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으로 수영구, 서쪽으로 동구, 북쪽으로 부산진구 · 연제구와 접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남해에 연한다. 동경 129°03'~129°07', 북위 35°05'~35°09'에 위치한다. 면적은 26.81㎢이고, 인구는 28만 3101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7개 행정동(6개 법정동)이 있으며, 구청은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에 있다.
황령산이 구의 북쪽을 둘러싸고 있으며, 남쪽 지역은 부산만과 수영만의 경계를 이루는 우암반도가 돌출해 있다. 적기반도로도 불리는 우암반도는 급경사의 암석해안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현재 이기대공원을 제외하고 대부분 매립되어 있다. 반도 말단부에 오륙도가 있다.
대표적인 산은 북쪽에 위치한 황령산(荒嶺山, 427m)으로 부산의 전형적인 도심지 산이다. 부산진구와 수영구와의 경계를 이루며 금련산맥 중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대부분 안삼암질로 구성되어 있는 황령산은 산정이 비교적 평탄하며 곳에 따라 소규모의 성채 경관을 나타내는 기반암이 노출된다.
북동쪽으로 금련산에 연결되나 오랜 지질시대를 거치면서 하천의 개석작용에 의해 해체되었다. 주위에는 곳에 따라 독립 구릉이 분포하고 낮은 산등성이도 여러 갈래로 뻗어 있는데, 특히 남동 산록은 이러한 특징이 뚜렷하다. 이 산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옛 동래부의 안산에 해당되며, 산정에는 황령산봉수대가 복원되어 있다.
이외에 구릉성 산지로 용당동의 용당산과 우암동의 우룡산이 있다. 용당산은 용의 형상을 하고 있는 산 아래에 연못이 있어 비롯된 지명이라는 설이 있다. 우룡산은 우암반도 서쪽의 한 축을 이루는 산으로서 바닷가에 위치해 있어 내륙으로의 침식을 막아주고 있다.
지금은 산 중턱까지 주택이 들어서 있고, 말단부는 매립으로 제7부두가 자리 잡고 있다. 또 산지를 따라 여러 계곡이 형성되어 있으며 골 안에 취락이 발달해 있는데, 지게골은 문현동에서 대연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아래에 위치한 대표적인 골짜기이다.
동구와 경계를 이루는 동천을 비롯해 대연천 · 용호천 주변과 산기슭 말단부에 분포하는 평지를 따라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해안 매립지는 항만 및 공장부지로 이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하천으로는 용당천과 동내천이 있다. 용당천은 용당산에서 발원하여 신선대 부두로 흘러드는 소하천으로 지금은 복개되어 유수를 찾아볼 수 없다.
동내천은 장산봉과 봉오리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용호동 시가지를 관류하다가 이기대 삼거리에 이르러 북동쪽으로 유로를 바꾸면서 남천만으로 흘러드는 소하천이다. 과거에 동네거렁이라 불리던 이 하천은 하구 부근을 제외하면 복개되어 유로를 찾아볼 수 없다.
해안에는 여러 도서와 포구가 발달하여 있다. 대표적인 섬은 오륙도로 2007년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오륙도는 용호2동 승두말로부터 부산만을 향해 형성된 5개의 해식 이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섬으로 육지로부터 차례로 우삭도, 수리섬, 송속섬, 굴섬, 등대섬으로 명명되어 있다.
감만동에 소재한 감만포는 조선시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1635년(인조 13)부터 1652년(효종 3)까지 17년 동안 자리잡고 있었을 정도로 군사상 요충지였다. 1970년부터 항만 매립이 진행되면서 지금은 제8부두를 비롯한 현대식 항으로 변모하였고, 배후에는 수출입 보세장치장, 창고 등의 항만지원시설이 입지하여 있다.
