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료(內僚)로서 피리[笛]를 잘 불어 충렬왕의 총애를 받았고, 그로 인하여 권세도 부렸다.
1282년(충렬왕 8) 왕의 청에 의하여 원나라로부터 무략장군순마천호(武略將軍巡馬千戶)의 벼슬을 받았고, 1293년 다시 왕경등처관군만호부만호(王京等處管軍萬戶府萬戶)에 임명되고 삼주호부(三珠虎符)도 하사받았다.
충렬왕 초 염승익(廉承益) · 윤수(尹秀) · 이정(李貞) 등의 내관과 더불어 전장(田莊)을 많이 설치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경작시키고, 또 근처의 민전(民田)으로부터도 조세를 받아들여 국가재정을 어렵게 만드는 폐단을 끼쳤다.
그러나 일본정벌을 준비할 때 인후(印侯)가 군사들로 하여금 백성의 말을 빼앗게 하자 이를 금지시켰으며, 또 감찰시사(監察侍史) 허유전(許有全)이 왕이 총애하는 후궁의 참소로 순마소(巡馬所)에 감금되자 이를 구제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