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구 ()

부산진구청
부산진구청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부산광역시 중앙에 위치한 구.
정의
부산광역시 중앙에 위치한 구.
개관

동쪽으로 연제구, 서쪽으로 사상구, 남쪽으로 서구·동구·남구, 북쪽으로 북구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9°00'∼129°05', 북위 35°07'∼35°11'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은 29.70㎢, 인구는 38만 1572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3개 행정동(11개 법정동)이 있고, 구청은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암1동에 있다.

자연환경

북서쪽과 서쪽으로는 금정산맥 줄기가 북동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져 비교적 높은 산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동쪽은 황령산지에 면해 있다. 백양산에서 발원한 동천은 부전천과 전포천으로 합류해 부산항으로 유입되면서 넓은 침식평야를 이루어 전체적으로 분지지형을 이루고 있다. 이들 하천에 의해 개석된 개금동 일대의 침식평지는 서면에서 북구로 통하는 주요 교통로로 이용된다.

전포동 일대에는 1980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구상반려암이 분포한다. 황령산 중턱에서 기슭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전석과 주변보다 돌출되었거나 기이한 형태를 가진 핵석암석군을 이루며 전형적인 구상암산출지를 형성하고 있다.

서북쪽의 부암동에 위치한 백양산(白陽山)은 금정산맥의 주능선상에 솟은 산이다. 부산진구와 사상구(모라동)의 경계를 가르며, 북동 산록에서는 부산의 도심하천인 동천이 발원한다. 한편, 백양산은 본래 금융산이라 불리어 왔으나 일제시대에 백양산으로 부르게 되었고, 동쪽 산록 아래에 선암사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하여 선암산이라고도 한다.

전포동에 소재한 황령산(荒嶺山)은 부산의 전형적인 도심 속 산으로 남구·수영구와의 경계를 이룬다. 황령산은 금련산맥 중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대부분 안산암질로 구성되어 있고 산정이 비교적 평탄하며 곳에 따라 소규모의 성채경관을 나타내는 기반암이 노출된다. 산정에는 조선시대 봉수대가 복원되어 있다.

양정동에 소재한 화지산(和池山)은 금정산맥의 지맥이 황령산으로 이어지다가 형성된 산지이다. 초읍동과 양정동 그리고 연제구 거제동과의 경계를 이룬다. 전형적인 구릉성 산지로 산정은 종순형을 나타내고 사면은 완만하다. 1740년(영조 16)에 편찬한 『동래부지(東萊府誌)』에 보면, “동래부 서방 10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호장을 지낸 동래정씨의 시조인 문도의 묘가 있는 산”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동래정씨의 선산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 고개와 계곡으로는 마비현과 성지곡 등이 있다. 양정동에 소재한 마비현은 황령산과 화지산을 잇는 안부(鞍部)로 한글지명은 모너머고개이다. 과거에는 험한 고개인데다가 산적들이 나타나 고개를 넘을 때 마치 말을 타는 듯이 달렸다 하여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해동제국기』(1471) 「동래부산포지도」에 ‘마비지이현(馬飛之以峴)’이라 기록되어 있다. 성지곡은 초읍동에 소재한 골짜기이다. 어린이대공원이 자리 잡고 있는 동천의 상류계곡으로 수원지가 있다.

주요 하천으로는 당감천과 부전천, 전포천 등이 있다. 당감동을 흐르는 당감천은 백양산 남동쪽 선암사 뒤편에 있는 백양폭포와 옥두천 두 곳에서 발원하여 당감1·2동을 지나 동쪽으로 흐르다가 범천1동에서 동천으로 흘러드는 동천의 지류이다. 순한글지명은 감물내로 길이는 2.9㎞이다. 상류를 제외한 중·하류는 도시화에 따라 거의 복개되었다.

양정동을 흐르는 양정천은 화지산 남쪽 산록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흘러 거제천 상류로 흘러드는 소하천이다. 전포동을 흐르는 전포천은 동천의 지류로서, 길이 2.6㎞로 황령산과 마비현에서 발원하여 제일제당 앞에서 동천으로 합류한다. 1970년 이후 서면 일대의 급속한 도시화로 전포천은 거의 복개되었다.

