창 또는 감동진 조창이라고도 했다. ‘감동진’이란 구포나루터의 다른 이름이다.

낙동강에는 여러 대교가 건설되어 있다. 덕천동에 소재한 구포 낙동강교는 남해고속도로의 교량으로 1973년 개통되었다. 덕천동을 기점으로 시작하면서 구포 인터체인지가 건설되었다. 이 인터체인지는 남해안고속도로에 진입하는 3개의 육교로 구성되었다. 한 개의 육교는 낙동로와 연결되고, 두개의 육교는 만덕로와 연결된다. 길이 1355m로 건설 당시 단일 교량으로는 전국에서 가장 긴 다리였다.

일제강점기 세워진 구포다리는 1933년 3월 7일 준공되었다. 김해군 대저면 사덕리와 동래군 구포읍 구포리를 잇는 다리로, 당시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다리였기 때문에 낙동장교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관광

금정산맥과 낙동강에 연해 있어 관광자원이 비교적 풍부하다. 만덕고갯길에서 산성 남문 쪽으로 산길을 따라 오르면 정상에 금정산성 남문이 나타난다. 이곳 남문 아래에 있는 음식점 단지가 만덕촌이다. 이곳에 상계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와 산성 동문으로 연결되는 등산로가 나 있어 금정산을 종주할 수 있는 기점이 되고 있다.

애기소의 전설이 깃든 화명동의 대천 냇물은 여름이면 계곡 전체가 인파로 덮이는 곳이다. 계곡 상류에는 금정산성 서문이 옛 모습대로 복원되어 있고 양쪽으로 연결된 성터의 유적은 청소년의 문화유적탐사 학습장으로서도 좋은 관광자원이다.

낙동강에 연해 있어 먹거리가 풍부하다. 특히 구포는 봄에 딸기, 가을의 구포 배로 유명하였다. 이 지역일대의 배는 일제가 낙동강의 둑을 조성하여 농경지로 형성하면서 배나무를 심은 데서 비롯되었고 인근의 삼락동 역시 제방의 건설과 함께 비옥한 농경지로 바뀌면서 딸기 재배가 이루어졌다. 대동면과 대저동에서 재배된 배와 딸기는 구포선창에서 배로 실려 일본으로 갔고, 구포에서 경부선, 경의선 기차를 통해 만주까지 갔다.

구포에는 구포국수로 유명하다. 제분공장과 국수공장이 있었으며 6·25전쟁으로 피난민이 많이 모여들면서 구포시장에는 국수를 널어 말리는 곳이 많아졌다. 이 국수를 영세 행상인들이 기차로 부산에 공급하고 또 삼랑진·마산 등지로도 공급하여 생계를 이어 나갔다. 1960년대부터 대기업의 대량생산으로 구포국수는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지금도 구포에 2∼3곳의 국수 공장이 남아 있으며 외지에서도 구포국수의 이름을 빌려 생산을 하고 있다.

구포동에는 광복 이후 구포선창 지역에서 가건물을 짓고 거북촌이라 하여 잉어회와 장어구이를 팔던 요리집이 즐비했으나 1970년대에 철거되었고, 현재 금곡동 동원 마을의 장어구이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장어마을’로 지칭되고 있는 이곳에는 20가구 중 16가구가 요리점을 경영하고 있으며, 부산의 7진미 중의 하나로 소개되고 있다.

북구의 주요 축제로는 ‘낙동 민속달맞이 행사’, ‘구포장터 만세재현 축제’, ‘낙동 민속예술제’ 등이 열린다. ‘낙동 민속달맞이 행사’는 낙동문화원 주관으로 매년 정월대보름 하루 동안 열리며 전통 세시풍속을 재현한다. 축제 내용으로는 당산제, 길놀이, 정월민속놀이, 구포대리지신밟기, 풍물한마당, 영남사물놀이, 판소리, 낙동두들소리와, 월령기원제, 달집태우기, 다리밟기, 쥐불놀이, 대동놀이 한마당 등이 있다.

매년 3월 18일에는 ‘구포장터 만세재현 축제’가 개최된다. 구포장터 3·1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9일(음력 2월 28일) 구포장날 농민·상인·노동자로 구성된 20∼30대 1,200여 명의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일제에 대한 저항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매년 10월에는 ‘낙동 민속예술제’가 개최된다. 축제의 주요 내용으로는 민속경기로서 동대항 줄다리기, 줄넘기, 씨름대회, 제기차기, 세끼꼬기, 팔씨름 등과 민속경연으로 동대항 풍물경연대회, 전통무용경연, 민요경창대회 등이 있다.