석포는 한적한 포구로 1950년까지 지금의 부산박물관까지 배가 드나들던 선착장이 있어 어선이 왕래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부산공업고등학교와 남부운전면허시험장이 자리해 있다. 우암동에 있던 우암포는 제7부두 지역에 해당된다.
남해안에 연해 있어 전형적인 온대 해양성 기후를 보이고 있다. 연평균기온은 13.8℃이다. 연중 기온이 가장 높은 시기는 8월로 30℃을 넘는 일수는 평균 14일이다. 가장 추운 시기는 1월로 0℃ 이하의 일수는 평균 20일이다. 연평균강수량은 1,381㎜로 우리나라 평균 강수량에 비해 비교적 많은 편이다.
남구와 동일 생활권이었던 수영동에서 청동기 유적인 마제석검이 출토된 예가 일제강점기 때 보고된 바 있다. 삼한 및 삼국시대 초 남구지역은 이곳에 있었던 거칠산국의 영역 하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동래군은 본래 거칠산국이었는데 경덕왕 때 동래군으로 고쳐 지금도 이를 따르고 있다. 영현이 둘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옛 장산국이다. 신라가 점유하고는 거칠산군을 두었는데,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라고 되어있다. 따라서 당시에 거칠산국이라는 소국이 존재하였고, 그 영역에 남구지역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또『신증동국여지승람』 동래현 고적조에 4개의 부곡과 1개의 향이 존재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부산 사학계에서는 이들 부곡 중 하나인 생천향이 생천언이 있었던 대연동 부근으로 추측하고 있다.
조선시대 동래부의 관할에 있었던 남구지역은 울산 개운포에 있던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임진왜란 직전 부산 수영으로 옮겨졌다가 임란 직후인 1635년(인조 13)에 남구 감만동으로 옮겨와 수군이 주둔하던 부산의 요충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곳은 왜관과 거리가 가까워 군사기밀이 누설될 우려가 있다 하여 1652년(효종 3)에 다시 오늘날의 수영으로 이전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남구지역이 동래부 남촌면 일대와 동면의 일부에 해당되었다. 당시 남촌면의 영역은 축산동, 송정리, 감포리, 동부리, 서부리, 북문외리, 남문외리, 남천리, 대연리, 석포리, 분포리, 용당리, 감만리 등이다. 일제강점기에는 현재의 남구지역이 동래군 서하면과 용주면에 소속되었다.
일제는 강점 후 해안 일대를 매립하고, 용호동 일대 염전의 경영권을 장악하였다. 통감부는 이곳에 시험제염 용호출장소를 설치하였으며 이곳 분개에서 생산된 소금은 경상도는 물론 강원도, 함경도까지 판매되었다. 그 후 조선총독부는 2만 평에 달하는 염전의 소유권을 확보하여 독점 체제로 생산하였다.
1936년에는 용주면과 남면 일부가 부산부 부산진출장소에 편입되었다. 1942년에는 동래군의 수영과 해운대의 일부가 부산부에 편입되면서, 수영출장소가 설치되었다.
광복 이후 남구지역은 부제의 폐지와 더불어 시제의 실시로 부산시에 속하게 되었다. 1953년에는 부산시 대연출장소로, 1957년에는 구제의 실시로 부산진구 대연출장소와 동래구 수영출장소로 개편되었다.
1960년대 이후 인구가 증가하면서 남구 일대는 주택지역으로 변모되었다. 대연1동은 전통적인 중산층 거주 지역으로 고급 단독주택에서 빌라형 공동주택지구가 조성되었으며, 황령산 인근의 대연동도 쾌적한 주거환경을 이루고 있다.
용호동 · 감만동 · 우암동 · 문현동 등의 지역에는 광복 후 해외 귀환민과 6·25피난민 또는 정책이주민들로 영세민 밀집지역을 이루었으나, 대단위 아파트단지 건설 등으로 신흥 주택지로 조성되었다.
