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한백겸(1552∼1615)의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구암(久菴)이다. 1579년(선조 12) 문과에 급제했으나 당시 당쟁이 격화되어 정국이 혼란을 거듭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경사(經史)를 비롯해 학문연구에만 전념하였다.
1585년(선조 18) 천거로 교정낭청이 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의 교정업무를 수행하였다.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나 호조좌랑을 역임하였다.
그 뒤 1609년(광해군 1)에는 호조참의로 대동법을 경기도에 시행하였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 때 사직하고 독서와 저술에 힘쓰다가 한성(漢城) 물이촌(物移村)에서 별세하였다.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를 저술해 뒷날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원주 칠봉서원(七奉書院)에 제향되고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한백겸의 묘는 조부 한여필(韓汝弼)의 묘 바로 위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묘역은 약 250여평 정도로, 봉분을 비롯해 묘비(墓碑)·상석(床石), 그리고 문인석(文人石)과 망주석(望柱石) 1쌍이 있다.
묘역은 조성 후 변경되지 않고 처음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묘비는 대석(臺石)과 월두형(月頭形)의 비신(碑身)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는 “증영의정구암공한백겸지묘증정경부인능성구씨(贈領議政久菴公韓百謙之墓贈貞敬夫人陵城具氏)”라고 새겨져 있고, 크기는 175×64×20㎝로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상석은 직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화강암의 판석(板石)을 얹었는데, 180×105×30㎝ 크기이다. 그리고 묘역의 전면 좌우에 문인석과 망주석이 있는데, 크기는 각각 210㎝, 200㎝이다.
신도비는 묘소로부터 약 200m 떨어진 산아래 진입로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1644년(인조 22)에 세웠다. 이것은 귀부(龜趺) 대좌 위에 높이 275㎝, 폭 125㎝, 두께 40㎝의 비신(碑身)을 세우고 이수(螭首)를 얹었으며, 전체 높이가 450㎝ 정도로 매우 크다.
풍수지리의 방수(防水) 개념에서 귀부의 거북머리가 뒤쪽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비문은 정경세(鄭經世)가 짓고, 오준(吳埈)이 글씨를 썼으며, 전액(篆額)은 김광욱(金光煜)의 글씨다.