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9월 8일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이 승장동인(僧將銅印)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에 승려 처영(處英)이 선국사(善國寺)가 소재한 교룡산성(蛟龍山城)의 승병장(僧兵將: 일명 산성별장)이 되어 성을 크게 중수하고 전란에 대비하였는데, 이 때 조정에서 산성별장의 병부로써 이 동인을 보낸 것이다. 『전북문화재대관』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 해인 1593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는 동인 만이 남아있고, 동인을 보관하던 본래의 함은 사라지고 없다.
선국사는 창건 때부터 산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지며, 조선시대에는 교룡산성을 지키는 본부로도 사용되어 수성장(守成將)과 별장(別將)이 배치되었다고 하는 것에서 동인과 선국사(善國寺)와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대대로 선국사 주지에게 전해오던 이 동인(銅印)은 동학혁명군 남접주(南接主) 김개남(金開南)이 교룡산성을 본거지로 점령할 때 별장이 유실하였다고 전해지며, 1960년에 당시 주지였던 보월(寶月)이 보제루(普齊樓) 마루 밑에서 발견하였다.
조선시대의 관인(官印) 대부분이 동제 · 철제인장인 점과 선국사의 역사적 정황으로 보아 상서원에서 주조한 관인으로 추정되며, 보관함은 없어졌으나 동인은 자획의 손실이나 탈락 없이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동인의 규격은 가로 6.3㎝, 세로 7.8㎝, 두께 1.5㎝의 장방형 동판에 높이 6.5㎝, 두께 0.7㎝의 상면이 말각된 손잡이가 달려 있다. 인면(印面)에는 ‘蛟龍山城僧將印(교룡산성승장인)’이라는 7자가 종서의 전서체로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