1973년에는 부산시 직할 대연출장소로 승격되었다가 1975년에 남구로 승격되었고, 1995년 3월에는 수영구와 분구되었다. 법정동으로 대연(大淵) · 용호(龍湖) · 용당(龍塘) · 감만(戡蠻) · 우암(牛巖) · 문현(門峴) 등 6개 동이 있다.
1977년 당시 동명목재에서 설립한 동명불원은 비교적 현대적인 감각으로 건물이 축조되었으며 대웅전, 관음전, 극락전, 나한전, 독성각, 칠성각, 산신각, 사천왕문 등을 갖추고 있다.
한편 감만동에는 최영 장군을 모시는 사당인 무민사가 있다. 고려 말 팔도도통사 재임 중에 왜구 침탈을 막은 공이 커 그를 기리기 위해 감만동의 중심지역에 사당을 짓고 그 영령을 모셔 수호신으로 삼았다.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으나 광복 이후 마을 사람들이 매년 제를 올렸다. 1968년에는 영정과 신위를 모신 사당이 재건되었다.
남구 내의 전적류는 부산박물관과 경성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주로 소장되어 있다. 부산박물관에 소장된 전적류로 회화류와 지도류가 있다. 이중 조선 후기의 대표적 화가인 단원 김홍도가 그린 산수인물도가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은 김홍도가 60세 이후에 그린 것으로 짐작되는 작품으로 깎아지른 듯한 암벽과 한가로이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풍경을 대비시켜 배치함으로써 매우 대조적인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또한 부산 일대를 지본담채로 그린 10폭 병풍의 부산고지도가 있다. 부산이 개항된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지도는 부산 일대의 산수 형상, 성곽 주변 경물, 사원, 항만, 선박 등을 묘사하고 있다.
관내의 국가유산은 대부분 부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보 2점, 시지정문화유산 33점 외에 토기류, 옥석류, 골각류, 서화류, 금속제품 등 모두 1만여 점에 이른다. 금동보살입상(국보, 1979년 지정)은 8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불상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원숙한 조형기법으로 조성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 산청 석남암사지 납석사리호(국보, 1986년 지정)는 766년(혜공왕 2)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사리호는 경상남도 산청군 지리산 남쪽 해발 900m에 위치했던 폐사지 석조비로자나불의 대좌 중대석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상대좌석에 법사리를 봉안한 최초의 사례로 알려졌으며 비로자나불이 우리나라에 조성된 연도를 기존의 9세기 보다 1세기 앞당기게 한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표기 자체가 이두문으로 되어 있어, 불교미술과 더불어 어문학 등의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약조제찰비(부산광역시 기념물, 1972년 지정)는 1683년(숙종 9) 동래부사와 대마도주가 왜관의 운영을 위한 금제 조항 5가지를 정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원래 용두산공원의 동쪽에 있던 것을 시립박물관으로 옮겨와 야외정원에 전시하고 있다. 이외의 주요 시도기념물로는 척화비 · 동래남문비 등이 있다.
황령산 정상부에는 봉수대가 있다. 이곳에서 수영만과 부산항를 한눈으로 조망할 수 있다. 이 봉수대는 서로는 구봉봉수대, 동으로는 간비오산봉수대, 북으로는 계명산봉수대로 연결되어 당시 동래부에 소재한 봉수대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대연동에는 조선시대 국마를 키우던 마성이 있었다.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는 당시 동래부에 석포 목장에 목마 232필, 절영도 목장에 목우 276두, 오해야항 목장에 목마 793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중 석포 목장에 대해서는 『동래부지』(1740년)에 “황령산록에서 남천강변까지 15리가량인데 지금은 폐하였다.”라고 하여 구체적인 위치를 기록하고 있다.
