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2만 5,994㎡.
이 일대에는 천성산(千聖山)의 서쪽 경사면에 두 줄기로 흐른 능선이 있다. 해발 250∼370m에 있는 성황산(城隍山)의 정상부에는 신기리(新基里)산성이 있고, 이 산성의 아래로부터 남북으로 두 줄기의 능선이 흐른다.
북정리고분군은 북쪽 능선상과 사면에 분포되어 있고, 남쪽의 능선상과 사면에는 신기리고분군이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전방에는 양산천이 북쪽에서 남류하면서 충적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이 고분군에는 모두 18기의 고분이 밀집 분포되어 있다. 그 중에는 1920년에 발굴 조사하여 ‘부부총’으로 명명된 고분이 제10호분으로 들어 있다.
1990년양산의 도시계획에 저촉되는 고분 50여 기를 동아대학교박물관이 발굴 조사하였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고분은 부부총과 1990년에 조사한 금조총(金鳥塚, 제21호분)이다.
고분군의 분포는 동서 두 지역군으로 나누어진다. 동군은 능선상에 비교적 분구의 규모가 큰 대형고분들이 능선의 방향인 동서로 1열을 지어 분포되어 있는데, 제1호분부터 제11호분까지가 여기에 속한다.
서군은 능선의 말단부에 있는 제12호분과 제21호분을 포함해 남북으로 길게 분포되어 있는데, 동군의 고분들보다 규모가 작은 소형분들이다.
고분의 구조면에서도 동군의 대형고분과 서군의 소형고분 간에는 차이가 있는 듯하다. 동군 중에서 유일하게 발굴 조사된 부부총을 예로 보면, 석실은 장방형이며 동서로 장축을 두고 있는데, 서쪽 단벽에 짧은 입구시설이 있으며, 중간부위에 2인용의 높은 관대(棺臺)를 축조하였다.
서군에 속하는 고분들은 석실의 규모도 소형일 뿐만 아니라 석실의 주축도 동군과는 반대방향인 남북을 취하고 있으며, 한 분구에 2기의 석실을 배치한 고분도 2기나 있다.
동·서군에서 조사보고서가 간행된 부부총과 금조총을 예를 들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0호 부부총은 1920년에 발굴 조사된 것에 몇 가지 의문점이 발견되어 1990년에 재조사하게 되었다. 분구(墳丘)는 원형봉토분으로 하단 분구자락에는 높이 1m의 호석단(護石壇)이 둘러져 있고, 호석 밖으로는 너비 5m의 주구(周溝)가 둘러져 있는데, 일종의 배수로 기능을 가진 듯하다.
봉토는 유사판축형태로 축조했으며, 석실은 중앙에 위치해 생토지면을 파고 축조하였다. 분구의 지름은 20m이고 높이는 5m이다.
석실의 입구는 서쪽 벽의 중앙에 설치했는데, 길이가 약 70∼80㎝로 추정되고 너비는 2m로 짧은 연도형을 하고 있다. 석실은 할석으로 축조하고 천장부에 7개의 판상석을 올려놓아 평천정을 만들었다.
석실의 중간부에는 2인용의 높은 관대를 축조했으며, 북쪽 것은 높이가 50㎝이며, 남쪽 것은 높이가 80㎝이다. 석실 전체의 크기는 길이 545㎝, 너비 225㎝, 높이 280㎝이다.
유물로는 금동관, 조익형관식(鳥翼形冠飾)과 관모(冠帽), 백화수피제관모(白樺樹皮製冠帽), 금제이식, 금제·은제·유리제팔찌와 곡옥, 은제과대, 금동제식리(金銅製飾履) 등 장신구류와 금동제안구, 철제깃대꽂이·등자·운주(雲珠)·재갈 등 마구류 및 다량의 토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발굴 조사 후 일본 동경국립박물관(東京國立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제21호 금조총은 고분군 중에서 가장 남쪽에 거의 독립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원형봉토분이다. 분구는 소형인데다 대부분이 유실되어 보통의 민묘 규모로 남아 있다.
석실은 장축을 능선과 직각방향으로 취하고 입구시설은 횡구식으로 되어 있으며, 석실 바닥에는 전면관대를 낮게 만들었다.
유물은 금동관을 비롯한 장신구류와 금제조족(金製鳥足)·청동초두 등 금속기류, 그리고 다량의 토기류가 출토되어 고분의 규모에 비해 풍부한 유물이 부장되었다. 금동관의 규모가 작고 무기류가 없는 점 등으로 미루어 피장자는 여성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