동(洞)
  1. 화명동

북구의 서부 낙동강 연안에 위치한 동이다. 지명은 이곳을 흐르는 화명천과 관련이 있다. 화명의 지명 유래는 회붉이에서 온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자연마을로 대천·와석 또는 화잠·용당·수정마을 등이 있다. 대천마을은 화명천을 대천천이라 부르는데, 큰 냇물이라는 뜻의 대천이라는 마을 이름으로 그대로 불렀다. 용당 마을은 파평윤씨를 중심으로 낙동강변에 형성된 동족마을로, 용두골이 용등골로 불리다가 용당으로 된 것으로 전해진다. 화잠마을은 마을 사람들 이야기로는 원래 큰 바위가 누운 것 같이 보여서 와석이라고 했으나 그 이름이 좋지 않아서 뒤에 화잠으로 고쳤다는 설이 있다.

아파트지구 건설로 인해 인구가 급증하였으며, 화명동1·2·3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 금곡동

북구의 북쪽 낙동강 연안에 위치한 동이다. 지명은 금정산의 주봉인 고당봉에서 낙동강변 쪽으로 뻗어 내린 첫 골짜기라는 의미로 붙여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금정산의 서쪽 골짜기에 금이 나오는 곳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금맥을 찾아 뚫어 놓은 굴이 많았던 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 역원으로서 동원진 나루터에 설치된 수참은 일본과 교역을 하던 곳이었다. 양산군에 속했던 금곡동은 하동방, 동원촌과 공창촌이었다가 뒤에 구포쪽과 합해져서 좌이면 동원리, 공창리가 되었다. 1914년 동래군 구포면 금곡리가 되었으며 현재 공창(公昌) 동원(東院) 화정(花亭) 율리(栗里) 네 마을이 있다.

  1. 만덕동

북구의 중부 내륙에 위치한 동이다. 지명은 임진왜란 때 금정산 기슭인 이곳에 1만여 명의 피난민이 피난을 와서 모두 화를 면했다고 하여 유래되었다.

고려시대 유명한 사찰인 만덕사지가 있으며, 이곳에 있는 만덕고개는 과거 기비현 혹은 사비현으로 불렸다. 만덕고개는 동래 지역과 서부 경남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고개로서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사기, 상리·중리·하리 등의 4개 마을과 광복 이후 형성된 신촌마을, 그리고 근래에 개발된 정책 이주촌과 맞은편에 신만덕아파트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만덕동은 도시의 팽창과 신흥주택지로 발전하였고, 인구 증가로 1989년 이후 만덕1·2·3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 덕천동

북구의 남부 낙동강에 연한 동이다. 원래의 덕천동은 4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었다. 넓은 의미에서 구포를 포함한 지역으로 불려지기도 했으나 마을 이름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문헌상에는 덕곡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한동안 구법곡이라고도 불렀으며 감동포 또는 감동진이라고도 하여 구포에 포함시켜 불리기도 하였다.

덕천동은 새로운 주택지로 변모하면서 아파트 신축 등으로 인구가 급증하여 1983년 이후 덕천1·2·3동으로 분동되었다.

  1. 구포동

북구의 남부 낙동강 연안에 위치한 동이다. 북구의 중심지이며, 지명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구를 갑우 또는 거뵈로 보아 ‘거뵈개’라는 설과 구를 검으로 해석하여 ‘굿개’라는 설이 있다. 정인보는 구포라는 말은 ‘거뵈개’를 한자로 적은 말이고 ‘거뵈개’는 낙동강 물 이름인 ‘갑우내’에서 왔다고 정리하기도 했다.

구포역과 구포시장이 있어 조선시대부터 이 일대 물자의 집산지가 되었으며 지금도 정기시장이 열리고 있다. 계속적인 인구 증가로 1979년 이후 구포1·2·3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참고문헌

『통계연보』(부산광역시북구, 2008)
『부산통계연보』(부산광역시, 2005)
『구정백서』(부산광역시북구, 2005)
『부산교육통계연보』(부산광역시교육청, 2005)
『부산의 당제』(부산광역시, 2005)
『한국지리지-경상도편』(건설부국립지리원, 2005)
『부산의 민속문화』(세종출판사, 2003)
『부산민요집성』(세종출판사, 2002)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2)
『부산지명총람』(부산광역시, 1995-2002)
『부산의 문화재』(부산광역시, 1993)
『북구향토지』(부산광역시북구청, 1993)
부산광역시 북구(www.bsbukgu.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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