한편 우암동에는 용두산 주위에 초량왜관이 있을 때 바다에서 표류하던 외국 사람을 서로 주고받던 표민수수소가 있었다. 감만동에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권15 동래현조에 “경상좌도 수군도안무처치사 본영이 동평현의 남쪽 7리의 부산포에 있다.”라는 기록에 따라 『부산부사원고(釜山府史原稿)』는 태종 전의 부산포를 오늘날의 감만포로 보고 있다. 한편 석포에도 수군의 만호영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21개교, 중학교 13개교, 고등학교 18개교, 특수학교 3개교가 있다. 대학 교육기관으로 부경대학교, 경성대학교, 동명대학교, 부산예술대학교 등이 있다.
부경대학교의 모체인 부산수산대학교는 1941년 부산고등수산학교로 개교하였으며 1946년 국립수산대학으로 승격하였다. 1996년에는 부산수산대학교와 부산공업대학교가 통합하여 부경대학교로 출범하였다.
대연동에 소재한 경성대학교는 1955년 경남사범대숙으로 설립, 개교한 것이 모체이다. 1979년 부산산업대학으로 승격 · 개편되었으며 1988년에 경성대학교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른다. 동명대학교는 2006년 동명정보대학교와 동명대학을 통합하여 설립되었다.
대연동에 소재한 부산문화회관은 부산문화의 중심 기관이다. 1988년 개관되었으며 야외공연장, 열린 무대, 음악감상실, 음악자료실 등과 함께 국제적 시설과 규모를 갖추고 있다.
대연동에 소재한 프랑스문화원은 1977년에 연제구 거제동에서 개관하였다가 1978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한국 · 프랑스문화협정에 따른 각종 문화행사, 독자적인 프랑스 예술, 문화행사의 주최 주관, 프랑스와 관련된 예술, 문화 업무의 후원 등을 하고 있다.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사람을 위해 알리앙스프랑세즈가 열려있다.
남구에는 3곳의 당산이 있으며 과거 자연마을이 있던 곳이다. 용호동에 소재한 당산은 장산봉 아래의 약수터 바로 위에 산신당과 본제당이 있고 용호1동주민센터 가까운 곳에 토지지신당이 있다. 문현2동의 동제당은 문현노인정 뒤편의 황령산 밑에 소재한다.
용당동에 소재한 용마산이 용이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어느 해에 용마산의 앞머리 부분인 신선대 앞을 절단하여 토지를 일군 적이 있었는데, 이곳을 잘랐을 때 땅속에 붉은 혈흔이 보였다고 한다.
그 후 이 마을에서는 예기치 않았던 재앙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농사가 잘되지 않는가 하면 이 지역의 김씨 문중의 젊은이들이 시름시름 않다가 한 해에 수십 명씩 죽기도 했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아마도 용의 꼬리 부분을 잘랐기 때문에 생긴 재앙이 아닌가 여기고, 무척 근신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960년대 후반 이후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됨에 따라 농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용호동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어업도 점차 쇠퇴하고 있다. 우암반도의 감만동에는 철강회사인 동국제강 부산공장과 GS칼텍스 부산저유소가 있고 용당동에는 현대정유 부산저유소가 위치해 있다.
1964년 용당동에 창설된 동명목재는 합판을 생산하는 회사로 신선대 아래에 입지하였다. 이곳에서 동명목재, 동명산업, 동명해운, 동명컨테이너 하차장이 들어서고, 바다에는 수입한 원목을 저장할 동명항구와 부두가 축조되었다.
그러나 1980년 5월 여러 계열회사가 한꺼번에 도산되었으며 지금은 한국해양수산연수원, 용당세관, 삼양화학, 동주산업 등 군소 업체가 들어서 있다. 동명목재에서 축조하였던 부두는 현재 용당부두 자리이다.