부전동을 흐르는 부전천은 성지곡 수원지에서 발원하여 동천으로 유입되는 지류이다. 길이 3.5㎞로 상류는 자연상태의 유수를 볼 수 있으나, 중·하류는 대부분 복개되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는 도심하천이 되었다.

부산진구는 내륙에 위치하고 있으나 바다와 가까워 온대해양성기후를 보여준다. 북서쪽에 금정산맥이 자리하고 있어 겨울철에 북서풍을 막아주어 비교적 온화하며 여름철은 바다의 영향을 받아 기온의 연교차가 적다. 또한 봄철에는 이동성 저기압의 영향으로 강수량이 많다. 여름과 가을철에는 태풍의 경로상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아 풍수해를 입기도 한다. 연평균기온은 14.9°C, 8월 평균기온 25.2°C, 1월 평균기온 2.8°C로 비교적 온화한 편이고 연중강수량은 1386.5㎜이다. 상대습도는 59.9%, 평균풍속은 3.1㎧이다.

역사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이 당감동 지역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이 지역에 취락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감동 고분군에서 발견된 5∼6세기의 유물들은 신라유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밝혀져, 이 무렵 이 지역이 신라의 행정조직 편제인 대중현에 속해 있음을 보여준다. 신라 경덕왕 때에는 중앙의 관제와 각 지방의 명칭을 모두 한자식으로 변경하였으며, 이때 대증현도 동평현으로 개칭되었다. 이 시기에 동평현은 동래군의 속현이었기 때문에 지방관은 파견되지 않았다.

고려시대에는 동평현의 영현이었던 동래군이 동래현으로 강등되면서 울주군에 영속되자, 동평현도 양주군(梁州郡: 현 양산)의 재배를 받았다. 고려 후기에는 연해지역을 중심으로 왜구의 노략질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는데, 동평현도 1376년(고려 우왕 2)과 1396년(조선 태조 5)에는 병선 120척을 이끈 왜구들의 대규모 침략을 받았다. 이때 수축된 동평성도 왜구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해 보수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왜구의 침략이 거세지자 동래현을 동래군으로 다시 승격시키고, 이제까지 양주에 속했던 동평현은 동래군에 소속시켰다.

동평현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1409년(태종 9)에 다시 양주에 속했다가 1428년(세종 10)에 동래현의 속현이 되었다. 따라서 조선 초기에는 동래군의 지배를 받았다. 왜구 침략이 잦아지면서 군사적 요새지였던 동평현에 어모장군(禦侮將軍)을 파견하여 관할토록 했다. 1428년(세종 10)에는 동래군의 진영을 동평현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1547년(명종 2) 동래현은 일본 사신과의 교류를 담당하게 되면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이때 동평현은 동평면으로 개칭되어 동래부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동평현은 군사적 요새지로서의 기능이 상실되고, 행정단위기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동래부지』(1740)에 의하면 당시 동평면에는 13개리(고대리, 부현리, 감물리, 당리, 와요리, 가야리, 부산성내리, 범천1리, 2리, 좌자천1리, 좌자천2리, 두모포리, 혜정리) 중의 일부(고대리, 부현리, 감물리, 당리, 와요리, 가야리, 범천리)와 서면의 11리(산저리, 여고리, 석사리, 거벌리, 초읍리, 양정리, 연지리, 범전리, 전포리, 만덕리) 중의 일부(초읍리, 양정리, 연지리, 범전리, 전포리) 지역이 포함되었다.

일제강점기 부산진구 지역은 동래군에 편입되었다가 1936년 부산진출장소가 설치됨으로써 부산부에 속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초읍, 연지, 범전, 부전, 양정, 전포, 부암, 당감, 가야, 개금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1938년에는 부전동이 부전1동과 2동으로 분동되었다.

