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지 ()

서울 경희궁지 중 숭정전 일대
서울 경희궁지 중 숭정전 일대
건축
유적
문화재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후기 광해군이 세운 이궁(離宮)의 궁궐터.
정의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후기 광해군이 세운 이궁(離宮)의 궁궐터.
개설

조선왕조 제14대 왕 선조의 다섯 번째 아들인 원종(元宗, 1580∼1619)의 집터에 광해군이 세운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이궁(離宮)이다. 1616년(광해군 8)에 세워졌는데 원래 이름은 경덕궁이었다. 1760년(영조36)에 경덕이라는 명칭이 원종의 익호(諡號)와 동음이라는 이유로 경희궁으로 바뀌었다. 원래 규모는 7만여 평이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철저히 파괴되어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역사적 변천

경희궁은 광해군 때 창건되어 조선 후기 동안 중요한 정치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숭정전(崇政殿)·융복전(隆福殿)·집경당(集慶堂)·흥정당(興政堂)·회상전(會祥殿)·흥화문(與化門) 등의 여러 부속건물이 세워져 있었으나 1829년(순조 29) 일어난 화재로 대부분이 소실(燒失)되었다가, 1831년에 중건되었다.

이후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면서 경복궁과 더불어 총독부 소유로 넘어갔다. 1907년 일제는 경희궁 안에 통감부 중학교를 세우면서 기존 건물들을 대부분 철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형도 높은 곳을 깎아 낮은 곳을 메우는 등 크게 변형시켰다. 그나마 남아 있던 숭정전·회상전·흥정당·흥화문·황학정 등도 다른 곳으로 팔려가거나 이전되었다. 숭정전은 1926년동국대학교 구내로 이전되고, 흥정당은 2년 후에 광운사(光雲寺)로 이건되었으며, 흥화문은 1932년에 박문사(博文寺)의 산문(山門)으로 이축되었다가 장충동 영빈관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황학정은 1922년사직단(社稷壇) 뒤 등과정(登科亭) 터로 이건되었다. 또한 경희궁 부지 2만 5천여 평을 떼어내어 전매국관사를 지어, 경희궁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광복 뒤인 1946년에는 일본인학교가 서울중·고등학교로 이어졌는데, 1978년 5월 이 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함에 따라 주식회사 현대가 이를 매입하여 연수원 등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5년서울특별시에서 궁터를 사적지로 지정하면서 시민들의 공원으로 개방하였다.

1988년 들어서는 경희궁 복원작업에 착수하여 흥화문은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이건하여 원래의 위치에서 벗어난 곳에 세우고, 숭정전은 새 건물을 지어 복원하였다. 1988년에는 궁의 서쪽 구역에 있던 구 서울고등학교 건물을 보수하여 서울시립미술관으로 활용하다가 현재는 이 미술관의 분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궁궐 동쪽 구역에는 2002년 5월 개관한 서울역사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내용

서울특별시에서는「경희궁지 복원과 시민사적공원 조성계획」에 따라 숭정전과 숭정문, 동서남북 회랑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1985년부터 7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1차 유구발굴 조사는 1985년 8월 7일부터 11월 20일 사이에 진행되었는데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위한 시굴’의 성격을 띠었다. 이 당시 옛 서울고 건물들이 남아 있는 상태여서 이를 제외한 지역을 대상으로 유구발굴 조사를 진행하였다. 발굴조사를 통해 숭정전의 상하 월대 중 하월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장대석 일부와 어계(御階), 동쪽 행랑의 초석2점, 서쪽 회랑 아래쪽의 암거(暗渠) 배수구, 숭정문터의 적심석 6기와 숭정문의 계석지(階石址)등 여러 유구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발굴과정에서 기와 조각과 자기 조각 등 1,000여 점의 유물을 출토하였다.

2차 유구발굴 조사는 1986년 12월 29일부터 1987년 6월 30일 사이에 진행하였다. 1차 발굴지역을 제외한 경희궁터 전역을 대상으로 조사하여, 2개의 건물지, 담당지, 배수지를 확인하였다.

두 차례의 유구발굴 조사를 통해 확보한 유물들은 대부분 조선시대 것으로 17세기에 해당하는 유물이 많았다.

