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자부(子傅), 호는 영곡(靈谷). 고순원(高順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고신걸(高臣傑)이며, 아버지는 상장군 고봉지(高鳳智)이다.
1413년(태종 13) 효행으로 천거받아 음직으로 직장(直長)이 되고, 이듬해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대호군(大護軍) · 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 등을 거쳐, 1427년(세종 9)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37년 첨지중추원사가 되고 이듬해 호조참의로서 종마진공사(種馬進貢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9년 통신사가 되어 부사 윤인보(尹仁甫), 서장관 김몽례(金夢禮)와 함께 일본에 가서 아시카가[足利義敎]와 오우치[大內持世]의 서계(書契)를 가지고 돌아왔다.
1441년(세종 23)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다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는데, 그때 함부로 약재를 청하고, 또 이만주(李滿柱)와 동범찰(童凡察)의 처치를 요구한 일로 귀국 즉시 강음현(江陰縣)에 유배되었다.
4년 후 풀려나와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고, 1448년 도전운사(都轉運使)가 되어 충청도와 전라도의 쌀을 평안도로 운반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사후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저술이나 작품이 전하는 것은 없고,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몇 편의 시가 전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