광복 이후 부제(府制)가 폐지되고 시제(市制)가 실시되어 부산부도 부산시로 개칭되었다. 이에 부산진출장소도 부산진구로 행정명칭이 변경되었다. 1963년에는 동래군의 구포읍과 사상면이 부산시에 편입되어 부산진구의 관할이 되었고, 사상출장소와 구포출장소가 설치되었다.

한편 일제강점기 서면은 부도심의 기능을 담당했으나, 1960년대 이후 북쪽으로 시역 확장이 이뤄지면서 부산의 지리적 중심부에 위치해 급속히 발전하게 되었다. 주택지구는 개금동·당감동 일대에 대규모 아파트단지를 중심으로 집중되었고, 1978년에는 부산진구 북부 출장소 관할구역이 북구로 승격, 분리되었다.

법정동으로는 부전(釜田)·범전(凡田)·연지(蓮池)·초읍(草邑)·양정(楊亭)·전포(田浦)·부암(釜巖)·당감(堂甘)·가야(伽倻)·개금(開琴)·범천(凡川) 등 11개 동이 있다.

유물·유적

부암동에 위치한 선암사는 675년(신라 문무왕 15) 원효대사(617∼686)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해동제국기』 「동래부산포도」에 수록된 견강사가 이 사찰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부산부사원고』에 따르면 선암사의 처음 이름은 견강사였으며 처음 동평현 성안에 있었으나 1400년(정종 2)에 부산포(오늘날의 동구 자성대 동북쪽)에 별도의 절을 세워 이름을 선암사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동래부산포도」에 나타난 견강사의 위치가 당시 부산포 왜관과 인접하여 그려져 있다는 점과 동시기에 그려진 「염포도」·「제포도」에도 왜관 안에 사찰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일본인을 위해 세워진 사찰로 추정된다.

양정동에는 화지사가 있다. 사료에는 동래 화지산 곧 정묘의 제궁사라는 기록이 있다. ‘和池寺’ 또는 ‘華池寺’라고 기록되기도 한다. 절의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동래정씨의 시조인 정문도공을 안장한 후 오랜 시일이 지난 후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동래부지』(1740)에는 초읍동에 백양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부산진구 내 2곳에 패총이 있다고 전해지는데, 범전동의 패총에서는 쇠뿔모양 손잡이, 무문토기, 골침 등이, 전포동의 패총에서는 무문토기가 나온 것으로 보고되고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한편 당감동의 동평초등학교에 소재한 당등대 터는 동평현성의 관청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며 최근까지만 해도 옛 신라시대 것으로 여겨지는 기와조각이 발굴되었다.

당감동에는 고분군이 있는데, 현재의 당평초등학교와 그 서쪽과 북쪽의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고분군이 위치한 구릉은 백양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 말단부에 자리 잡은 독립된 작은 구릉이다. 대도, 철검, 철모, 철촉, 철부, 철겸, 철정 등의 철기류 등이 출토되었고, 유물의 시기는 대부분은 5세기 후반대에서 6세기 전반대에 해당된다. 또한 조선시대의 목곽묘도 발견된 바 있으며, 청동제합, 숟가락, 백자대접 등도 출토되었다.

당감동에는 동평현성지가 있다. 당감동 31통의 산지역 일대에 분포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동남은 석축이고 서북은 토축으로 둘레가 3508척으로 지금은 허물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 지역에 성을 축조한 것은 왜구가 남해안에 횡행하였고, 고려 중기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왜구가 자주 침범하여 동평현 관내가 침탈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1376년(고려 우왕 2) 12월 동래·동평·기장 외 여러 현이 침략 당했고, 1396년(조선 태조 5)에는 왜선 120척이 경상도에 침입하여 동평·동래·기장이 함락되기도 하는 등 그 피해가 극심했다. 성지의 형태는 동남은 석축이고, 서북은 토축 성벽으로 알려져 있으나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황령산에는 조선시대 연변 봉수중의 하나인 황령산봉수대가 있다. 서로는 구봉봉수대, 동으로는 간비오산봉수대, 북으로는 계명산봉수대로 연결되어 당시 동래부의 중추적인 봉수대로 기능하였다. 장산의 간비오산봉수대와 함께 가장 오래 된 봉수대로서 현재 옛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다.

