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축. 필사본. 원래 한 장의 명주 두루마리로 작성되어 있던 것을 후손들이 잘라서 첩장(帖裝: 서적 장정의 한가지로 오늘날의 法帖과 같은 장정)한 것이다.
총 10면이며 매 면에 7줄씩으로 안배하였는데, 총 62줄이다. 전곽(全郭)이 주사란(朱絲欄)으로 그어졌다. 위아래는 34㎝, 매간은 2.5㎝이며, 너비는 총 175㎝ 정도로 추산된다. 해서체로 묵서하였으며, ‘施命之寶(시명지보)’라는 어보가 찍혀 있다.
공신교서는 ‘敎效忠仗義宣武功臣嘉義大夫廣南君李光岳書(교효충장의선무공신가의대부광남군이광악서)’라는 제하에, 이광악의 공적 사례, 공신에 대한 포상과 특전, 공신과의 서약, 공신의 명단, 사실증명 등이 차례로 적혀 있는데, 이광악은 3등 5번째에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평정에 큰 공훈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려진 훈호(勳號)는 호성(扈聖)·선무(宣武)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훈호를 의정할 때 서울에서 의주까지 왕을 시종 호종한 사람을 호성공신으로, 왜군을 정벌한 장수들과 원병과 양곡 요청을 위해 명나라에 왕래한 사신들로서 유공한 사람을 선무공신으로 책록하고, 또 각각 3등으로 나누어 상의 등급을 달리하였다.
이 문서는 당초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이주백(李柱白)이 보관해오다가, 1987년 다른 유물과 함께 독립기념관에 기증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이래 1392년(태조 1)의 개국공신을 비롯해 공신의 마지막인 1728년(영조 4)의 분무공신(奮武功臣)에 이르기까지 약 340년간 28번의 공신이 책록되었다. 그 중에 호성·선무 두 공신은 왜적을 물리치고 국토를 회복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다른 공신과는 달리 특히 중요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