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판본(木版本)으로 1책 104장이다. 최경창(崔慶昌)의 손자 최진해(崔振海)가 1683년(숙종 9)에 수집 편찬하였고, 증손 최석영(崔碩英)이 간행하였다.
『고죽집』에는 최경창의 손자이며 이 책을 편집한 최진해(崔振海)의 시집 「역촌유고(櫟村遺稿)」가 함께 실려 있다. 『역촌유고』에는 오언절구 15수, 칠언절구 47수, 칠언율시 7수 등 모두 69수의 시와 남구만(南九萬)의 발문이 들어 있다. 즉, 『고죽집』은 「고죽유고(孤竹遺稿)」와 「역촌유고」를 합책한 것이다.
「고죽유고」에는 책머리에 송시열(宋時烈)이 1683년에 쓴 서(序)가 있고, 권을 나누지 않은 채 시 245수가 시체별로 수록되어 있다. 수록된 작품은 오언절구 33수, 칠언절구 105수, 오언율시 42수, 칠언율시 30수, 3 · 5 · 7언 2수, 오언고시 28수, 칠언고시 5수이다. 책끝에는 이민서(李敏叙)의 발문과 남구만(南九萬)의 서(書)가 실려 있다.
권말에는 부록으로 최립(崔岦)의 「정옥봉고죽집합간불가설(訂玉峯孤竹集合刊不可說)」, 이호민(李好閔)의 「정조사주행촌소첩(呈詔使朱杏村小帖)」, 송한필(宋翰弼)의 「제최종성문( 祭崔鍾城文)」, 신흠(申欽)의 「옥봉전고서략(玉峯全稿序略)」, 박세채(朴世采)의 「고죽시집후서(孤竹詩集後敍)」 등이 수록되어 있다.
최경창은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으로, 전남 영암(靈巖)에서 태어났다. 박순(朴淳)의 문인이며, 동향인 백광훈(白光勳)과 함께 최백(崔白)으로 불렸다. 당시(唐詩)에 뛰어나 백광훈, 이달(李達)과 함께 어울려 시사(詩社)를 맺었고, 문단에서는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불렀다. 봉은사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지방을 찾아다니며 많은 시를 지었다. 시가 청절하고 담백하다는 평을 받았고 또한 문장에도 뛰어나 하응림(河應臨), 송익필(宋翼弼) 등과 함께 팔문장(八文章)으로 일컬어졌으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이이(李珥)는 그의 시를 ‘청신준일(淸新俊逸)’하다고 평가하였고 허균(許筠)은 ‘청경(淸勁)’하다고 평가하였다. 이이와 허균의 평은 최경창 시의 신선하고도 활달한 면모를 지적한 것이다. 이 점은 다른 시인들의 시와 비교될 수 있는 특징이다. 한편으로 그는 차분한 필치로 붕당기(朋黨期)에 처한 지식인의 고민과 불만을 시에 토로하였으며, 조선 중기의 피폐한 현실의 모습을 시에 담았다.
「이소부사(李少婦詞)」와 같은 작품은 조선조 여인의 한(恨)을 전형적으로 표출하고 있으며, 「번방곡(飜方曲)」은 함경도 관기 홍랑(紅娘)의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시조를 한시로 옮긴 것으로 이별을 맞이한 여인의 정감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최경창의 시는 당시(唐詩)의 풍격에 상당히 가까운 것으로 평가되었다.
『고죽집』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서문을 비롯하여 여러 편의 부록 문장들이 모두 서인(西人) 측 인사의 손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최경창이 서인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문집인 『고죽집』이 서인 집권기인 17세기 말엽에 편찬된 이유를 알 수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