부전동에는 동모(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와 동파두(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 등 2종의 문화재가 개인에 의해 소장되어 있다. 동모는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서 창날과 자루집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자루집에 긴 나무자루를 박아 적을 찌르는데 쓰는 무기이다. 동모는 주로 세형동검, 동과, 동부와 함께 출토되며 철기와 함께 발견되기도 하는데, 대략 서기전 2세기경에서 1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가 그뒤에는 완전히 철기로 대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동파두는 동검이나 철검의 손잡이 끝에 부착하는 일종의 장식이다. 재료로는 돌청동, 토제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청동으로 주조한 것이 가장 많이 발견되고 있다. 그 형태도 벼개형, 벼개형의 중앙부 좌우에 돌출부를 만든 십자형, 십자형의 중앙에 기둥같이 꼭지를 세운 것 등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유물은 십자형 2개를 옆으로 나란히 연결한 쌍십자형인데, 장축의 끝 부분에는 각각 한 마리씩 도합 4마리의 말(높이 5㎝)을 세우고, 십자의 중심에는 큼직한 4각 기둥 같은 꼭지(높이 4.3㎝)를 세운 모양으로 되어있다.

한편 양정동의 동래정묘 안에는 배롱나무가 있는데, 1965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동래정씨의 시조인 정문도공의 묘소 정면 좌우(동쪽과 서쪽)에 약 14.5m의 간격을 두고 자라는 노거수이다. 수령이 800년 정도로 추정되어 정문도공의 봉분설치 당시 식수되어 보호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배롱나무는 부처꽃과에 속하는 낙엽교목으로 꽃이 100일 이상 계속 피어서 목백일홍, 상부에 많은 가지를 쳐서 여름철에 오랫동안 분홍빛 꽃이 가지 끝에 뭉쳐 피기 때문에 백일홍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옛날에는 자미화라고도 불렸다. 이 배롱나무가 있는 정묘는 주산을 뒤로 두고 남쪽으로 면해 있다. 또한 주산의 좌우맥이 청룡백호의 형상을 이루고, 주수와 객수가 그 앞에서 합류해 흐르는 명당자리로 전해지고 있다.

교육·문화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32개교, 중학교 19개교, 고등학교 18개교가 있으며, 부산여자대학교, 동의과학대학교, 동의대학교가 있다.

가야동에 소재한 동의대학교는 1976년 경동공업전문학교로 출발하여 1979년 1월 10일 동의대학으로 개편되었다. 1983년 종합대학교로 승격되었고, 1989년부터는 한의과대학이 신설되어 부산 한의학 교육의 중심으로 기능하고 있다.

초읍동에는 부산어린이회관과 시립시민도서관이 자리해 있다. 부산어린이회관은 1974년 건립된 어린이과학교육기관이다. 1980년을 전후하여 과학실험실, 해양과학전시실, 우주과학실, 컴퓨터과학동산 등이 연차적으로 설치되었고, 어린이를 위한 과학실험시설과 오락시설이 구비되어 있다. 시민들이 가족단위로 즐겨 찾는 이곳은, 어린 학생을 위한 각종 과학경진대회, 학생기능대회 및 현장학습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시립시민도서관은 1948년 정부수립 이후 부산부립도서관이 부산시립도서관으로 개칭되어 동광동에서 개관하였고, 1963년 부전동으로 이전하였다. 1982년 시립시민도서관으로 개칭하였으며, 현 위치인 초읍동으로 신축 이전 개관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으로 부산 관련 고문헌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부전동에 소재한 부전도서관은 1982년 이곳에 있던 시립도서관이 초읍으로 이전하면서 그 자리에 개관된 도서관이다. 부전동에는 영국문화원이 자리하고 있는데, 1993년 개원하였으며 한국·영국 간의 학술교류 지원, 영어교육의 자문, 영국 예술단체의 내한공연 주선, 영국유학 상담실 운영, 도서실 운영 및 장학생 선발 등의 역할을 하고 있다.