이후 1988년 12월∼1989년 5월 사이에는「숭정전 건립부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단국대 박물관의 조사 때 발굴하였던 월대석을 노출하였고, 당시까지 계단으로 사용하고 있던 어계는 숭정전 건물과는 축을 달리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또한 애초의 추정과 달리 숭정전은 옛 서울고의 신관 건물이 아니라 식당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1989년 10월∼12월 사이에는 숭정전의 동서 월량과 상하 월대의 유구를 발굴하기 위해 ‘경희궁 숭정전 발굴조사’를 행하여, 상하 월대의 일부분과 동서 월량의 주칸 및 칸 사이를 알려주는 초석을 발견하였고, 월랑이 복랑(複廊)으로 되어 있으며 숭정전으로부터의 거리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1990년 3월∼5월에는, 이전 발굴 때 철거되지 않아 발굴하지 못했던 강당 건물이 철거되었기 때문에 숭정문과 그 주위의 기단, 동쪽과 남쪽의 월랑 위치를 확인할 목적으로 ‘숭정문지 및 남회랑지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숭정문 앞 하월대의 최하단 및 2단을 구성하는 1열의 장대석들과 계단터 동쪽 모서리에서 동쪽으로 향해 있는 화계를 발굴하였다. 1991년 11월∼1992년 8월에는「자정문지 및 북회랑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숭정전의 서북쪽 회랑 터 아래로 장대석으로 잘 조영된 암거(暗渠)배수구가 지나고 있음을 확인하였고, 이 외 적심석 몇 개를 발굴하였다.

1993년 11월∼1994년 2월에는 YMCA건물과 유류고가 철거됨에 따라 숭정전의 서쪽과 북쪽의 회랑 터를 발굴하기 위해 ‘자정전지 및 숭정전 서북회랑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 결과 숭정전 북쪽 회랑 터에서 초석 4기를 비롯하여 적심 5기 등 화방벽으로 구획된 건물 터를 확인하였다. 또한 건물 터 좌우에서 초석 7기를 비롯하여 바닥에 전돌이 깔린 양호한 상태의 천랑(穿廊)터를 발굴하였다.

한편, 자정전 터에 대한 발굴조사는 1991년 11월∼12월, 1993년 11월∼1994년 2월과 1995년 7월∼1996년 1월에 걸쳐 세 차례 진행하였다. 1차 조사에서는 자정문 터 아래로 암거 배수구가 지나고 있다는 사실과 자정문의 서쪽 기단이 잘 남아 있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2차 조사에서 자정전이 있었음을 확인해주는 기단의 장대석을 일부 발굴하였다. 3차 조사에서는 자정전의 앞마당에 해당하는 부분과 서쪽 부분, 그리고 자정전 북쪽에 해당하는 옛 서울고 소운동장을 발굴하였으나 큰 소득은 없었다. 다만 숭정전 서쪽 회랑으로부터 약 11m 떨어진 곳에서 회랑 터로 추정되는 1칸의 구들자리를 발굴하였다.

또한, 태령전 터에 대한 발굴조사는 1996년 10월∼1997년 4월 사이에 실시하였다. 10개의 줄구덩이를 파서 유구의 상태를 확인하고자 하였으나 태령전의 위치와 규모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배수로와 적심 3기, 적심석 등을 발굴한 것과, 옛 서울고의 신관과 화장실을 세우면서 설치했던 콘크리트 옹벽에 묻혀 있던 영렬천(靈洌泉)을 발굴한 것이 나름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발굴 결과와 문헌 고증을 거쳐 경희궁내 각 전각을 복원하는 사업이 진행되었다. 1987년에는 흥화문, 1991년에는 숭전전, 1998년에는 자정전과 회랑, 2000년에는 태령전과 그 일곽이 각기 복원되었다. 다만 흥화문은 원 위치에 구세군회관이 위치하고 있어서 서쪽으로 100여m 이동하여 복원되어 있다.

한편, 신문로 2가와 당주동의 경계 및 신문로 2가와 내수동의 경계 지점에 당시의 궁역(宮域)을 확인할 수 있는 담장이 여러 군데 남아 있다.

특징

제1차 발굴조사에서 찾아낸 유물은 기와조각과 자기조각이 대부분이며, 철기·석기·토기 등도 약간씩 출토되어 모두 1,000여 점에 이른다.