상업 · 업무지역은 공공 및 교육기관을 비롯해 부산문화회관 · 부산박물관 등의 문화시설이 집중되어 있는 대연동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문현동에 위치한 문현금융단지에는 한국거래소, BNK금융그룹 부산은행, 한국은행 부산본부, 기술보증기금 등이 입주해 있다. 그 외 수영로를 비롯한 간선도로변과 재래시장을 중심으로 소규모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교통은 도시고속도로와 수영로가 통과하고, 제2도시고속도로(동서고가도로) · 황령산터널과 해안선을 따라 발달한 도로에 의해 주변지역과 연결되고 있다. 1995년 대연3동과 부산진구 전포동 사이에 황령산 터널이 개통되고, 지하철 2호선이 완공되면서 교통난 해소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감만동 · 우암동 · 용당동에는 컨테이너를 처리하는 신선대부두를 비롯한 부두시설이 있다. 신선대 부두는 컨테이너 전용부두로 1990년 준공되었다. 한편 제7부두는 석탄 · 고철 및 광석, 제8부두는 특수 화물을 취급한다.
관광자원으로 부산의 상징물인 오륙도를 비롯해 신선대 · 이기대 등 천혜의 해안 자연경관과 세계에서 유일한 UN기념공원 등이 있으며, 숙박시설 · 음식점 · 유람선 등 관광기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용호3동에 소재한 이기대는 장산봉이 바다로 면한 동쪽 바닷가에 있다. 경관이 뛰어난 바위 절벽으로 과거 시민들의 출입이 금지되었으나 1993년부터 개방되었다. 지명은 임진왜란 때 수영의 기녀 두 사람이 술 취한 왜장과 함께 물속에 떨어져 죽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용당동에 있던 신선대는 주위의 해안이 절경을 이루고 있어 예부터 경승지로 이름난 곳이다. 1972년에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주위는 화산암질로 된 해안이 파도의 침식을 받아 해식애와 해식동으로 바뀌어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도시 개발로 인하여 과거 아름다운 경관은 훼손되어 있다.
남구에서는 매년 10월 중에 오륙도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오륙도를 중심으로 한 천혜의 자연환경과 평화공원 등이 입지한 이곳에서 오륙도 음악회, 체육대회, 마당극, 한마당 캠퍼스 동아리 페스티벌 등의 행사가 이루어진다.
대연동에 소재한 부산박물관은 부산지역의 문화유산 전시, 학술조사와 발굴 유물의 보존처리 등을 위해 1978년에 개관하였다. 유물 및 자료의 전시를 통하여 부산의 역사와 전통을 이해시킬 뿐만 아니라 부산의 각지에 흩어져 있는 선사시대의 유적, 유물을 발굴 보존하는 학술활동도 진행하고 있다.
대연동에 위치한 UN기념공원은 한국전쟁 때 유엔군 장병이 전사한 영령을 안치한 곳이다. 1955년 11월 15일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에서 오직 하나뿐인 유엔 관리의 묘지로 1959년 유엔과 우리 정부 사이에 묘지의 영구적인 관리 및 사용을 위한 협정이 성립되었으며, 1974년에는 관리권이 영령을 안치한 참전국 11개국으로 구성된 국제연합기념관리위원회에 이관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영국 885구, 터키 462구, 캐나다 378구, 오스트레일리아 281구, 네덜란드 117구, 프랑스 44구, 뉴질랜드 34구, 미국 36구, 남아프리카공화국 11구, 노르웨이 1구 등 2,300구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해마다 참배객과 관광객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관광명소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구의 서남부 부산만에 연한 동이다. 사료에는 감만이로 기록되어 있다. 감만이포라는 지명이 임진왜란과 가까운 시기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아 이전부터 있었던 지명으로 보인다.
취락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한때 인근 개운포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있었고, 최영장군의 사당인 무민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취락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이후 감만리란 지명을 유지하였으나 1970년 감만동으로 바뀌었으며, 이후 인구의 증가로 1979년 감만1·2동으로 분동되었다.