민속

관내의 당감동, 연지동, 초읍동, 가야동 등지의 자연마을에는 여러 당산과 신당이 있다. 연지동에 소재한 당산은 400여 년 전 장씨·홍씨·정씨·노씨를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게 된 것에서 제의가 시작되었는데, 그 뒤 4성씨의 조상은 모시지 않고 현재는 당산할매신을 모시고 있다.

초읍동에 소재한 초읍당산은 부산시 지정의 폭나무(수령이 500년, 수고가 18m, 나무둘레가 3.5m의 나무로, 1980년 12월 8일에 지정됨) 9그루를 중심으로 입지하고 있으며, 조선시대부터 모셔진 오래된 사당이다.

가야동의 당산은 산신단으로 매년 양력 12월 초순께 제일을 정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초저녁에 산신단에 제물을 차려놓고 산을 향해 산신제를 올리며, 자정이 넘어서는 당사 안에서 당산제를 지낸다.

산업·교통

상공업은 범내골교차로에서부터 동해남부선 및 우암철도에 이르는 서면 일대에 발달하였다. 이 지역은 오래 전부터 공업중심지역이었으나 상가와 주택지가 형성되면서 공장들이 점차 사상·신평·장림·양산공업단지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전국 신발생산량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신발공업의 중심이다. 이밖에 섬유·기계공업도 발달하였는데, 제조업체는 중소기업이 대부분이며, 지역별 업종을 보면 전포동에 모직·자동차·자동차부속공업, 연지동에 화학공업이 주로 분포하고 있다.

상업 및 업무기능은 서면교차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곳에는 금융기관이 집중하여 있고 지하상가·서면중앙시장·부전시장 등이 있어 부산시 도매업의 50%를 담당하고 있다. 구의 중심인 서면교차로에 소재한 서면지하상가는 1970년대부터 서면 상권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발달한 상가이다. 지하철이나 버스 등 교통시설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부전시장등 인근의 재래시장과 롯데백화점 등 현대 유통기관과 연계되어 있다.

이곳의 재래시장으로는 부전시장, 서면시장, 평화시장 등이 있다. 부전동에 소재한 부전시장은 농수산물, 잡화, 선·건어물, 의류, 생활용품, 신발, 인삼, 약초, 식료 등이 주거래 품목이다. 이곳은 원래 8·15광복과 6·25전쟁 때 피난민들의 가건물이 설치되어 있던 생활터전이었다. 소매업 중심으로 부산지역은 물론 울산·삼천포·경주 등을 상권으로 하고 있다. 범천동에 소재한 평화시장은 1969년 개장하였으며 지하철 범일동역을 낀 교통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부산진시장, 국제시장과 함께 부산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이다. 서면시장에서는 식당, 쇠고기 등 육류, 생선 등 선·건어물, 쌀, 가방, 철물, 수입품, 과일, 의류 등 다양한 품종이 거래되고 있다.

범천동에는 부산상공회의소가 있다. 부산지방의 유일한 종합경제단체이며, 상공업의 종합적인 개선 발전과 상공인 권익 보호를 위한 업계의 대변기관으로서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원래 신창동에 있었으나 1967년 중앙동에 이전하였고, 1989년 현재 위치로 회관을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부산진구는 조선시대 중심지인 동래와 일제강점기 중 형성된 도시 지역과의 간선도로 중간에 있어 과거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또한 서면교차로와 사상구 감전동을 잇는 가야로가 간선도로 기능을 한다. 이 가야로는 1974년 낙동로와 만덕터널이 개통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오늘날의 서면 지역은 물론 동구, 남구, 중구 지역에서 김해나 서부 경남 지역으로 가기 위한 통로였다. 특히 1970년대 후반 사상공단이 입지하면서 동서고가도로가 개통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부산에서 교통체증이 심각하게 발생했던 지역이었다. 황령산과 금용산 사이의 마비치고개는 조선시대 동래와 부산포를 잇는 유일한 교통로였으며 현재는 연산교차로와 서면을 잇는 간선도로가 개통되어 있다.

