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이씨 광평대군파 묘역은 조선 제4대 왕 세종의 다섯째 왕자 광평대군(廣平大君)과 그의 부인 영가부부인(永嘉府婦人) 평산 신씨(平山申氏)의 묘를 비롯하여 그 후손들의 종중 묘역이다. 대모산(일명 광수산) 북동쪽 기슭에 위치하며, 광평대군파 종중에서 관리한다. 1981년 2월 5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 묘역은 서울과 근교에 현존하는 왕손의 묘역 가운데 가장 원형에 가깝다. 광평대군의 묘소는 1444년(세종 26) 대군이 세상을 떠난 뒤 경기도 광주군 서촌 학당현(지금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선릉 부근)에 처음 마련되었다. 그러다가 51년 후인 1495년(연산군 1) 성종의 왕릉을 이곳으로 정하면서 현재의 위치인 대왕면 광수산으로 이장하였다.
이 묘역에는 광평대군과 부인 신씨(신자수의 딸)의 쌍분을 비롯해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화를 입은 태조의 일곱 번째 왕자인 무안대군(撫安大君) 이방번(李芳蕃)과 부인 왕씨의 묘역이 있다. 이는 광평대군이 1437년(세종 19)에 세종의 명에 따라 후사가 없는 이방번의 봉사손으로 정해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군의 아들인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의 묘역을 비롯한 그 종중 700여 기의 묘소가 산재해 있다.
이 가운데 신도비 · 상석 · 석등 · 문인석 등 규례대로 갖추어져 있는 광평대군의 묘소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광평대군 묘소는 부인 묘소와 함께 사당, 재실 등의 전각 뒤편 높은 분릉 위에 쌍분으로 되어 있다.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은 분봉이 놓여 있고, 그 아래에 묘비와 낮은 받침돌을 둔 상석이 있다. 그리고 신도비는 1574년(명종 7)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대사헌 심의겸(沈義謙)이 짓고 5대손 이의건(李義健)이 썼으며, 사록 박렴(朴簾)이 두전(頭篆)을 썼다.
광평대군 사당은 처음에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궁말의 대군이 살던 집에 마련되어 있었다. 이 사당은 대군이 무안군 봉사손으로 정해진 뒤 무안군의 사당을 이곳에 마련한 것으로부터 유래되었다. 그 뒤 사당에는 무안군 내외를 비롯해 광평대군 내외, 영순군 내외의 신주를 모셨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어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되었다. 송시열이 지은 사당기가 전하며, 1019년 10월에 현 위치로 옮겼다.
또한 이 묘역에는 세장기비(世葬紀碑: 세대별 장례를 기록한 비)가 있는데, 가족 묘의 기록을 담고 있는 특유한 유물이다. 1695년(숙종 21)에 조사한 분묘의 소재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묘역 기슭에는 광평대군 후손의 창의공파 종회 소유로 약 500년 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전통건조물로 지정된 서울 이병무 가옥이 있다.
단을 쌓은 위에 봉분을 둔 양식은 조선 전기 다른 대군 묘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으로 당시의 대군 묘 규모나 형식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