구의 북서부에 위치한 동으로 교통의 요지이다. 과거 순한글 지명인 지게골에서 유래되었는데, 문현동은 이를 한자화한 지명이다. 문현동 지명은『동래부지』나『동래부읍지』에는 기록이 없으나『경상도동래군가호안』(1904)과 『동래군지』에 서하면 문현리, 서면 문현리란 동리명으로 나온다.
해운대로 통하는 지게골 고개는 상당히 높은 고개였기 때문에 해운대로 가는 일은 상당히 불편하였으나 지금은 부산 동구와 해운대를 잇는 교통의 요지이다. 1957년에는 부산진구 문현동이 되었다가 1975년에 남구로 편입되었는데, 인구증가로 문현1·2·3·4동으로 분동되었다.
구의 중부에 위치한 동으로 부산만에 연해 있다. 지명은 우암포구의 언덕에 소 모양을 한 바위가 있는 데서 유래되었다. 기록상 우암은 1678년(숙종 4) 이후의 한일양국 외교문서인 『동문휘고(同文彙考)』, 『대마도문서(對馬島文書)』, 『조선사무서(朝鮮社務書)』 등에 우암포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숙종 이전에 이미 지명이 생긴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가 바다 매축을 위해 산지를 굴착하면서 소 모양의 바위가 없어지고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해방 이후 일본에서 돌아온 귀환동포와 6·25전쟁 때 이북에서 온 피난민이 대다수 정착하여 인구가 급증하였다. 1976년에 우암1·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2013년에 소규모 행정동 통합으로 통합되었다.
구의 중앙에 위치한 동으로 중심지에 해당된다. 과거 순한글 지명은 못골이라 하였다. 『동래부지』(1740) 제언조에는 생천언이 기록되어 있다. “생천언은 동래부의 남쪽 20리에 위치하며 길이는 181척, 넓이는 125척이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대연리의 위치와 일치하고 있으므로 생천언이 못골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이 못은 일제강점기까지 남아 있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래현에 수록된 생천향이 이곳의 생천언과 지명의 이름소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신라 및 고려 때의 생천향의 옛 땅일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는 대일리 · 대이리로, 1940년에는 남촌면 대연리로, 1953년에는 대연동으로 되었다.
이후 계속적인 인구 증가로 대연1·2·3·4·5·6동으로 분동되었다가 2013년에 소규모 행정동 통합으로 대연2동이 대연1동에 통합되었다.
구의 남부에 위치한 동으로 일부는 부산만과 연한다. 지명은 지금의 상하 용당리 중간에 옛날 큰 못이 있었고, 이 못을 둘러싼 부근 산세가 용의 모양과 같다 하여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사료상 기록은 『동래부지』(1740)에 용당리로 수록되어 있다. 용당은 해신을 모신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용왕을 모신 당집이라는 뜻에서 지명이 유래된 것으로도 보인다.
한편 부산에는 바닷가에 위치하여 용두산을 비롯 옛 시청 자리인 용미산, 용호동, 용두촌 등 ‘용’자가 붙은 지명이 많은데, 이는 모두 해신이나 기우소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구의 남동부에 위치한 동으로 오륙도가 소재한다. 옛 지명은 분개였으며 『동래부지』(1740)와 『동래부읍지』(1832)에 동래부 남촌면 분포리로 수록되어 있다. 분개 지명은 염전을 제조할 때 만든 구덩이인 서실을 한자식으로 표현한 분(盆)과 갯가를 의미하는 ‘개’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당시에는 거득분, 신분, 등분, 강개분, 보리분, 광이분 등 여섯 개의 분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지역에서 언제부터 소금을 구웠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나 분개라는 지명이 오래전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것으로 보아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분개 지명이 용호로 바뀐 것은 일본인들이 이곳 염전을 수탈하여 통감부에서 시험제염 용호출장소를 설치한 때부터이다. 인근의 용당동과 대비하여 명명된 지명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는 용주면 용호리로 바뀌었으며 광복 이후 인구증가로 용호1·2·3·4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