부전동에 소재한 부전역은 1932년 서면 간이역으로 출발하였으며 1943년 부전역으로 개칭되었다. 경전선과 동해남부선의 시발·종착역으로 KTX 고속철도 개통과 더불어 역사를 신축하고 있다. 주요 교량으로는 부전동에 1956년 건설된 광무교가 있다. 서면교차로와 범내골교차로를 잇는 교량으로 동천에 가로놓여 있다. 부산 도심의 제일간선도로인 중앙로 상에 있는 중요 교량의 하나로 지하철 1호선이 나란히 달리고 있다.

관광

부산진구에 자리한 산록은 일부 텃밭으로 이용되고 있으나, 대부분은 녹지지역으로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초읍동에 위치한 어린이대공원은 성지곡수원지를 공원화한 것으로 연 15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곳이다. 1978년 세계 아동의 해를 맞아 어린이를 위한 공원으로 시설을 갖추고 어린이대공원으로 부르게 되었다. 공원 주변은 수원지를 중심으로 북으로 부태고개와 함박고개가 이어져 있고, 고개능선은 만덕고개가 연결되어 금정산에 이른다. 서남쪽으로 가면 가매골과 새마골을 지난다. 서쪽은 백양산과 이어진다. 동쪽은 새미산(금용산)이 된다. 수원지는 1907년 일본인들에 의해 착공되어 1909년 9월에 완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상수도원의 수원지로서 제방의 높이가 27m에 이르는 당시로서는 거대한 토목공사였고, 서면에서 초량왜관(현 용두산공원 일대) 일대까지 급수한 유명한 수원지였다. 그러나 1972년 물금에 낙동강 상수도취수공사가 완공됨에 따라 이 수원지는 유원지와 어린이대공원으로 이용되었다.

한편 범전동에 있었던 과거 미군 하야리야부대가 있던 자리는 현재 부산 시민들을 위한 공원으로 조성 중에 있어 좋은 관광지가 되고 있다. 부지 면적 약 16만 5000평으로 부전동 전체의 60%를 차지하는 면적이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경마장으로 이용되었던 아주 넓은 평지였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일본의 전쟁물자가 이곳에 야적되기도 했다. 광복 이후 미군이 부산에 진주하자 부산 지역의 미군을 통합 지휘하기 위해 주한미군부산기지사령부가 이곳에 창설되었다. 정식 명칭은 ‘주한미군부산기지사령부’였다. 하야리야부대란 이름은 초대 미군부산기지사령관의 고향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초대사령관의 고향은 미국의 ‘베이스 하야리야’였는데 그 사령관이 하야리야 부대라 명명한 데서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이어지고 있다.

가야동에 소재한 정관읍은 원래 달성서씨의 집성촌이 있던 곳으로 개인에 의해 공원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후손들이 가야유원지라 이름을 고치고 이 장소를 시민을 위한 공원으로 개방하였다. 또한 양정동의 동래정씨 정문도공의 묘인 동래정묘를 중심으로 화지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노인들을 위한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황령산에 기슭에는 2006년 레포츠 공원인 건립되었다. 레포츠 공원안에는 각종 경기를 할 수 있는 전천후 생활체육센터가 들어서 이전에 야외에서 해 오던 배드민턴, 농구 등의 경기를 실내에서 할 수 있게 하였다.

동(洞)
  1. 범전동(부전1동에 통합)

부산진구 북동부에 위치한 동이다. 지명의 유래는 금용산에서 발원한 범천 유역에 발달한 취락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래부지』(1740)에 “연지리·전포리·범전리 등이 모두 동래성에서 같은 방향으로 11리로 기재되어 있다” 라는 기록으로 볼 때 이 세 마을이 인접하였음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현재 양성초등학교가 있는 산을 기점으로 산 아래의 중심마을을 범전동이라 하고 좌우를 각각 전포동과 연지동이라 불렀다.