기와는 막새기와 및 평기와가 많이 출토되었다. 막새기와에는 용무늬·봉황무늬·연꽃무늬·글자모양 등이 새겨져 있으며, 평기와에는 파도무늬·기하무늬 등을 새겨 넣었다. 또, 기와의 제작 연대와 제작한 곳을 알려 주는 명문을 새긴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公(공)’·‘辛未(신미)’·‘左(좌)’·‘別右(별우)’·‘巳(사)’·‘壬四(임사)’·‘戒(계)’·‘三丑(삼축)’·‘辛二(신이)’·‘壽(수)’·‘丙私五(병사오)’ 등 여러 종류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밖에도 전(塼)과 잡상(雜像), 취두(鷲頭)조각 등도 나왔다. 자기는 고려청자에서 조선 후기의 자기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출토되었는데, ‘內贍(내섬)’·‘仁(인)’ 등이 새겨진 분청사기, ‘左(좌)’·‘右(우)’·‘別(별)’·‘五十四(오십사)’ 등을 그릇 밑바닥에 오목하게 새긴 백자·청화백자, 조선시대 청자 등이 고루 나왔다. 이 유물들은 대부분 조선시대의 것들로서 특히 17세기에 만들어진 것이 가장 많다.

『궁궐지(宮闕志)』·「서궐도안(西闕圖案)」 등의 사료를 통하여 편전(便殿)인 흥정당(興政堂)과 동궁인 경현당(景賢堂)을 비롯한 궐내각사(闕內各司)가 밀집하여 배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운동장 지역을 발굴한 결과, 건물지 두 곳을 포함하여 적심석(積心石)·신방석(信枋石)·담장터·배수구 등을 확인하였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궁궐 건축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구이다. 출토 유물은 기와·전·도자기와 기타 유물 등 500여 점으로 대부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기와와 전은 조선 후기 궁궐건축에 사용된 건축재료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며, 도자기류는 궁중생활의 일면을 파악하는 데 귀한 자료가 된다. 기와조각에는 ‘丁巳(정사)’·‘辛未(신미)’·‘癸未(계미)’ 등 간지(干支)가 새겨져 있어 제작연대를 1617·1693·1883년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이를 단서로 삼아 조선 후기 기와의 편년을 설정할 수 있어서 주목된다.

평기와의 경우는 무늬 없는 기와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무늬가 새겨진 다양한 기와가 나왔는데, 줄무늬·파도무늬·물고기가시무늬·문살무늬·수레바퀴무늬·꽃무늬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막새기와의 경우는 풀무늬와 용무늬를 새긴 암막새기와, 연꽃무늬와 서조(瑞鳥)무늬를 새긴 수막새기와 등이 주로 출토되었다.

자기류는 주로 17세기 중엽 이후에 제작된 것이며, 중국 자기의 조각도 여러 점 찾아냈다. 15, 16세기에 제작된 분청사기에는 상감기법(象嵌技法)·인화기법(印花技法) 등이 주로 사용되었고, ‘仁壽府(인수부)’·‘內贍(내섬)’·‘禮賓(예빈)’ 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밖에 백자조각 가운데에는 ‘黃(황)’·‘地(지)’ 등의 명문이 새겨진 경기도 광주군 도마리 가마 계통의 유물도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의 궁궐터 가운데 창경궁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발굴조사가 실시된 곳으로서의 의의가 있으며, 출토된 유물들은 궁궐 건축의 실상과 궁중생활의 단면을 파악하는데 기본 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참고문헌

『경희궁의 복원과 역사산책』(이근도, 수서원, 2004)
『서울의 궁궐건축』(김동현, 시공사, 2002)
『정비·복원을 위한 경희궁지 제2차발굴조사보고서』(단국대학교박물관·서울특별시, 1987)
『경희궁지발굴조사보고서』(단국대학교박물관, 1985)
「고종시대의 경희궁: 훼철과 활용을 중심으로」(은정태, 『서울학연구』제34호, 2009년 봄)
「정조의 경희궁 운영과 건축」(이강근, 『서울학연구』제34호, 2009년 봄)
「영조의 경희궁 개호와 이어의 정치사적 의미:사도세자 사사와의 상관성에 대한 분석」(윤정, 『서울학연구』제34호, 2009년 봄)
「광해군대의 경덕궁(경희궁) 창건」(홍석주, 『서울학연구』제34호, 2009년 봄)
집필자
정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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