2015년 범전동이 부전1동에 통합되었다.

  1. 범천동

부산진구 남부 중앙에 위치한 동이다. 지명은 이곳을 흐르는 범내와 관련이 있다. 범내는 증산에 인접한 산들이 산세가 험하고 산림이 울창하여 호랑이가 서식하였는데, 호랑이가 이 계곡에 자주 출몰한다고 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한자식으로 ‘호천(虎川)’이라고도 표기하였다.

또한 오늘날 동천을 범천이라 부르기도 한다. 범천의 물줄기는 원래 자성대의 서쪽으로 흘러 바다에 유입되었는데, 자성대 부근의 매축 때 두 시내를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동천이란 자성대의 동편을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957년 범천1·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1966년 범천2동이 범천2·4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 양정동

부산진구 중앙 동부에 위치한 동이다. 지명은 이곳에 수양버드나무가 많았던 곳이어서 버드나무 ‘楊’자가 사용되었다는 설과 과거 지명이 양지골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1950년대까지만 하여도 한적한 농촌지대였으며, 지금 송상현공의 동상이 있는 곳은 ‘마비현(일명 모너머고개)’라 하여 날이 저물면 맹수와 도둑떼가 설쳐 넘어가기 무서운 곳이었다. 일제강점기 부산·동래 간의 경편철도를 부설하면서 이 모너머고개를 깎아 지금과 같이 평지로 만들었다.

양정동은 1936년 부산부에 편입되어 1970년 이후에는 인구의 증가로 양정1·2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 당감동

부산진구 중앙 서부에 위치한 동이다. 이곳에 있던 동평면의 당리와 감물리의 두 마을이 일제강점기 중 합쳐지면서 당감리라 불리게 되어 지명이 유래되었다.

당리는 이곳에 오래된 당집에 있어 기원한 지명이며 현재까지 1825년(순조 25)에 건립된 영숙사라는 선당이 남아 있다. 감물내는 이곳을 흐르는 하천 지명이다. 과거 동평현, 동평면의 치소로 현재 동평현 성터가 남아있다. 1951년 이후 인구 증가로 당감1·2·3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 연지동

부산진구 중앙에 위치한 동이다. 동이 위치한 못에 연꽃이 많아 지명이 유래되었다. 이곳에 있던 신지언은 동래부에서 두 번째로 큰 연못이었다. 못 지명을 신지언이라 한 이곳에 화지언이란 옛 못이 있었는데, 연지동의 못은 그후에 만들어진 새로운 못이라는 뜻에서 지명이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연지동의 북쪽과 서쪽의 성지곡으로 변한 언덕산에는 일제시대까지만 하여도 옛 성터가 있었으며 울창한 송림이 우거져 있었다. 성지곡은 과거 양산으로 통하는 중요한 관소에 해당하였고 이 통로에는 찬물샘이란 냉천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1740년(영조 16)부터 동래부 서면에 속하였으며 1946년에 연지동으로 개칭되었다. 1959년 1월 연지동과 초읍동을 병합하여 성지동이 되었다가 1963년 인구 증가로 성지동을 다시 연지동과 초읍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 가야동

부산진구 남서부에 위치한 동이다. 지명은 과거 가야국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옛날 수정동에 있던 고관과 가야동을 잇는 고개 지명인 감고개[柿嶺], 가모고개[可牟嶺], 가마고개[釜嶺]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1904년 경부선이 개통되자 철도로 인해 동평면과 단절되고 서면의 가야리가 되었다. 달성서씨의 집촌을 형성하고 있으며 임진왜란 전후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가야동은 1963년 가야동과 개금동으로 분동되었는데, 1970년 가야동이 가야1·2동으로 분동되었고, 1979년에는 가야2동이 가야2·3동으로 분동되었으며, 2013년 가야3동이 가야1동에 통합되었다.

  1. 부전동

부산진구 중앙에 위치한 동이다. 현재의 부전동 지역은 조선시대 동래부 동평면 부현리에 속하였다. 부현리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현재 당감동 입구의 부암고개에 있던 바위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에 있던 바위는 마치 가마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가마고개라 하였고 이를 한자화한 지명이 부현이라는 것이다.

부현고개 아래의 범전리·전포리와 인접하는 곳을 부전이라 이름붙인 것으로 추측된다. 1936년 시·구명 정비에 따라 공식적으로 부전동이란 이름이 붙여졌고, 이 일대를 통칭 서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말까지 부전동에는 강릉김씨, 김해김씨 등의 집성촌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이곳은 부산진구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유통 인구가 많아 부산의 중심지역이다. 인구 증가로 부전1·2동으로 분동되었으며, 2015년 범전동이 부전1동에 통합되었다.

  1. 부암동

부산진구 중앙에 위치한 동이다. 조선시대에는 부전동과 함께 동평면 부현리에 속하였다. 부암동의 위치는 동천의 상류인 백양산에서 발원하는 감물내를 중심으로 옛 고대리에서 현재의 개성중학교의 언덕받이 산인 통칭 백양대 앞의 지역을 말한다. 부전동 지명이 감물내 동쪽 중 전포·범전의 평지에 붙여진 이름인데 비하여 부암동은 내 주변의 구릉, 바위동산이 흩어져 있어 바위 ‘岩’자가 붙여져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과거 자연마을로 고대마을과 뒷골이 있었으며, 이 지역에 위치한 선암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부암동은 1979년 부암1·2동으로 분동되었다. 1982년 동평2동이 부암3동으로 행정명칭이 개편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 초읍동

부산진구 북서쪽에 위치한 동이다. 북쪽으로 금용산을 등지고 남으로는 연지를 지나 서면 일대의 평야로, 동으로는 화지산이 서쪽으로 달려가는 형상의 작은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로는 금용산의 산맥이 뻗어있어 방어에 유리한 분지에 위치하고 있다.

지명은 과거 이곳이 새로운 터전, 새로운 자리라는 의미로 ‘새터’라 불렸으며 이를 한자화한 것이 현재의 명칭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동평현의 치소가 빈번한 왜구의 침략으로 피폐하자 천연의 요새인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새터로 불렀던 것에 유래한다.

백양산 기슭 성지곡 어린이대공원을 끼고 있는 이곳은 산수가 수려하고 쾌적한 주거환경지역이다. 조선 후기에는 서면 초읍리에 속하였고, 그후 동래군으로 편제되었다가 1936년에 부산부로 편입되었다. 1942년 연지동과 함께 성지동으로 병합되었다가 1962년 초읍동과 연지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 개금동

부산진구 서남쪽에 위치한 동이다. 지명은 마을 형상이 거문고와 같이 길에 늘어져 있는 형상을 지니고 있어 유래되었다는 설과 임지왜란 당시에 피난길을 헤매던 백성들이 이곳에서 들려오는 가야금 소리를 듣고 정착하게 되었다는 전설에서 기원하였다는 설이 있다.

조선시대는 동평면 와요리(瓦要里)라 칭하였다가, 1904년에 개금리라 개칭한 것으로 보여진다. 최씨(崔氏), 배씨(裵氏), 송씨(宋氏) 등이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1959년 가야동에 흡수되었다가 1963년 가야동이 가야동과 개금동으로 분동되면서 다시 개금동이라는 지명이 사용되었다. 인구 증가로 개금1·2·3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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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통계연보』(부산광역시, 2005)
『구정백서』(부산광역시부산진구, 2005)
『부산교육통계연보』(부산광역시교육청, 2005)
『부산의 당제』(부산광역시, 2005)
『한국지리지』경상도편(건설부국립지리원, 2005)
『부산의 민속문화』(세종출판사, 2003)
『부산민요집성』(세종출판사, 2002)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2)
『부산지명총람』(부산광역시, 1995∼2002)
『부산의 문화재』(부산광역시, 1993)
『도시관리계획백서』(부산진구, 1993)
부산광역시 부산진구(www.busanji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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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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